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이 여름 나기
며칠 전 일터의 직속상관께서 함께 일하는 동료 활동가와 내게 아주 오랜만에 점심을 사주셨다. 당연히 날씨 이야기와 기후변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분이 우리에게 집에 에어컨이 있는 지를 물었다. 동료 활동가는 친구랑 함께 지내는데, 방이 구조가 독특해서 비교적 시원한 편이라고 아직은 에어컨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올해는 유난히 더워서 사야지 생각은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분이 이제는 에어컨이 필수라고, 이런 날씨에는 에어컨 없으면 못 견딜거라고 했다. 본인도 평생 환경운동을 해오신 분이지만 불과 이삼년 전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에어컨을 샀다고 했다. 내 기억에는 아마 가장 더웠던 2018년에 구매하셨던 것 같다. 당시에 본인이 환경운동가로서의 고집을 포기하고 에어컨을 샀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러고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아직은 에어컨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니 또 목소리를 높이며, 안된다고 한반도는 더이상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날 수 있는 기후가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나 역시 그 말씀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올해 여름까지는 버텨보는 걸로 생각 중이다.
오늘이 목요일인데, 어제까지 월,화,수 3일 동안 집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못했다." 라고 표현한 건 내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더위에 집에서 잠을 자는 일은 쉽지 않다. 에어컨이 없어서 열대야의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는 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위가 기승을 부릴 거라고 예고되었던 지난 주말에는 일부러 에어컨이 있는 친한 후배 집에 가서 이틀을 지내고 돌아왔다. 어차피 열대야로 더운 날엔 본인도 에어컨을 켤 확률이 높으니, 혼자 에어컨을 켜는 것 보다는 둘이 있을 때 켜야 효과도 좋고, 죄책감도 덜 수 있다는 이유로 편하게 놀러오라고 했던 후배였다. 사실 "아예 한 달을 우리 집에서 지낼래요?" 라는 상당히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았으나, 그래도 남의 집에서 한 달씩이나 얹혀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 주는 본의 아니게 계속 집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큰 아이가 갑자기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애들 엄마가 병원에서 이틀 밤을 큰 아이와 지내고, 내가 혼자 집에 남은 작은 아이와 지내느라 아이들 집에서 잤다. 아이들이 파주로 이사간 후에는 우리 집으로 오려고 하지 않아서 함께 자는 일이 드물었다. 애들 엄마가 해외 출장이나 지방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날 외에는 거의 없었으니까. 이틀 모두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파주까지 이동하느라 아주 늦은 시간에야 집에 도착했고, 작은 아이와 놀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 등을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짧은 시간은 내게는 너무 소중했다. 아이는 계속 자라고, 언젠가는 더이상 나에게 저렇게 재잘대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테니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더 해주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일이 섭섭하다. 언제부턴가 머리를 묶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 아이들. 문득 생각나서 머리를 묶어 줄까 하고 물어보면 고개를 저으며 그냥 자기가 묶겠다고 답한다. 분명 내가 묶어주면 더 예쁘게 묶어줄 수 있는데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본인이 하도록 둘 수 밖에 없다. 스스로 하겠다는 일을 억지로 부모가 해주는 건 좋지 않은 태도다.
큰 아이는 사실 이틀씩이나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암튼 병원에서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한다. 애들 엄마가 바쁜 때에 병원에 있느라 시간을 뺏기고, 불편한 간이 침대에서 자느라 불편했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내가 병원에서 자려고 생각했는데, 함께 병실을 쓰는 다른 엄마가 나를 불편해 할 거라고 여겨서 본인이 병원을 선택한 것 같다.
파주 집은 우리 집만큼 덥지 않아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 만으로도 충분히 쾌적하게 잘 수 있었다. 우리 집이었다면 잠시도 선풍기를 멈출 수 없었겠지만, 그 집에선 새벽에 조금 춥다고 여겨 선풍기를 껐다가, 나중에 더위를 느껴 다시 켜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문제는 고양이였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고양이 두 마리. 몇 해 전 그 고양이들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그 집에서 잘 때마다 고양이라는 존재들 때문에 낯선 상황들을 경험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대체로 방문을 열어두고 잔 적은 없어서 이 아이들 때문에 잠을 깬 적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더워서 문을 열어두고 잤더니 두 녀석 중에 나랑 좀 더 친한 한 녀석이 계속 내 곁을 오가며 잠을 깨웠다. 뺨이나 이마를 혀로 핥거나,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가거나, 손이나 무릎, 발가락 등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거나, 내 배 위로 올라와 한참을 가만히 있거나, 내 귀 옆에 웅크리고 앉아 갸르릉 대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수시로 했다. 차라리 가만히 옆에 있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같이 잤을텐데, 한참 옆에 있다가도 금방 거실로 나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와서 위 행동들을 반복해대니 자꾸 잠을 깰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래 마음은 알겠는데, 나 너무 피곤하니까 좀 그만 건드리면 안 되겠니. 좀 안 깨고 자고 싶은데, 이 녀석은 자꾸 내 얼굴을 핥거나 귀 옆에서 갸르릉 대며 잠을 깨웠다. 내가 잠결에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갸르릉 대기만 하는데, 귀찮아서 돌아누으면 손이나 발쪽으로 와서 살짝 깨물곤 한다. 다행히 아프지 않게 깨물지만, 그 날까로운 이빨의 감촉은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하다. 여름에는 이 녀석 때문에 이 집에서 자는 일이 쉽지 않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다른 한 마리는 내게 별로 관심이 없다. 다른 녀석 보다 몇 달 늦게 이 집에 온 그 아이는 성격도 좀 달라서 상대적으로 인간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편이며, 특히 초기에 나하고 함께 지낸 시간이 좀 적어서 그런 것 같다.
수요일인 어제는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어제 아침 파주에서 서울로 출근하면서 버스로 자유로를 지나 왔는데, 푹우를 버스가 가르며 나아가는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가 다시 쎄게 내리기를 반복했다. 어제는 오후부터 저녁까지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지키는 날이었는데,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친한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감자전을 구울테니 오라는 연락이었다. 매장을 봐야해서 조금 늦게 간다고 전했다. 평소 저녁 시간에는 매장에 손님이 좀 오는 편인데, 어제는 비 때문인지 손님이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 배도 고팠고, 감자전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이미 거기로 가 있었는데, 손님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까지 매장은 열어두어야 하니 좀 답답했다.
마감 시간이 되어 매장 문을 닫고 서둘러 후배네 집으로 갔다. 손흥민이 출전하는 토트넘과 케이리그 대표 선수들의 이벤트 경기를 보면서 감자전을 열심히 먹고 놀았다. 늦은 시간까지 놀다가 잘 먹고 잘 놀았다 이러며 집으로 가려는데, 후배가 그냥 자고 가시라고 했다. 사실 그 집이 일터와의 거리도 더 가깝고 에어컨도 있으니 굳이 찜통 같은 집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아직까지 별 일이 없으니 아마도 오랜만에 집에서 자게 되겠지. 점심 시간에 고심을 거듭하여 한 달 이상 묵혀두었던 알라딘 장바구니를 비웠다. 30만원에서 20만원으로, 다시 10만원 대 선으로 결제 금액을 줄이며 책들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이번 달에는 여름 휴가 교통비와 숙소 비용들을 선결제해서 이미 지출이 예산을 넘겼고, 휴가 가서도 지출이 상당히 클 것이기 때문에 완전 적자인 달인데, 어떻게든 책값을 줄여보려고 했으나,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다.
암튼 오늘 결제한 책들이 저녁에 도착할테니, 오늘은 선풍기 바람 쐬면서 책을 읽어야지. 빨리 퇴근시간이 되기를. 빨리 책이 오기를.
0.1 웨이스트
몇 달전부터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보고 있다. 일터에서 태양광발전 사업 뿐 아니라 에너지 절약 제품과 제로웨이스트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내며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매장은 환경과 에너지를 주제로 한 거점으로서 물품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상담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는 곳으로 운영 중이다. 매장을 총괄 관리하는 매니저님을 새로 채용했지만, 매니저님이 근로 시간을 모두 채워도 매장 운영 시간을 다 커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자발적인 자원활동가들이 채워야 한다. 나는 일터에서 활동비를 받는 활동가로서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모를 노동을 매장에 투여해야 할 상황이었다.
암튼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물품을 판매하는 일을 다시 해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에 아버지 지인이 운영하는 큰 슈퍼마켓에서 일했던 것과 군대가기 전에 짧은 기간 편의점 야간 일을 했던 것 등이 실제로 무언가를 판매하는 일을 했던 것이었는데, 20년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나 다시 비슷한 종류의 일을 맡은 것이다.
제로웨이스트 매장은 일반적인 슈퍼마켓이나 소매점과는 여러모로 많이 다르다. 취급하는 상품이 대부분 포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코드를 찍어서 간편하게 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포스기에서 고객이 가져온 상품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지긴 했는데, 처음에는 엄청 버벅거리며, 계산대 앞에 계신 손님께 "죄송합니다만, 제가 좀 서툴러서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를 계속 말해야 했다.
매장을 맡은 날에는 손님들이 얼마나 오고, 매출이 얼마나 나오느냐에 따라 내 기분이 크게 좌우되는 걸 느꼈다. 특히 어제처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정말 손님이 없는 편이라 기분이 크게 다운되었었다. 손님이 오고 이것 저것 질문도 하고 작은 거라도 하나 구매하면 내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꼭 구매를 하지 않더라도 매장에 들어와 둘러보고 어떤 제품에 관심을 갖기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다. 그런데 정말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손님이 한 명도 안 들어오는 날엔 힘이 많이 빠졌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총 11시간을 매장을 지켰는데, 그 동안 들어온 손님은 단 두 명이었다. 한 분은 몇 개의 제품을 구매하셨지만, 다른 한 분은 나와 몇 분 동안 상담만 하고 구매는 하지 않고 가셨다. 이런 날엔 참 힘이 많이 빠진다.
어제 동료 활동가가 갑자기 소설가 최정화 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해봤으나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이 매장을 맡은 날 이 소설가가 오셔서 제법 많은 제품을 사가셨었다고 말하며, 자신이 제로웨이스트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말도 했었다고 전했다. 우리 매장 제품들과 매장 안 모습 등도 사진을 찍어가서 활용해도 되냐는 허락을 구했었다고. 어디에 활용하시는지 궁금했는데 그걸 물어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최근에 [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 라는 책을 냈더라.
이 책의 소개 내용 중에 0(제로) 웨이스트가 아니라 0.1(영쩜일) 웨이스트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뭐든 단번에 잘 해내기는 어렵다. 평생 과 포장된 제품들을 사용하면서 그게 당연하다고만 여긴 사람들에게 제로 웨이스트는 낯설고 어렵고 불편하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머리로는 알지만, 공감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매장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수많은 분들 중에 대다수는 이 매장의 여러 물품들이 신기하고 기특하지만, 굳이 우리 집에서 이걸 사용할 필요는 못 느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가 굳이 0.1 웨이스트라고 말하는 이유를 잘 알 것 같다. 당장 바로 제로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0.1이라도 가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소설가를 검색했다가 이 분이 한때 환경잡지 월간 [작은것이 아름답다]에서 일했다는 걸 봤다.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이라고 적혀 있던데, 시기로 보면 내가 그 잡지에서 일했던 시기보다는 이후일 것으로 추정했다. 어쩌면 일터에서 동료로 일했을 수도 있었을 인연이었다는 생각에, 일했던 시기는 달랐지만 같은 일터에서 일했던 인연이라는 생각에 아주 약간 친밀감을 느꼈다. 다음에 만약 내가 매장을 맡은 날에 이 분이 다시 방문하시면 책 잘 읽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저 잡지사에 일했던 시절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암튼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아까 비운 장바구니에 이 책도 포함시켰다. 즉, 오늘 저녁에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 시간을 두고 이 분이 쓴 소설들도 하나씩 찾아 읽어야지. 회의 시간을 기다리며 글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회의 시간이 다 되었다. 얼른 회의 마치고, 얼른 퇴근해서 책 읽으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