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돌아오는 일정

해마다 이맘 때에는 이곳 알라딘 서재에 이 이야기를 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지난주 쯤부터 이 북플 ‘지난 오늘‘ 쓴 글에서ㅠ이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정확한 날짜는 달라도 늘 10월 중순에는 애들 엄마가 약 1주일 정도 해외출장을 간다. 그럼 나는 그 1주일을 아이들과 보냈다. 이건 애들 엄마가 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해마다 해왔던 일이고, 큰 아이를 낳고 다음 해에도 다녀왔고, 작은 아이를 낳고도 다녀왔었다. 그리고 이혼하고도 매년 다녀왔다. 이혼 후에는 이 기간 동안 내가 온전히 1주일동안 아이들과 지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어려서 손이 많이 갔다. 혼자 아이 둘을 챙겨 어린이집과 학교에 보내주고 출근했다가 퇴근하면서 애들 데려와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를 많이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다 옛날 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이젠 엄마를 찾아 울지 않았고, 보고 싶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아침에도 내가 할 일이 적은 편이다. 그저 나를 닮아 아침 잠이 많은 두 녀석을 차례로 깨워 화장실에 보내고, 가벼운 아침을 먹이고, 시간 맞춰 출발하도록 잔소리를 좀 하면 끝이다. 아이들은 씻고 옷 갈아입고 가방 챙기는 일을 스스로 다 잘한다. 저녁에도 내가 회의가 있어 늦으면 아이들끼리 차려 먹는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한테 주문해달라고 요구할 줄도 안다.

올해 좀 다른 점이 있긴하다. 큰 아이의 대학 입시 때문에 실기 시험 일정 두 개가 이 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애들 엄마는 여러 이유로 내가 큰 아이를 데리고 실기 시험장에 다녀와주기를 원했다. 사실 아이를 혼자 보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와 길찾기 등에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시험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배려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세 곳의 대학에 원서를 넣었고 한 학교는 본고사 시험을 한 번 보았고, 나머지 두 학교는 면접만 봤는데, 세 번 모두 나 혼자 학교를 찾아갔었다.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는 뜻도 아니고 꼭 그래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그냥 그랬었구나 하는 회상이다. 하긴 내가 대학에 갈 때는 수시입학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어서, 지금 큰 아이가 수능도 치기 전에 많은 학교에 원서를 넣고 면접과 실기시험을 보러 다니는 일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아이는 시를 쓰고 있다. 여러 백일장과 공모전에서 입상했고 대상도 몇 번 수상했지만, 그 정도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고 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대학에는 문창과가 별로 없다. 하긴 나도 그 옛날에 대학 입학 할 때는 문창과의 존재를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나서 편입을 해서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알아보니 문창과를 가진 학교가 별로 없었었다. 그래도 서울에는 2년제 예술대학들이 몇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이는 문창과가 아닌 극작과에 실기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아이는 지금 열심히 주어진 주제에 맞춰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시험을 마칠 때까지 학교 근처 커피숍에 차를 시켜놓고 기다리며 이 글을 폰으로 두드리고 있다. 극작과는 문창과와는 많이 다를텐데, 아이는 학교에서 2학년 때부터 전공을 나눠서 극작에 대해서도 별로 배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글을 쓴다는 점에서 대학을 못 가는 것 보다는 나을수도 있겠지.

음, 이번에 아이에게 들어보니 여러 대학에 원서를 넣는라 원서 접수비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내년에는 아이의 대학 등록금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겠구나. 내 경우엔 일부 장학금을 받았고, 일부는 알바를 해서 벌기도 했고, 나중에는 학자금 대출도 좀 받았었다. 아이는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대학에 합격한다면 등록금을 납부해야 할테니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아이는 토요일에도 경기도 어딘가의 대학에 실기 시험을 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이라 대중교통을 타고 움직였는데, 토요일엔 차로 움직여야 한다. 아이는 아마 지금 여러 생각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 시절에 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고민이 많았었다. 원서를 넣었던 세 곳의 대학 중 하나만 부산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다른 지역이었기에, 태어나서 쭉 자라왔던 고향을 떠나는 문제부터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이 세 학교 모두 합격했고 가장 좋은 학교였던 부산에 있는 학교를 입학했지만, 만약 다른 지역을 선택했다면 내 인생은 아마 제법 많이 달라졌으리라.

아까 아이를 시험장 건물에 들여보내면서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었는데, 극본을 써본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쉽게 쓰고 편하게 쓰라는 말만 겨우 해줬다. 소설이었다면 뭔가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까? 이미 아이는 학교에서 나보다 더 전문가인 선생님들에게 잘 배우고 있으니 내 조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2년 전, 아이가 아직 1학년이었을 때에는 내가 이런저런 조언을 가끔 해줬으나, 2학년이 되어 전공을 시로 정한 후로 나는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가끔 백일장이나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시를 보내달라고 해서 살펴보고 잘 썼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유일하게 해줄수 있었던 일이었다.

당장 아이가 좀 힘들긴 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학교에 응시해서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는 것은 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경험은 반드시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어제 밤에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너는 아빠 딸이라서 면접도 실기시험도 다 잘 볼거야. 아빠는 면접에서 떨린 적도 별로 없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아이는 잘난 척 한다고 뭐라 했지만, 마음 속에 잘할 수 있다는 씨앗 하나를 심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자신감을 잘 품고 이 시기를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나중에 아이가 이 시기를 돌아볼 때, 그때 아빠가 이런 말로 나를 응원했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쪼그려 앉기

어제 작은 아이가 자기는 쪼그려 앉는 동작이 안 된다고 발바닥을 붙이고 앉으면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나는 아빠 닮아서 그런거래.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쪼그려 앉는 동작을 보여줬다. 이 자세는 스쿼트의 기본 동작으로 이 자세를 못하면 역기를 들 수가 없다. 중학교때부터 역기를 들었던 내가 이 자세를 못할수는 없는 일이다. 큰 아이도 내 옆에서 같은 자세를 편하게 취했다. 작은 아이는 그럼 왜 나만 안 되는 거냐고 약간 투정을 부렸다. 발바닥을 대고 쪼그려 앉았을 때 뒤로 무게중심이 쏠려 넘어가는 건 발목 유연성과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나는 발목 유연성을 길러줄 수 있는 동작 두세가지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시간 날 때마다 꾸준히 하라고 당부했다. 아이는 그닥 열심히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라면서 좀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좀 신기한 일은 며칠 전에 인스타그램 쇼츠 콘텐츠를 넘겨보다가 운동 영상을 주로 올리는 어느 채널에서 정확하게 이 문제를 다룬 영상을 올렸더뉴걸 봤었다. 그래서 내가 그 기억을 떠올려 작은 아이에게 그 얘기를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우연히 이렇게 딱 들어맞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생각해보면 큰 아이와는 대화도 많이 하는 편이고, 글쓰기와 관련해 공통의 대화 주제도 풍부한 편이고, 내가 아이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들도 많았는데, 작은 아이와는 접점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나도 어릴 때에는 만화를 그렸다. 다만,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고 시기를 놓치고 난 후에는 관심도 많이 멀어졌다. 나중에 잠깐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지만, 재주가 영 별로라는 현실을 확인하고 좌절하게 되었을 뿐이다. 작은 아이에게 평소 미술학원에서 그린 것들을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여러번 얘기했는데, 아이는 사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 단순히 잊은 것인지, 아니면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암튼 작은 아이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구나. 좀 더 세심한 태도로 아이와 지내야 하겠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해야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데, 지금 이렇게 커피숍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편치 않다. 당장 다음 주에 토론자로 참여해야 해서 토론문을 써서 보내야 하는데, 내용을 다 구상해놓지 못했다. 이번 주말 일정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들도 많고, 11월 중순까지 일정이 빽빽하고 그들 대다수가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이다.

에휴, 이걸 성격 탓을 해야할지, 운명이나 팔자 탓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암튼 또 힘을 내서 해나갈 수 밖에. 바쁜 탓에 시간이 잘 가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또 한 시절이 지나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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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0-19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창과 이야기를 하시니...

얼마 전에 저희 회사 동료분의
자제분이 글쓰기에 관심이 있
다고 해서 한참 이야기한 기억
이 났습니다.

결국 문창과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들었네요.

그렇게 우리의 시간들을 흘러
가는 모양입니다.

감은빛 2023-10-19 18:2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 진학하고 한참 후에 문창과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문예창작이라는 과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갓 같은 기분이었어요. 국어국문과에서는 어학 수업이 더 많아서 제가 원했던 문학 수업은 아쉬움이 많았거든요.

레삭매냐님 지인의 자제분은 결국 다른 길을 선택했군요. 우리 큰 아이는 원하는대로 갈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19 1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극작과라는 것도 있군요?
요즘 아이들 대학에 과 종류도 정말 많고, 생소한 과들도 정말 많이 생겨 뭐가 뭔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조언 해주기도 참 조심스럽더군요. 너무 생소하고 지식이 없으니까요.ㅜ
전 그냥 듣고만 있는...ㅋㅋ

따님의 좋은 소식 기원드립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한 따님이라 극작과에 합격한다면 재미나게 수업을 받으리라 생각되네요.
요즘은 글 쓰는 작가들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기량을 쌓는 좋은 발판이 되겠습니다.^^

감은빛 2023-10-31 18:09   좋아요 2 | URL
책읽는나무님, 안녕하세요.
정말 요즘은 생각도 못했던 다양한 전공이 생겼더라구요.
극작과라는 과가 있다는 걸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우리 아이는 아마 대학 진학과 관계없이
평생 글 쓰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해요.
결과가 좋아서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면 좋은 일이고,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또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yamoo 2023-10-20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은 정말 좋은 아빠인듯합니다.
아내분이 해마다 10월이면 해외출장을 가는군요! 어는 직종인지 부러운 직종입니다.
그럼에도 아이를 잘 돌보시는 감은빛 님...리스펙 합니다!!ㅎㅎ 어찌 그리 불평도 안하시는지..ㅎㅎ

감은빛 2023-10-31 18:13   좋아요 0 | URL
야무님, 고맙습니다!
애들 엄마의 해외출장은 부러운 면도 있겠지만,
엄청난 강행군이라 막 부러워할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불평을 할 수는 없죠.
아빠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또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저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라
제게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ㅎㅎ

희선 2023-10-21 0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첫째 따님이 고등학교 3학년이군요 어느새 그렇게 됐다니...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가면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따님이 공부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따님하고도 이런저런 거 함께 하고 더 알아가면 좋겠네요


희선

감은빛 2023-10-31 18:4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희선님.
아이는 정말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게 금방 어른이 되었네요.
태어나자마자 눈도 못 뜬 조그만 아기를 품에 안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요.

아이들이 공부만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잘 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으로 학창시절을 보내라고 말하곤 합니다.
아빠로서 아이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건강히 잘 자라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