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오늘은 큰 아이의 생일이다.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았던 날이 눈에 선한데, 아이는 벌써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이제 어른이 다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진통 주기가 짧아져서 병원에 문의한 후에 애들 엄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병원으로 걸어가면서, "오늘 아이가 태어나면 시월의 마지막 날이 생일이 되겠네." 라고 이야기하며 가수 이용의 유명한 노래를 흥얼거렸었다. 나는 정말 숫자를 못 외우는 편이라, 가장 친한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님 생신도 자주 잊는다. 정말 외우기 쉬운 숫자로 된 내 생일도 가끔은 잊는다. 그런데 시월의 마지막 날인 큰 아이의 생일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어쩌면 이런 아빠를 둔 큰 아이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가끔 한다. 작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이는 5월 2일에 태어났는데, 5월 1일인 노동절이 생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도 손잡고 병원으로 걸어가면서 "어제 태어났으면 노동절이 생일이었을텐데. 그럼 내가 행사 때문에 생일을 못챙기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데, 잘 됐다." 이런 말들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작은 아이의 생일도 한번도 잊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는 내게 정말 소중한 보물이자, 태어나줘서 고마운 선물 같은 존재다. 어제 밤 자정을 막 지나 아이에게 축하의 문자를 보내며 지금껏 아이와 지낸 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 속에서 상영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심하게 아픈 적도 없고,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특히 큰 아이는 첫째라 내게는 더 각별한 존재였다. 물론 둘째도 막내로서 내게 중요한 의미이지만, 맏이인 첫째는 철이 일찍 들어서 아빠를 잘 챙기는 편이고, 가끔 친구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서 늦게까지 실기 수업을 하는 날이라 못 만나고, 내일 저녁에 만나 생일을 축하하기로 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빈 시간이 없이 일정이 꽉 찼고, 오후 워크숍은 약 4시간 동안 혼자 진행해야 해서 엄청 힘든 하루가 될 예정이다. 내일이 휙 지나가고 얼른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떠남


어제는 모친상을 당한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올해 초에 어떤 수술을 받은 후에 갑자기 여기저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오래 계시다가 잠시 퇴원해 계셨고, 곧 다시 병원에 가실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새벽에 돌아가셔서 임종을 지키지도 못 했다고 한다. 애써 웃음 짓는 그의 어깨를 쓸어주며,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흰머리 가득한 남자들이 껴안는 모습을 보면 주위 사람들이 당황할 것 같아서 참았다.


나를 비롯해서 내 주위에 참 독특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특이한 사람이다. 나도 무엇이든 의심하고 보는 편이고, 무엇이든 분석부터 하고 보는 편인데, 이 사람은 나보다 한 백배 정도 더 한 사람이다. 본인 주장이 너무 강한 편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참 안 듣는 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적을 많이 만드는 편인데,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보인다. 나는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듣기 싫은 이야기도 들어주려 노력하고,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하는 편인데, 이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좀 이상하고 고약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가장 냉철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리고 옳은 주장을 펼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 성격 탓에 남들은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못하는 일들을 시원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글을 참 잘 쓴다. 내가 이 사람에게서 가장 부러워하는 능력이다. 글을 쓰는데 좀 오래걸리는 것이 흠이지만, 다 쓴 글을 검토해달라고 가장 먼저 내게 보내는데, 읽다보면 정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글을 쓰면 대게 제일 먼저 내게 봐달라고 보낸다. 이건 오래 전 그가 시민신문 기자였고, 내가 편집위원이었을 때부터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신문 마감하는 날이면 그가 급하게 마무리한 기사들을 받아서 교정을 보느라 밤을 새곤 했었다. 편집위원을 그만 둔 후에도 가끔 그는 글을 봐달라고 연락을 해왔었다. 그건 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어제 장례식장에 한동안 앉아 있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멀리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하는 부모님이 생각났고, 돌아가신 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생각났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으니 어쩔수 없이 기억 속의 다른 장례식장 모습들이 겹쳐졌다. 고등학생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 기간 내내 잔심부름을 하며 함께 있다가 장지까지 따라가서 운구를 도왔던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멍하니 장례식장 구석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역시 장례식 내내 멍하니 지내다가 화장장에서 화로에 관을 넣고 나서야 갑자기 울컥 감정이 솟구쳤던 기억도 났다. 그때 어머니께서 내 품에 안겨서 통곡을 하셨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본 많은 지인들은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대개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우리가 못 본 다른 시간에 아주 많이 슬퍼했겠지만.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을 때 애들 엄마는 바쁘게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렇게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장례식 내내 함께 있었지만, 우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물론 마찬가지로 어디 다른 공간에서 혼자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재수없게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과연 나는 담담히 장례식장 앉아서 손님들을 맞아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상상했다. 인간은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헤어짐을 잘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슬퍼하지마. 아빠는 갈 때가 되어서 가는 거니까. 절대 아빠가 너희를 떠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어쩔수 없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니, 그대로 잘 받아들이면 좋겠어." 물론 쉽지 않을 일일 것이고 나 역시도 마음과 달리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아이들이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나는 삼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거의 죽을 뻔 했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했었다. 현대 사회는 워낙 많은 일들이 예상하지 못하게 벌어지니 우리 모두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태원 참사와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오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1999년 10월 30일 벌어진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에 대한 글을 읽었다. 당시 1층 고기집 손님들과 3층 당구장 손님들은 모두 무사히 잘 대피했는데, 유독 2층 호프집 손님들은 갇혀 있다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56명이 죽고 78명이 큰 부상을 당했는데, 대부분이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당시 2층 호프집은 그 화재 7개월 전에 안전기준 미달로 영업 정지를 당했었는데,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으로 영업을 계속 해왔다고 했다. 그날은 학교 축제를 마친 고등학생들이 그 호프집을 가득 채웟다고 했다. 비상구도 없는 호프집은 창문들도 모두 석고보드로 막아두어서 유일한 탈출구는 출입문 하나였는데, 불이 나서 대피하려는 학생들을 주인이 못 가게 막았다고 했다. 술값을 내고 가라는 이유로 그랬단다.


예전에 이 뉴스를 흘려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는데, 정말 몰상식한 일이다. 게다가 이 고등학생들은 술집에 갔다가 죽었다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을 당했을 지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나는 주말부터 계속 작년 이태원 참사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전 국민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이태원 참사. 그런데 99년에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56명의 고등학생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니! 


오늘은 할일이 많았는데도 마음이 심란하여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 알라딘에 들어와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읽다가 이 글을 쓴다. 내일 워크숍 준비 때문에 계속 머리 속이 복잡하지만, 나는 늘 임기응변에 강한 편이니, 내일의 나를 믿고 오늘을 그냥 보냈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겠지.


공부만 하셨어요?


9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약 두 달 반 정도 주말마다 일정이 있다. 계속 주말을 온전히 쉬지 못해 피로가 많이 쌓였다. 일정이 계속 있다는 건, 그 준비를 위해 어마어마한 업무가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제나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가장 바쁜 사람으로 언급되는 편인데, 이번 두어달은 정말 역대 최악으로 정신이 없이 지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 달 더 남았다. 죄다 중요한 일정들이고 잘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늘 피곤하다는 말만 하고 있다.


10월 중순 어느 토요일에 동네 축제에 판매 부스와 체험 부스를 운영한 날이었다. 무대가 가까이에 있었고, 무대 스피커 음량이 너무 커서 부스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데, 소음 때문에 자꾸 내 목소리가 지워져 계속 목을 많이 써야했다. 그래도 최근 후배에게 두성을 배운 것을 응용해 가급적이면 성대를 쓰지 않고 배 힘으로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설명을 하다보면 목을 아예 안 쓸수는 없어서 금방 목이 가버렸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몇 주째인지 기억도 못할만큼 계속 주말을 못 쉬었기에 너무너무 피곤했다. 그날 우리 체험 부스를 방문했던 친한 언니들이 다들 내 얼굴을 보고 너무 피곤해 보인다고 한 마디씩 하셨다.


암튼 축제를 마칠 때쯤 짐을 정리하면서 손수레에 여러 박스를 쌓고 고무줄로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손수레를 별로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고무줄을 어떻게 잘 묶어야 할지 몰라 조금 헤매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시던 매니저님이 내게 아주 약간 언성을 높이며 "이사님, 공부만 하셨어요?" 라고 물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서 아주 익숙하게 고무줄로 짐들을 고정시켰다. 아, 내가 이런 일에 너무 서툴러서 공부만 했느냐고 물었던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사실 공구를 사용하거나, 뭔가 도구들을 사용하는 일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매니저님의 말씀처럼 공부만 했던 건 당연히 아니고, 나도 막노동도 많이 했고, 이런저런 힘쓰는 일들을 많이 해봤는데, 도구 사용에 조금 익숙치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올해 초에 차를 구매한 후배가 가까이에 살고 있다. 업무 상 짐을 옮길 일이 많은데, 우리 법인은 차가 없고, 나도 차가 없어서 공유카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그날은 근처에 비어있는 공유카가 없어서 후배에게 연락해 차를 잠시 빌렸었다. 저녁에 그 후배가 퇴근하면서 우리 사무실에서 차를 받아갔는데, 차 오른쪽 뒷바퀴 공기압이 낮다는 경고가 떴다고 했다. 나는 내가 운전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생각난 김에 차 바퀴를 살펴보기로 했다. 주차타워에서 차를 꺼내 뒷바퀴를 보니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센서에서는 압력이 낮다고 나오니 타이어에 공기를 좀 더 넣어보기로 했다. 트렁크에서 전기에어펌프를 꺼낸 그 후배의 손놀림이 좀 많이 어설퍼 보였다. 차를 운전하고 관리한 경험이 적으니 그건 당연했다. 나는 예전에 차가 있을 때 손 펌프나 발 펌프를 주로 사용했었는데, 이런 전기식 펌프는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한참을 후배가 애쓰는데, 전혀 해결이 안 되는 눈치였다. 그 전기펌프의 소음이 너무 커서 잘 몰랐는데, 공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계속 새고 있었다. 내가 자세히 보니 연결 부위를 끝까지 돌려넣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보였다. 설명을 했는데도 그 친구가 잘 이해를 못 한거 같아서 내가 나서서 해결해줬다. 한번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내가 전반적으로 이런 류의 경험이 부족해 뭔가 고치는 등 손으로 하는 작업을 잘 하는 편은 아닌데, 차는 그래도 오래 몰았었고, 간단한 점검과 정비는 직접 했었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일은 또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공부만 해서 이런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심지어 나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공부를 열심히 한 경험도 별로 없는 사람이다. 공부를 잘했던 사람도 절대 아니고.


그 손수레의 고무줄 고정하는 방법도 매니저님이 보여주셔서 다음에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암튼 순하고 조용조용한 매니저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나한테 저런 말을 했을까?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는 재밌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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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01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월 마지막 날이 첫째 따님이 태어난 날이었군요 오늘 만나시겠네요 몇 시간 뒤에...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님이 숫자 기억 못하는데 두 따님은 기억하기 좋은 날 태어나서 잊지 않겠습니다 감은빛 님이 쓰신 것처럼 보물처럼 여기니 더 기억하는 거겠지요 사랑은 내리사랑이죠

사람은 다 죽고 그렇게 헤어지기도 하죠 그런 일을 평소에 생각하면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덜 슬플지... 많이 슬프지 않도록 평소에 잘 지내면 좋을 듯합니다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그렇게 할 시간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감은빛 님은 따님하고 지낼 시간은 만들기도 하시는군요 앞으로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처음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해도 한번 하면 다음엔 잘 하기도 하죠 감은빛 님 십일월 즐겁게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감은빛 2023-11-24 20:18   좋아요 0 | URL
와! 제가 이 댓글에도 답을 안 달았었군요.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딸아이의 생일만큼은
어떤 이유를 달아서라도 외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사랑은 내리사랑이니까요. ㅎㅎ

저 며칠 전에도 해외에서 만든 이태원 참사 다큐를 보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계속 우느라 멈췄다가 다시 보다가 또 울고 그랬네요.

늘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11-03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4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