길에서 김밥 먹기


오전에 편도 1시간 반 이상 걸리는 곳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점심시간 직후 4월 초에 있을 탈핵 행사 준비를 위한 현장답사 일정이 있어서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급하게 나오는데,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선배 한 분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시계를 보며 마음이 급했지만, 차마 그 분의 말씀을 끊을 수 없어서 10여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빠른 편이고, 차근차근 순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편이라 그 분이 말씀하실 때에는 맥락을 잘 살피며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와르르 쏟아내듯 말씀하신 내용들을 들으며 적절한 반응일거라 여기며 대꾸했다. 마음은 계속 늦었다는 사실에 머물러 있었고, 시선은 자꾸만 손목시계로 향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으며 그 분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10여분이 참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 분과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을 탔다. 돌아가는 시간도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약속시간과 이동시간을 고려하니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벌써부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약속 장소 근처에서 김밥이나 라면이나 잔치국수나 뭔가 금방 나오는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럴만한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시간도 돌아오는 시간도 무척 지겨웠다. 하필 이어폰을 놓고 나와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최근 바쁜 일정에 쫓겨 페이스북을 거의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왕복 3시간 이동하면서 계속 페북만 들여다봤다.


마침내 약속장소 근처에서 시계를 보니 5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어디라도 식당에 앉을 시간이 안 될 듯 했다. 김밥 한 줄을 사서 걸어가면서 먹었다. 하필 걸어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세 명이나 만났다. 다들 김밥을 손에 들고 먹으며 걷는 나에게 "왜 길에서 먹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김밥을 씹으며,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을 세 번 듣고, 같은 답을 세 번 해야 했다. 아마 곧 동네에 소문이 날 지도 모르겠다. 저 양반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길에서 김밥을 먹으며 다닐 정도로 바쁘다고.


공원에서 김밥 먹기


이주일쯤 전에는 소공원 벤치에 앉아서 김밥을 먹었다. 오전에 한 서너군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분이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기다리다가 밥 시간을 놓쳤다. 그 분은 점심시간 직후에 연락이 닿아 만났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무척 배가 고팠다. 근처에서 뭔가를 먹고 가고 싶은데,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배는 고팠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김밥 파는 가게를 하나 찾았는데, 앉을 자리가 아예 없는 포장 판매만을 하는 가게였다. 즉 테이크아웃 전문점인 셈이다. 그 가게 외에는 달리 식당을 찾기 어려워 일단 김밥 한 줄을 샀는데, 길에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소공원이 있어서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아무리 먹을 곳이 없어도 찻길 근처에서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뭔가를 먹고 싶지 않았건만, 그 소공원은 크기가 작아서 도로의 매연과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적당히 안쪽에 사람이 없는 벤치를 골라 앉아 김밥을 먹었다. 아, 그런데 내가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공원을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유독 내 주위를 자주 스쳐가는 느낌, 그 어르신들이 유독 나를 쳐다보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여기가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공원도 아니고, 점심시간이 좀 지난 오후에 여기서 홀로 불쌍하게 물도 없이 김밥을 씹고 있는 젊은이(어르신들 기준에서)를 보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씹는 속도가 빨라지고, 순식간에 김밥 한 줄을 뱃속으로 몰아넣고, 자리를 일어섰다. 시간을 재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김밥 한 줄을 먹는 시간으로는 신기록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 옛날 새만금 방조제에 기습 침투했던 날, 꼬박 스무 시간 가까이 굶었다가 나오자마자 김밥 열 줄 이상을 흡입했던 날의 기록은 깨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사실 어렸을 때 소풍가는 날을 제외하면 김밥은 그리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다. 어렸을 때 소풍 때에도 소풍에 대한 설레임 때문에 김밥도 좋았던 것이거나,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일년에 한 두 번 소풍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지, 김밥 자체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요즘은 비교적 싼 가격에,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 찾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비교적 싱겁게 먹는 입맛 탓에 모든 김밥은 내게 너무 짜다. 김밥을 바로 말아서 싸는 집에서 주문할 경우에는 단무지를 빼달라고 주문하지만, 미리 싸서 은박지에 포장까지 되어 있는 김밥을 받아나오는 경우에는 어쩔수 없이 단무지만 빼고 먹는다. 그래도 내겐 짠 음식이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밥은 잘 먹고 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작년 여름 혼자 살게 된 이후 주변에서 지인들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가끔 밥을 사주거나, 술을 사주거나 한다. 뭐 나라고 잘 먹고 싶지 않겠나? 바빠서 잘 못 챙겨 먹거나, 입맛이 없거나,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게 없는 날들이 대부분이라 대충 때울 수 밖에 없는 날이 많다.


그놈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대충 때우는 날이 많을 것이다. 가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한 몸 사는 데는 그리 큰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매일 출근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가끔 이런저런 비정기적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끔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고, 가끔 강연을 나가서 강사료를 받고, 가끔 외주 교정일을 해서 교정비를 받고, 가끔은 몸을 써서 일을 하기도 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양육비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매일 출근해야 양육비를 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은 내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가족들 먹이려고 하는 일인 것 같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먹고 사는 일은 참 어렵고 구차하다. 그러나 오늘도 또 내일도 그 어렵고 구차한 일을 이어가야 한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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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1 0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31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 입대하기 전에 새벽에 알바를 한 적 있었어요. 그래서 아침 식사를 일찍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김밥을 많이 먹었어요. 일하기 전에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을 김밥 서너 줄 사옵니다. 계속 먹게 되니까 김밥이 짜게 느껴졌어요.

감은빛 2017-04-27 17:26   좋아요 0 | URL
사먹는 김밥은 대체로 밥의 양에 비해,
안에 들어간 재료가 많아 짠 편이죠.
저는 오래전부터 남들보다 싱겁게 먹는 편이라,
김밥을 사면 백 프로 짜다고 느낍니다.
예전엔 짠 것을 참으며 그냥 먹었는데,
요즘은 단무지를 빼고 먹어요.
그자리에서 바로 김밥을 싸주는 집은 단무지를 빼달라고 하는데,
그런 요청을 받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아서 귀찮기도 하더라구요.

한 달 늦은 답글이네요.
시루스님,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