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때에는 순대를 참 좋아했다. 그땐 대낮부터 학교 앞 분식집에 죽치고 앉아서 밤이 늦도록 순대와 튀김을 놓고 막거리 사발을 들이키곤 했는데, 아무리 마셔도 술값 부담이 적었다. 자주 가던 분식집 아줌마와는 이미 가족같은 관계였기 때문에 아줌마가 바쁘실때는 내가 가게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 집 순대는 맛도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양이 많았다는 것이다!(그렇기에 단골이 된 것이겠지!)
서울에 오고 부터 순대를 잘 안 먹게 되었다. 순대를 시키면 쌈장을 주지 않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어서 내주는데,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건가 싶었다. 소금에 찍어먹는 순대는 전혀 순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후로 순대 볶음은 몇 번 먹어봤다. 어느 겨울 종로 큰 길 포장마차에서 순대볶음을 맛있게 먹으며 소주 한 병을 달라고 청했다가 이상한 취급을 당했던 기억이 난다. 내 고향에선 길가 포장마차에서도 다 소주를 마실 수 있었는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참 이상했다.
암튼 서울에서는 순대를 잘 안 먹고 살았는데, 몇 해가 지나고 나니 소금에 찍어먹는 순대도 먹을만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혀가 익숙해졌다고 해야겠지.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 근처에는 큰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 맛있는 분식집이 있어서 순대를 종종 사다먹었다.(물론 막거리도 함께~)
작년에 이사온 이곳엔 집 근처에 분식집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지하철 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분식집이 하나 있어서, 여기서 튀김과 떡볶이 그리고 순대를 먹어봤는데, 별로였다. 사람은 엄청 많은데, 엄청 불친절했다. 그 후로 그 집은 다시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분식집 가기 전에 할머니와 할어버지가 하는 작고 허름한 분식집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집은 단 한번 먹어본 후로 바로 단골이 되었다. 이유는 물론 양이 많기 때문이다! 떢볶이와 튀김은 주로 할아버지가 담아주시고, 순대는 늘 할머니가 썰어주시는데, 이 할머니 인심이 너무 후하셔서 늘 양이 많다! 1인분만 시켜도 거의 2인분을 주신다. 저번에 한번은 너무 많이 담아주시길래, 미안한 마음에 천원을 더 드렸더니, 또 순대를 썰기 시작하신다. '아니예요! 너무 많이 주셔서 그래요. 그냥 받으세요!' 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건데 양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거지. 양이 많으면 기분좋게 먹고 또 오면 되는거지' 하신다.
안그래도 양을 많이 주시던 할머니는 내가 자주오는 단골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더 많이 주신다. 분명히 1인분을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2인분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할머니가 순대를 썰면서 옆 가게 아줌마랑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이야기에 집중하다 그랬는지, 순대를 너무 많이 썰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걸 다 담아 주시다니! 옆에서 옆집 아줌마가 '아니 1인분인데 그렇게 많이 주는거예요?' 하고 깜짝 놀랐지만, 할머니는 태연하게 '자주오는 사람이니까 많이 줘야지!' 하신다.
늘 바쁜 퇴근 길에 (어린이집에 시간맞춰 가기 위해) 서둘러서 순대를 사가다가, 며칠 전에는 어린이집에서 큰아이를 데려온 후에 함께 할머니집에 갔다. 할머니는 '총각인줄 알았는데, 애아빠네!' 하시며 또 순대를 많이 썰어주신다. 그리고 오늘은 아내가 하루종일 애 보느라 힘들었다고, 나갈거면 아기를 데려가라고 해서 둘째아이를 안고 나섰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뭐라고 하실지 궁금해하며 언덕길을 걸어내려갔다. 찬바람이 아기에게 닿지 않게 꽁꽁 여미고 나섰더니, 아기는 답답해하며 한동안 발버둥치다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들었다.
할머니집에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먼저 하고, '순대 1인분 주세요!' 했더니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그리고는 '아니, 애가 둘이야?' 물으신다. '네.'하고 대답했더니, '아니, 총각인줄 알았더니 애가 둘이야?' 하시며 순대를 썰기 시작하신다. 오늘도 2인분 가까이 되는 순대를 담아주시는 할머니. '맛있게 먹고 또 와!' 하고 정겹게 웃으신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너무 자주 마시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