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근육
최근 친한 후배에게 들었던 말이다.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단지 보기에 좋은 정도로만 근육을 키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맨날 운동한다면서 의외로 힘을 잘 못 쓴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긴 지금의 내 상태는 그런 말을 들어도 반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긴 하다. 3년 전 교통사고로 오래 운동을 쉬어서 근육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후 가끔 근육을 회복해보고자 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예전처럼 근육이 잘 늘지 않아서 포기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은 차라리 먹는 양을 줄여서 날씬한 몸매라도 유지해보려고 하는데, 이것도 나이 탓인지 쉽지 않다.
그래, 차라리 패션 근육이라도 좋으니, 그 정도 근육이라도 회복하면 좋겠다. 예전에 샤워 후에 내 몸을 보며 만족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노력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잘 안다. 운동을 다시 열심히 해야 하는데, 나는 늘 일에 치여,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운동을 미루고 있다. 가끔 미친듯이 운동을 할 때도 있는데, 젊었을 때처럼 근육이 성장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다.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923 기후정의행진 선전전
어제 저녁 퇴근시간에는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지하철 역 출입구에서 1시간 반 동안 피켓을 들고 선전전에 참여했다. 내 피켓을 보고 단 한명이라도 더 많이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할 수 있다면 1시간 반이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1시간 반 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더라. 가만히 서 있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고 지루했다.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급격하게 체력이 방전되고,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차라리 걸으면서 선전전을 하는 거라면 두시간이나 세시간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만히 서있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래도 유동인구가 워낙 많은 곳이라 퇴근하는 인파가 한 무리씩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나와 피켓을 살피고 지나가는 시선을 느끼며, 저 분들 중에 10%만이라도 아니 1%만이라도 토요일에 거리에 함께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거기 서 있는 동안 몇 가지 흥미로운 일들이 있었다.
#1
나와 동료들은 각 출구마다 1명씩 맡아서 출구에서 나오는 인파에게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을 찾아 서 있었다. 6시부터 7시 반까지 1시간 반이었다. 내가 처음 피켓을 들고 갔을 때부터 몇몇 분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 대부분은 약속한 친구나 연인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유독 한 여성 분은 계속 나와 함께 그 공간에 남아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자리에 있었고, 40분이 지날 때까지 계속 함께였으니, 그 분은 최소 40분은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어디서 산 것인지는 몰라도 작은 과자나 사탕, 젤리 등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어디 가방이나 봉투에 넣은 것도 아니고 불편하게 한 손에 여러 봉지를 쥐고 있었다.
그 시간에 만나는 것이라면 아마도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한 것일텐데, 저 군것질 거리들은 선물하기 위한 것일까? 아님 식사를 다 마치고 함께 나눠 먹기 위한 것일까? 가방도 메고 있던데, 왜 가방에 넣지 않고 40분 넘게 손에 들고 있었을까?
함께 그 공간에 서 있은지 30분이 넘어가면서부터, 저 분도 참 힘들겠다. 누굴 기다리는 건지 몰라도 왜 굳이 역 앞에 계속 서 있는 것일까? 어디 먼저 들어가서 전화나 문자를 남겨도 될텐데. 뭐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기다리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 궁금해했다. 저렇게 오래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저 분에게 어떤 존재일까?
40분이 조금 더 지나서 마침내 그 분이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한 사람은 그 분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었다. 친구? 아니면 가족? 얼굴이 닮지 않아서 직계 가족은 아닐 것 같았다. 아주 친한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2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곳이라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분들은 대체로 휴대폰을 쳐다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와서 나를 비롯해 주위에 시선을 주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왔다. 중년부터 어르신들은 대체로 나와 피켓에 한번씩 눈길을 주고 빠르게 스쳐갔다. 간혹 몇몇 어르신들은 글씨를 읽느라 혹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내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쳐다보고 계시기도 했다. 간혹 남성 어르신들이 내 피켓을 쳐다보며 표정이 일그러질 때면 혹시라도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아닐지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만약 소리를 지르거나 시비를 걸면, 능청스럽게 대처해야지 하고 어떻게 답할지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도 했다.
제일 눈에 잘 띄는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정장과 캐주얼, 트레이닝 복 같은 간편한 차림과 아주 한껏 멋을 낸 원피스 같은 옷들이 끊임없이 눈 앞을 스쳐갔다. 사람들의 머리 스타일도 눈에 잘 들어왔다. 남성들은 대체로 짧은 머리, 물론 그 안에서도 아주 짧은 흔히 스포츠 머리라고 부르는 형태나 옛날말로 상고 머리라고 부르는 귀 주위와 뒷머리만 밀어 올린 형태 등 다양하게 나뉜다. 간혹 나처럼 남성인데도 긴 머리도 있었다. 여성들은 전반적으로 짧은 커트 머리나 단발 머리가 많았고, 긴 머리는 적었다.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내 반대편에 조금 멀리 거리를 두고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단발머리에 체격이 크고 조금 살이 찐 몸매였다. 편한 트레이닝 복 상하의를 입고 신발도 크록스 샌들을 신고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실루엣만 보고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단발머리에 조금 살이 있는 몸매의 형태가 그렇게 보였다. 무엇보다 (이렇게 표현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가슴 쪽에 살이 도드라져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분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가끔씩 눈길이 갔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얼굴형이 어쩐지 남성인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뭐, 남성이건 여성이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때는 좀 지루하기도 했고, 슬슬 허리도 아프고 피로가 느껴지기 시작해서 나도 모르게 그 분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한번 남성인 것 같다고 생각이 바뀌자 이젠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그 분이 반가운 표정으로 출구 쪽으로 다가왔다. 출구에선 인파에 섞여오던 한 여성 분이 그 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껴안았고, 기다리던 그 분이 출구에서 나온 여성 분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뺨에 입을 맞췄다. 목소리가 들렸는데, 확실히 남성이었다. 여성 분은 세미정장 차림이었는데, 세련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저쪽으로 멀어졌다.
문득 누군가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나를 보고 저 사람 남자야? 여자야? 하고 궁금해하지 않을까? 몇 차례 남자 화장실에서의 에피소드도 있었고, 얼핏 보면 잘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나처럼 머리를 기른 남성이 많아지면 이런 편견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내 주위에 여러 명 있었다. 머리가 짧은 여성은 이미 충분히 많은 것 같았다. 이제 머리를 기른 남성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3
가끔 눈에 확 띄는 사람들이 지나가곤 했다. 키가 크거나, 몸매가 빼어나거나, 옷을 잘 입었거나,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쁘거나. 거기 서 있으면서 내가 워낙 눈에 띄지 않는 편이라는 점에 실망을 하게 되었다. 머리를 길렀다는 점 외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외모는 아니다. 이럴 때에 내가 연예인처럼 외모가 빼어나다면 지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내 외모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면 토요일에 거리에 함께 나서주지 않을까? 순간 내 외모에 대한 실망 아니 절망감이 들었다. 좀 더 키가 컸다면, 좀 더 체격이 좋았다면, 좀 더 얼굴이 잘 생겼다면 좋았을텐데.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태어난 걸 이제와 무슨 수를 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 여성 분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옷이 아니었다.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나 입을만한 옷, 독특한 모양의 까만 원피스였다. 게다가 옷의 모양으로 보아 누구나 쉽게 소화하기 어려우리라 짐작했다. 어지간히 몸매에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옷이었다. 게다가 그 원피스의 길이가 무척 짧았다. 짧은 치마 아래로 늘씬하게 긴 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일부러 보려고 쳐다보지 않아도 그냥 눈에 들어온 정보였다.
나는 기후정의행진을 홍보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여성분을 눈으로 쫓지 않았다. 내가 그 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면, 나를 향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들 중에 상당 수가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 지 눈치챘을 것이고, 그 다음 순간 나를 향해 욕을 하거나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나는 일부러 그 방향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돌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서던 한 중년의 아저씨는 그 여성 분을 쳐다보더니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숱이 급격하게 줄고 있는 입장에서 무척 슬픈 단어이지만) 그 대머리 아저씨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면서도 그 여성 분을 눈으로 쫓았고, 다음 순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하는 모습을 연출해, 그 자리에 함께했던 수많은 인파들에게 마치 한 편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은 장면을 제공했다.
아, 아저씨. 알아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어요. 나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이상한 변태 같은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냥 저절로 눈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쳐다보면 안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야죠. 아무리 눈이 가도 한번 봤으면, 이제 그만 쳐다보고 눈길을 돌려 계단을 인지하고 발을 디디셨어야죠. 곁에 동반자(아내나 연인이나 가족)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조심히 가세요.
#4
가끔 그렇게 거리에 서면 아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예전부터 1인 시위, 선전전, 캠페인, 서명운동, 연설회, 기자회견 등을 하다보면 자주 아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제는 내가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동료 활동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나도 반가움에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는 바빠서 그랬는지 자전거를 멈추지는 않고 손짓으로 수고하라는 의미를 전하며 멀어졌다.
그가 멀어지고 나서 또 아는 사람을 몇 명이나 더 마주칠지 예측을 해봤다. 유동인구가 워낙 많고 이쪽 동네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아마 두 세명은 더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다가 다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지금 다른 지하철 역의 다른 출구에 서 있구나 하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 그럼 또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쉽지는 않겠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일부러 나를 보러 온 선배 한 명을 만난 것 외에 다른 지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5
그렇게 서 있으면서 몇 가지 감정이 들었다. 하나는 부러움이었다. 그 전철역 앞 출구를 약속 장소로 정한 사람들은 끝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약속한 사람을 만나 반가워하며 악수를 나누거나 포옹을 나누거나 심지어 뺨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잡고 혹은 팔짱을 끼고 혹은 어깨에 손을 얹고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며,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저렇게 반갑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두번째는 서러움이었다. 나는 배가 고팠다. 7시 반에 선전전을 마치면 피켓을 사무실에 갖다 놓고 서둘러 회의를 하러 이동해야 했다. 회의는 아마 9시 반은 되어야 마칠 것이다. 9시 반에 누군가 나와 함께 밥을 먹어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들 이미 저녁을 먹었을테니. 나는 그 시간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어야 할까? 그 늦은 시간까지 일에 매여서 밥도 못 먹고 돌아다니는 내 팔자가 문득 서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나는 피로를 느껴고 허리 통증을 느꼈다.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 씻고 편히 쉴텐데, 나는 땀에 쩔은 옷차림으로 아직도 다음 일정이 남아 있는 이 상태라는 것이 서러웠다.
마지막은 그래도 희망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나를 향한 눈빛에서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분들이 있었다. 말로 전하지는 않았지만, "응원하고 있어요." 혹은 "고마워요. 함께 할게요." 라거나 "그날 만나요." 등의 의사가 내게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적어도 내가 이 피로와 허리 통증과 지루함을 감수하고 1시간 반을 서 있었던 것은 이 분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였어. 비록 부러움과 서러움의 감정을 다 메워버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로를 이겨내고, 허리 통증 참으며 끝까지 시간을 채우고, 다음 회의 장소로 서둘러 이동할 정도의 동기를 만들어주었다.
내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야겠다. 이번주 토요일 저와 데이트 하시지 않을래요? 거리를 맘껏 쏘다니며 소리도 지르고 몸짓도 해봐요. 자동차가 독점했던 아스팔트를 잠시나마 차지하는 특별한 경험을 함께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몸이 되어 함께 걷고, 함께 뛰며, 한 목소리로 외치는 신기한 경험을 함께해요. 9월 23일 오후 2시 세종대로에서 만나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