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던 큰 아이와의 데이트
이 글은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923 기후정의행진의 후기와 비슷한 느낌이 글이 될 것이다. 엊그제 월요일부터 이 글을 쓰고 싶었으나, 이틀 동안 바빴고 오늘도 바쁘다. 바쁘지만 알라딘에 들어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개의 일을 몰아서 해치우는 와중에 한 두가지 일을 마쳤으니, 나머지 일을 해치우기 위해 집중하기 전에 내 두뇌를 잠시 쉬어가게 하고 싶어서 였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일이 정말로 내 두뇌를 쉬게 하는 것 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은 없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기분이 들 뿐.
지금까지 전국 규모의 기후행진은 세 번 있었다. 2019년이 첫번째였고, 작년인 2022년이 두번째, 올해가 세번째였다. 나는 당연히 세 번 모두 참여했고, 늘 깃발이나 짐을 들고 행진을 했다. 대학 시절부터 깃발을 드는 일이 재미있고 좋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 깃발은 늘 키가 큰 친구들이 들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깃발은 그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준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뭔가 벅찬 느낌이 든다.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당연히 그냥 맨 몸으로 걷는 것 보다는 힘들다. 그럼에도 깃발 들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깃발을 들면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기 때문이다.
19년 첫 행진 때는 작은 아이와 같이 참여했다. 큰 아이도 함께 데려오고 싶었지만, 뭔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큰 아이는 못 데려갔었다. 작은 아이는 그때만 해도 아직 어려서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사실 언니 없이 자기 혼자 아빠랑 나서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작은 아이만 혼자 데려가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집회나 행진에 많이 참여했다. 아이들이 주로 기억하는 건 박근혜 탄핵 국면의 집회들이지만, 나는 아직 아기였던 큰 아이를 데리고 한미FTA 범국본 주최의 시위나 행진에 데리고 다녔고, 그 이후에 촛불 국면에서도 자주 데리고 나갔다. 이런 대규모 시위나 행진 외에도 기륭전자 투쟁, 두물머리 투쟁 등 다양한 소규모 농성이나 행진에도 데리고 다녔다. 작은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한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일을 중단했다. 큰 아이도 챙기면서 아직 어린 아기인 작은 아이까지 데리고 장시간 거리에 머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은 아이가 조금 더 자란 이후 부터 다시 둘 다 데리고 거리로 자주 나갔다. 언젠가는 시청-광화문-안국-종로-을지로-시청 이라는 평소보다 좀 긴 거리이자 아직 어린 아이들이 걷기에 좀 힘든 거리를, 전체 대열 후미에서 따라 갔던 기억이 있다. 그날 아이들 입장에선 정말 많이 힘들었을텐데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며 씩씩하게 잘 따라와 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아이들을 데리고 집회, 시위, 행진 등에 다녔는데, 아이들은 어릴 때의 기억들은 대부분 잊고 자신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이자 비교적 최근 기억인 박근혜 탄핵 국면의 집회만 기억했다.
심지어 작은 아이는 4년 전 가을인 19년의 첫 기후행진에 자신이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얼른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 다잉 퍼포먼스를 하느라 차도인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운 아주 독특한 경험을 했고, 그에 대해 나와 여러번 얘기했음에도 말이다. 그날 어린이 참가자들도 많았었다. 내 주위에는 작은 아이처럼 초등학생인 어린이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동네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에서 여러 차례 마주쳤던 아이들이었다. 작은 아이는 그 아이들과 캠프에서 함께 논 적도 있었다. 그 집 부모들 중 엄마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좀 있어서 우리는 일부러 같이 걸으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도록 했다.
작년, 두번째 행진 때에는 아이들 둘 다 데려가지 못했다. 아마 애들 엄마랑 뭔가 다른 일정이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는 그 분위기 때문에 첫번째에 비해 어린이, 청소년 참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도 많았다. 아마 아이들과 함께 했다면 아이들에게도 강하게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못 나온 것이 아쉬웠지만, 작년 행진은 좀 유난히 힘들었다. 대오가 길었고, 우리 대오는 이번에도 조금 후미에 있어서 경찰의 교통 통제에 발이 묶여 있다가 뛰어가기를 반복했다. 내가 들었던 깃발은 유난히 짧은 깃대에 묶여 있었는데, 처음 깃발을 제작했던 사람이 들고 다니기 편하자고 일부러 짧은 깃대를 샀었다고 들었다. 그냥 남들처럼 접이식 낚시대를 사서 메고 다니는 편이 훨씬 더 편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암튼 19년에도, 작년 22년에도, 올해 가을에도 세 번 모두 짧은 깃대를 높이 치켜들고 행진하느라 좀 힘들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작년에는 행진 거리도 좀 길었고, 상대적으로 뒤쪽에서 따라가느라 더 힘들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는 작은 아이가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오고 큰 아이만 데려왔다. 큰 아이와 이렇게 거리에 나서는 일은 참 오랜만이라 동네 활동가들이 다들 오랜만에 만난 아이를 엄청 반가워했다. 큰 아이는 중학생 때 키가 훌쩍 컸는데, 동네 활동가들은 다들 그 이후로는 큰 아이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확 커진 키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새삼 느꼈는데, 내 주위 여성 활동가 선배들과 후배들은 대부분 우리 큰 아이보다 키가 작았다. 하긴 이 아이는 중학생 때 이미 엄마 키를 추월했었다. 빨리 아빠 키도 따라 잡겠다고 했었지만, 아직은 내 키에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큰 아이와 나는 깃발과 손피켓을 만들 재료들(깨끗하게 잘라놓은 종이상자들과 여러 색이 든 매직 세트 등)을 갖고 집결 시간보다 1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우리 처럼 먼저 도착한 다른 참가자들도 삼삼오오 깃발 아래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지역 활동가들을 기다리며 큰 아이는 직접 손 피켓을 하나 만들었다. MZ 세대 감성이 듬뿍 담긴 최신 밈으로 피켓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림부터 그리고 문구를 쓰더니 색칠까지 했다. 아이가 제법 긴 시간을 들여 그 피켓을 다 만들 즈음에 동네 활동가 선배 한 분이 그 작업을 유심히 보시더니 자기 손 피켓과 바꿔달라고 부탁했고, 아이는 완성하자마자 흔쾌히 바꿨다. 그 선배가 자신이 만든 피켓을 잘 보이도록 높이 들고 다니는 모습을 즐겼다. 음,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가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넓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만약 나였다면 그렇게 정성스레 만든 피켓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아이도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응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가끔 내 깃발을 들어보기도 하고, 짐을 들어주기도 하면서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었다. 동네 선배 활동가들은 내가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 한 명만 말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다른 타이밍에 내게 말했다. 질투가 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아들이나 딸은 이런 행진에 나오지도 않고, 손을 잡고 같이 걷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니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처음에 우리 부부가 이혼하고 내가 집을 나왔을 때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모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결혼생활 중에도 둘 중 하나는 늘 일과 모임 등으로 자리를 비우고 다른 한 명만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부부가 둘이 같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한 사람하고만 지내는 것에 익숙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래도 한 집에 같이 사는 것과 다른 집에 따로 사는 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당시 아이들이 살던 집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서 아이들이 언제든 편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했고, 그 당시에만 해도 일주일에 3일은 우리 집에서 나머지 4일은 엄마 집에서 보내도록 했다. 아이들은 엄마 집과 아빠 집을 오가며 지내는 생활에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아, 당시 내가 얻은 집이 좀 많이 작고 열악해서 그런 측면에서는 불만이 있었지만, 단순히 엄마 집과 아빠 집을 오간다는 사실 자체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큰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 사춘기를 겪을 무렵부터 갑자기 이게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 가끔 작은 아이가 잠들고나서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런 질문들을 하곤 했다. 큰 아이는 사춘기를 겪으며 아빠인 내게 부쩍 더 친밀하게 대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아이들이 사는 집에서 조금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전처럼 편하게 오가지 못하게 되자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는 횟수를 줄였다. 일주일에 3일에서 2일로, 나중에는 일주일에 겨우 하루나 이틀을 억지로 오기도 했다. 그럴 수록 큰 아이는 내게 더 친밀감을 표현했다. 먼저 다가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려고 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한 편으로 좋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프기도 했다.
이번에 내가 같이 기후정의행진에 가자고 했을 때, 큰 아이는 특별히 다른 일이 없다며 너무나도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했다. 아마 작은 아이였다면 혼자 따라가는 일은 싫다고 했을 것이다. 언니랑 함께라면 당연히 좋다고 했겠지만. 이런 모습도 큰 아이가 나를 대하는 특유의 태도라고 여긴다. 아이는 멋 모르고 겪었던 부모의 이혼을 나중에 깨달으며 무언가 많이 고민하고 힘들었을 것이고 평소 곁에 자주 있어주지 못했던 아빠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세상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한창 자라는 시기에 평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 만큼은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서로 상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처와 아픔이 지금의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
지난 토요일 기후행진에 참여한 덕분에 큰 아이와 나는 재미있는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행진을 다 마친 후 나와 아이는 무척 피곤했고, 엄청 배가 고팠다. 우리는 동네 활동가 선배들이 함께 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을 짐과 깃발을 사무실에 갖다 둬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단 둘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다. 뭐가 먹고 싶냐는 질문에 큰 아이는 짜장면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무실에 깃발과 짐들을 두고 근처 맛이 괜찮은 중국집을 찾아갔다. 아이는 짜장과 함께 탕수육을 얘기했지만, 나는 아이가 예전에 먹고 싶다고 말했던 크림새우를 주문했다. 우린 정말 맛있게 또 배부르게 먹으며, 그날 행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너무 늦지 않게 큰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작은 아이 얼굴도 잠시 보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의 완벽한 데이트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이에게도 그럴 것이다. 아이는 올해 기후정의행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