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손가락을 다쳤다. 급하게 발송할 책을 포장하다가 종이에 베었는데, 그냥 살짝 베인 게 아니라 폭 2밀리에 길이 7밀리정도 반달모양으로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아니 어쩌면 종이에 베인게 아니라 뭔가 더 날카로운 것에 다친건지도 모르겠다. 다친 순간에는 약간 뜨끔하고 말았는데, 워낙 맘이 급해서 포장을 서두르다가, 포장용 박스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걸 발견했다. 뜯겨나간 살점의 가장자리가 떨어질 듯 말듯 붙어있고,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행여 책에 피가 묻을까봐, 얼른 휴지를 찾아서 닦았다. 휴지를 상처에 감아매고 포장을 서둘렀다.

평소 '책 포장의 달인'이라고 자부심을 갖는 내가 포장 작업중에 손을 다치다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써야하는 말인가보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평소처럼 했다면 큰 실수없이 포장을 마쳤을 텐데, 무슨 일이든 맘이 급하면 이렇게 사고가 생기나보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동안 기륭(구 기륭사옥앞 골목)에서 문화제를 열었다. 인디밴드들의 공연도 있었고, 영화상영(애니 포함)도 있었고, 마당극도 있었고, 먹거리 판매(물론 술도)도 있었다. 여기에 책을 판매하는 가판도 열렸다. 인문사회과학도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들에서 책을 후원받아 아주 싼 값에 팔고, 그 판매금은 전액 투쟁기금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우리 잡지 과월호도 좀 추려서 보내고, 근처에 있는 출판사에서도 책을 실어다 주기로 했다. 그래서 금요일 오후에 출발을 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책 주문이 들어왔다. 금요일이라서 오늘 꼭 보내달라고 한다. 빨리 기륭에 책을 갖다주러 가야하는데, 주문이 들어온 책도 오늘 꼭 보내야하니, 빨리 포장을 해놓고 택배아저씨께 연락을 드려야 했다. 급한 마음에 책 포장을 서두르다가 결국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동안 이어진 기륭 문화제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잡지 과월호가 인기리에 판매되었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금요일 낮과 토요일 저녁에 한동안 문화제에 참석했다. 아주 오랫만에 몇몇 아는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한때는 열심히 참여했었는데, 이렇게 인사를 나누다보니, 새삼스레 한동안 내가 얼마나 기륭문제에 무심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한쪽에서 숯불에 양미리를 구워서 판매하고 있었다. 알이 꽉 찬 양미리 너댓마리에 만원. 막걸리 한 병에 이천원.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다면 좀 더 비싸게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맛있는 양미리와 막걸리를 걸신 들린듯 먹어치웠다. 차를 안 갖고 왔더라면 막거리와 함께 좀 더 먹었을텐데, 이 맛있는 안주를 두고 술을 한 잔 밖에 못 마신다는게 무척 아쉬웠다. 

토요일 저녁엔 영화 '반두비'를 보았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서 제대로 된 스크린이나 스피커 없이 보는게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그럭저럭 볼 만했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직접 나와주셔서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해주셔서 좋았다. 비록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앉아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집중해서 재밌게 영화를 보았다. 

기륭에서 열리는 마지막 문화제. 1900일이 가까운 시간동안 단식농성, 고공농성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벌여온 생존권 투쟁이 그 막을 내렸다. 비록 200명이 시작한 싸움에서 복직한 사람은 10명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승리가 주는 의미는 클 수 밖에 없다.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기륭의 6년만의 승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의 장기투쟁사업장들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우리도 조금만 더 버티면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경우도 뿔뿔이 흩어졌던 조합원들이 다시 뭉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막거리와 양미리를 좀 더 팔아줬어야 하는데 말이지. 하필 차를 갖고 간 것이 안타깝다. 

영화 '반두비'를 보고나서 김성만 동지가 공연으로 마지막 무대를 빛내고 있을 무렵,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제 더이상 그 골목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륭 조합원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그래도 밝아보여서, 씁쓸했던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6년 동안의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을만큼 복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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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1-16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흥겨운 축제였을거 같아요.
기쁘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축제이기도 하고.
양미리와 막걸리라... 좋은데요.

그런데, 첫 문단의 손베이는 장면,, 으으, 너무 생생해요.
그렇게 베이는거 진짜 아프잖아요. 빨랑 나으세요!

감은빛 2010-11-17 03: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그대로 기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축제였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고생했던 조합원들 앞에서는 마냥 즐거운 척 해습니다.

다친 날이랑 그 다음날까지 무척 아팠는데,
아내의 배려 덕분에 이삼일 설겆이에서 해방되었더니,
일요일부터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조선인 2010-11-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륭과 함께 하시는 날들, 잘 읽고 있었어요. 댓글을 못 단 건 아마도 죄책감 때문일 거에요.

감은빛 2010-11-17 03:09   좋아요 0 | URL
죄책감이라뇨?
저도 한때 열심히 했지만, 그 후로 한동안 손놓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몫이 있잖아요!
조선인님께서 한미FTA(그 이전에는 제가 보지 못해서 모르겠습니다만,)국면부터
이번 4대강사업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목소리를 내어왔던 사실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 겸손하신거 아닌가요?
이러시면 제가 민망해지는걸요!!

비로그인 2010-11-1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안녕이라고 말하고 잠수탔던 뇨자...여기 짠 나왔는데요, 손가락 다친 페이퍼로 절 반겨주시는 거예요?ㅠ
병원엔 가보셨어요?
에구에구~~~

감은빛 2010-11-17 03:14   좋아요 0 | URL
와! 마기님! 무척 반갑습니다!
마기님 소식이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사실 트위터로 짧은 소식이나마 주고 받았던 기억이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어요! ^^)

병원갈 정도로 다친건 아닙니다.
한 삼사일 부지런히 소독하고, 약발라서 많이 나았습니다.
(무엇보다 설겆이에서 해방시켜준 아내 덕분에 빨리 나았습니다.)

2010-11-17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7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7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이곳은 제가 아는 분들이 오시는 곳이네요. 앞으로 종종 들르겠습니다.

감은빛 2010-11-17 16:1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노이에자이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