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벚꽃 구경에는 크게 흥미가 없다. 벚꽃이 만개한 모습은 예쁘기는 하지만, 그런 벚꽃길이 근처에 있다면 산책 삼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예전에 일터가 영등포에 있을 때는 여의도 벚꽃길도 걸어 다녀봤고, 우리 동네 불광천 벚꽃길도 해마다 걸었지만, 모두 가까이에 있었기에 갔던 곳이고, 마침 같이 일하는 일행이나, 같이 식사했던 일행이 원해서 같이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속초 여행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나무들을 보면서 조금 생각이 변했다. 일단 공간 자체가 관광지라서,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벚꽃길이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공간이라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벚꽃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속초라는 관광지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중요한 것은 이번에 다녀온 속초 곳곳에서 만난 여러 벚꽃길들이 모두 엄청 예뻤다는 것이다. 영랑호 둘레를 걸으면서 계속 마주친 벚꽃들, 숙소로 드나드는 길에 양쪽 길가에서 우리를 맞이해 준 벚꽃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숙소를 드나들며 여러번 마주친 그 꽃길은 마치 꽃으로 만든 터널 같은 느낌이었다. 꽃길이란 단어를 한번도 내가 직접 써 본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쩐지 낯익은 이유는 노래를 통해 많이 들어서 때문이겠지. 암튼 처음으로 이런 걸 두고 꽃길이라고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번 속초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인상적이었다. 우선 20년도 훨씬 더 전에 제대한 이후로 이쪽 동네를 여행 온 것이 처음이었다. 아, 가끔 짧게 스치듯 지나친 적은 여러번 있었다. 무박2일 설악산 산행을 하느라 다녀간 적도 있었고, 양양이나 강릉 쪽도 가끔 볼일이 생겨 짧게 머물다 가기도 했다. 하지만 속초와 고성 쪽으로 놀러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곧바로 GOP로 배치를 받아 통일전망대가 있는 동쪽 끝 소초에 배치되었었고, 나중에 전방 근무를 마치고 일반 대대로 철수한 후에는 간성에 있는 부대에서 지냈다. 말년에 다시 한 번 전방으로 투입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편재가 좀 바뀌고 연대와 대대가 막 뒤섞이면서 다행히 전방 투입 전에 제대했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평생 살면서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나름 재미있고 독특한 일들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군대는 군대였기에 고달프고 힘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고배율 망원경으로만 보긴 했지만 북한 땅 금강산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야간에 각 초소를 돌며 근무서면서 늘 바라보는 건 아름다운 동해안과 멀리 북한 해금강이었다. 자연환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근무했지만, 그 삶 자체는 지옥이었기에 모순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암튼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냥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군 생활을 했던 속초 위쪽 고성 쪽으로는 이상하게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이 갈 일을 일부러 안 만들었는지,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이번 여행은 함께 간 사람들에게서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았던 시간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말이지만, 주위에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따뜻하게 나를 걱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함께 간 사람들과의 매 순간 순간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많이 웃었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정말 많이 웃고 즐기는 여행이었다. 이런 행복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함께 다녀온 분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다시 일상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기분이 다운되었다. 다음날부터 머리 아픈 일들이 잔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회의에 한 번 참석할 때마다 새로운 일들이 생겼고, 참석해야 할 회의는 자꾸 또 새로 생겼다. 엊그제 그러니까 화요일 오후에는 갑자기 급하게 성명서 초안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어지간하면 이렇게 급한 요청은 거절해야 하지만, 워낙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선배가 부탁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이미 많았고, 또 그날은 유난히 전화도 많이 오고, 매장 손님도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왔다. 글 쓰는 일은 좋아하지만, 성명서와 같은 딱딱하고 공식적인 글은 좋아할 수가 없다. 관련 내용을 잘 아는 분들께 전화로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밤 늦게까지 성명서를 썼다. 그리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결국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다. 늦은 저녁 일단 매장을 정리하고 나서야 저녁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우선 성명서 초안을 넘기고 뭐든 먹어야지 했는데, 결국 새벽까지 제대로 밥을 먹지는 못했다. 그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허기만 면하는 정도로 버텼다.


월요일 오후 강의는 그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좀 어설퍼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고, 강의에 참석한 주민 조직 간부들의 태도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강의를 마치고 바로 다음 회의에 참여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회의가 길어져서 매장을 봐야 하는 시간에 늦어져서 마음을 졸였다. 급하게 매장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점심도 못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같이 회의에 참석했었던 선배 한 분이 전화로 왜 저녁을 같이 먹지 않고 바로 갔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마웠다. 저녁에 매장을 봐야 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저녁은 늘 매장 문 닫고 늦게 먹어야 하는데, 뭐 현재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치지 말아라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 큰 아이랑 통화를 하니, 아이가 다쳤다고 했다. 전날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침대 옆 화장대 모서리에 눈 바로 옆을 찍혀서 찢어졌다고. 일요일 아침에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고 들었다. 아이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나는 속으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아이가 다쳤다는 사실도, 애들 엄마와 아이가 찾아갔던 여러 병원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다친 아이를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너무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즐겁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이는 다쳐서 치료도 못받고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구나. 다친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실도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를 찾아가 얼마나 다쳤는지, 지금은 어떤지 보고 싶었지만, 전화 통화를 한 시간은 이미 너무 늦은 때였고, 월, 화 이틀을 늦게까지 일하느라 가지 못했다. 어제 비로소 아이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내가 직접 큰 아이의 상처를 소독해주면서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처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고, 벌써 거의 아물어 있었다. 다만 모서리에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눈가에는 멍이 들었다가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라고 속삭였다. 


또 다시 돌아오는 슬픈 기념일들


며칠 전에 4.3 기념일이 지났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은 인간은 당선인 신분일때는 나타났었지만, 올해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출산 대책으로 30세 이전에 자녀 3명을 낳으면 군면제 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내놓는다거나, 주 52시간도 과한데, 69시간 노동제를 추진하겠다고 하다가 다시 60시간으로 바꾼다거나, 민생특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쌀 소비에 대한 대책으로 '밥 한 공기 비우기'를 말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금 내가 정말 뉴스를 듣고 있는 건지,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역시 우리나라는 정치인만큼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이 없는 것 같다. 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암튼 해마다 4.3 기념일에는 기분이 쳐진다. 그건 아마 4.16 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고, 기억이다. 작년 4월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


살인마 전두환의 손자가 광주를 찾아가 유가족 대표들에게 사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가 가족과 지인들의 폭로를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그 영상들을 찾아봤었다. 그리고 그가 라이브로 마약을 하는 장면도 일부를 보았었다. 한 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부모나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다. 태어나보니 독재자, 학살자의 손자였다면 그 삶은 과연 어떨까?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들의 여러 실수들을 기억한다. 나 역시 살면서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저 이 삶 자체가 고달프고 싫어서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건 내 삶의 문제이지,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아이들 역시 나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보고 자랐다. 아이들이 과연 나를 원망할 지는 모르겠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설사 이런저런 잘못으로 법의 심판을 받아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부모나 조모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원망하거나 경멸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두환 정도의 학살자는 정말 상식의 선을 까마득히 뛰어 넘는다. 내가 만약 전두환의 자손으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정말 이건 상상이 안 된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참사들, 성수대교 참사, 삼풍백화점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의 큰 사고들이 일어났을 때, 사전에 그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돈에 눈이 멀어 고의로 이런 사태를 불러온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은 과연 전두환과 비교해 얼마나 다를까? 물론 전두환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니 추정이라 단서를 달 수 밖에 없지만)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도록 명령하고, 실탄을 발표하라고 명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접 학살자이기에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는 건 대부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잊지 말고 제대로 기억해야 할 슬픈 기념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4월은 슬픈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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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을 보내며


또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갔다. 이번 달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일터에서 직책이 바뀌었다. 긴 시간 실무 책임자를 맡고 있었는데, 이제 임원이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나를 임원으로 추천하면서, 반대하거나 딱히 의견이 없는 다른 임원들을 설득하고, 또 나를 부추겨 더 열심히 활동하도록 지원해준 몇몇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 덕분에 무사히 임원이 되기는 했는데, 딱히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당장 함께 일하는 동료 활동가들이 호칭을 바꿔야 하는데, 이미 긴 시간 입에 붙어버린 예전 직책 때문에 난감해 하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라 하겠다. 사실 위치가 바뀌어 업무도 바뀌어야 하고, 태도도 바뀌어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 작은 조직에서 실무자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뭐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기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훨씬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할 자리인데, 나는 자꾸만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작년 가을부터 정말 일을 그만두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주위에서 계속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업무 메일을 쓰거나 전화를 걸면서 직함을 밝혀야 할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어색함을 느낀다. 한 2주 전쯤에 그러니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고 난 직후에, 어느 회의 자리에서 처음 뵙는 분이 계셔서 소개를 했는데, 새로운 직함을 말하자마자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 몇 분이 엄청나게 웃었다. 나는 그 분들이 왜 웃는지 몰라 조금 당황하다가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남은 소개를 마저 끝냈는데, 내가 어색하게 말해서 웃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내 경상도 억양이 나와서 특정한 단어를 강조한 것처럼 들렸다고 했다. 서울 산 지 20년 정도 되었고,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에도 특정한 말을 할 때는 제외하고 사투리를 안 쓰는 편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이 억양은 갑자기 문득 이렇게 튀어나오긴 하나보다.


지난 주에는 또 누군가에게 멋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 외모에 신경을 안 쓰고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멋 부린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아마도 머리카락을 길러서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은 멋 부리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40년이 훌쩍 넘게 사는 동안 한번도 장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해보고 싶어서였고, 마침 교통사고로 휴직하는 동안코로나 등을 핑계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사실은 막상 머리카락을 길러보니 내가 생각했던 스타일이 나오지 않기도 하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아서 그냥 확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는데, 이미 기른 것이 아깝기도 하고, 좀 더 많이 길러서 다른 스타일이 되면 뭔가 좀 달라질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버티는 중이다. 여러가지 불편한 점도 많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이발소나 미용실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짧은 머리였다면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머리카락을 자르러 다녀야 했다. 나는 예전부터 미용실 같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도 불편하고, 가위질을 하면서 자꾸 고개를 숙여라, 들어라 하는 것도 불편하고 특히 다 자른 후에 뭔가 어색한 내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면 옆에서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이 가장 불편했다. 요즘 MBTI 가 엄청 유행이고 나의 이런 모습은 전형적인 I 의 모습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평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I 인 것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업무상 아는 사이이거나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E 라고 생각했다고 들었다. 암튼 다른 공간보다 유독 미용실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들


두어달 전부터 매장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매장에 앉아 있다보면 정말 사람들은 다양하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외모도, 목소리도, 말투도, 성격도 모두 다 각자 독특하고 특별하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고 여긴다. 불과 이삼주 전까지만 해도 다들 겨울 옷을 입고 들어오시던 분들이 요즘은 다양한 옷차림으로 들어오셔서 그런 것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오늘 낮에는 반팔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여성 분이 들어오셨는데, 한쪽 팔과 반대쪽 다리에 크게 문신이 있었다. 일부러 쳐다보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슬쩍 보고 말았는데, 요즘은 저렇게 문신을 드러내고 다니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문신을 새긴다는 건,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일부러 숨길 이유는 없는 거겠지.


판매하는 상품들에 대한 문의를 하거나, 리필 스테이션 이용 방법을 묻거나, 어떤 특정한 상품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질문을 하는 방식도 모두 다 다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나타나는 반응도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분들과는 길게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대답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상품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오기도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매장 여기저기를 열심히 찍어가는 분들도 있다.


우리 매장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재활용 시스템에서 제대로 재활용 되지 않고 있는 종이팩(우유팩과 멸균팩)과 플라스틱 병 뚜껑 등을 모아서 제대로 재생해 사용하는 업체로 갖다주고 있다. 그냥 모아오라고 하면 별 호응이 없을 것 같아서 자원을 모아오는 수량을 체크하여 리워드로 작은 선물(화장지 1롤)을 드리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1년 반이 넘었는데, 이 화장지를 얻기 위해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대부분 어르신들인데,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오시기도 한다. 일반 가정에서 모아서는 절대 그 정도 양을 모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시는 거냐고 물어보니 남들이 재활용품을 내놓은 걸 자신이 수거해서 가져온다고 했다. 재활용으로 내놓아도 전혀 재활용이 되지 못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저렇게라도 모아주셔서 재활용이 되면 그것도 다행이긴 한데, 막상 딱 숫자에 맞춰 가져온 자원들을 꺼내놓고 화장지만 받아서 바로 가시는 그 분들을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분들은 그 화장지를 받기 위해 또 얼마나 거리를 다니며 고생을 하실까 싶기는 한데, 한 편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비밀번호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숫자를 잘 외우지 못했다. 가족 생일은 물론이고 집 전화번호도 잘 외우지 못했고, 휴대전화를 처음 만들었을 때나 번호가 바뀌었을 때에는 내 전화번호도 못 외웠다. 당연히 가족들의 휴대전화번호나 친구들 번호도 못 외웠다. 연애할 때에는 연인의 번호를 외우지 못해 구박을 받기도 했다. 이럴 때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헤어지니 후에 예전 연인의 번호를 폰에서 지우고 나면 그 번호를 다시 떠올리지 못해서 실수로라도 다시 연락하지 못하는 것. 암튼 정말 숫자를 못 외우는 내가 최근 가장 괴로운 일이 여기저기 현관 비번을 외워야 하는 일이다.


일단 우리집 건물 1층 현관 비번과 우리 집 비번은 당연히 외워야 한다. 잊으면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그리고 일터의 비번, 일터 건물의 공동현관 비번도 외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 집의 비번, 아이들 집 건물 비번도 외워야 한다. 이것만 해도 벌써 6개다. 여기에 더해 노트북 비번, 이메일 계정 비번, 은행 계좌 비번 등을 따로 외워야 한다. 물론 이건 숫자만 있는 건 아니고 문자와 특수문자도 외워야 한다. 이메일은 개인 메일과 업무용 메일이 다르고, 각종 포털 사이트와 자주 가는 곳들(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비번도 외워야 하고, 일터 노트북도 내 것 뿐 아니라 공용 노트북 비번도 알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이 수많은 비번들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나는 가끔 일터 건물 공용 현관 비번을 누르려다가 곧바로 떠올리지를 못하고 숫자 키의 배열을 한참을 쳐다보곤 한다. 숫자를 잘 못 외우는 내가 억지로 기억하는 방법은 숫자 자체를 외우기 보다는 키패드 상에서 그 숫자의 위치를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메일 계정의 비번이나 각종 사이트의 비번은 주로 좋아하는 영어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서 기억한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나 애칭을 넣거나 뭔가 의미가 있는 물건을 넣거나 한다. 예전에는 이렇게 비번을 만든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이었던 '호랑나비'의 학명을 찾아서 그 긴 학명의 단어 하나를 가져다가 비번으로 쓴 적도 있었다.


여행


내일은 친한 사람들과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2019년 오키나와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때 같이 가지는 못햇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몇 번 더 포함되었다. 맨 처음 놀러가자고 의기투합한 건 4명이었는데, 중간에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금은 10명 정도가 되었다. 오키나와 여행 멤버가 7명 모두 성씨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인 김, 이, 박이 모두 다 있는데도 그랬다. 그 사실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어서 앞으로 이 여행 멤버에 포함할 사람은 모두 성이 달라야 한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랑 같이 놀러가고 싶은 사람 중에 김, 이, 박은 일단 무조건 못 들어온다.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들도 모두 성이 다르다. 기존 멤버들 외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기존 멤버들과 겹치지 않고 달랐다는 의미다. 사실 나중에 정말 친하고 좋은 사람이 원한다면 성이 겹친다고 굳이 내치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오늘 저녁은 조금 바쁠 예정이다. 8시에 매장 문을 닫고 나면 걸어서 20분 거리에 안경을 찾으러 가야하고(눈이 좀 더 나빠져서 새로 맞췄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해놓고, 짐을 싸야 한다.


짧은 강의


담주 월요일에 동네 주민센터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시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강의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조금 만들다가 하기 싫어서 지금 이 글을 두드리고 있다.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닌데, 1시간짜리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내게는 어렵다. 글도 짧은 글은 쓰기 어렵지만, 긴 글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강의도 서너시간짜리 강의는 준비할 것도 없지만, 1시간짜리 짧은 강의는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4월에만 잡혀 있는 강의가 3개나 있는데, 이거 모두 1시간짜리 짧은 강의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얼른 강의자료 만들고 다른 일도 해야 하는데, 어느새 매장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손님이 자주 찾지 않는 매장에 혼자 앉아 있는 일은 좀 힘이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들어와서 그냥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위에 언급한 재활용품들을 갖고 와서 도장을 찍거나 화장지를 받아가는 분들도 있다. 매출은 안 오르는데 드나드는 사람은 계속 있으니, 다른 업무에 집중할 분위기는 또 아닌 것이다. 정말 그냥 매장 일만 해야하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괜찮은데, 매장도 보면서 다른 일들도 엄청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이 문제다.


오늘은 야근을 할 수도 없으니 이제 어서 강의자료를 만들어야겠다.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안녕, 3월. 어서 와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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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4-06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립니다.
새로 얻게 되신 직함에 입에 착착 붙으실 거예요.
계속 좋은 일 많은 4월 보내시기를!

감은빛 2023-04-07 01:57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고맙습니다!
여전히 일에 치여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네요.
얄라알라님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어떤 인터뷰


어느 연구소의 연구원이 재생에너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한참 바쁠 때여서 좀 미루자고 했는데, 그쪽도 보고서 마감일이 촉박하다고 해서 그제 만났다. 사전에 보내온 질문지는 의외로 간단하길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자 그 연구원은 질문지에 없던 질문들을 포함에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을 많이 했다. 난 언론사 기자나 대학원생들의 인터뷰에 응할 때면 말이 많아진다. 아니 강의할 때도 말이 많고, 발표할 때도 말이 많은 걸 보면, 그냥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암튼 되도록이면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싶어서 받은 질문 내용에 덧붙여 추가 정보를 더 말하는 편인데, 이 사람은 그걸 듣고 이어서 또 질문을 연결해가다보니 점점 인터뷰가 길어졌다. 말을 한참 하다보니 어느새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질문을 계속 던지던 연구원은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떠드느라 잘 몰랐는데,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니 어느새 2시간 반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쩐지 목이 엄청 아프더라.


긴 인터뷰 때문에 약간 진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연구원과 헤어지고 그의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 자료들을 전송하고 나서 일을 시작하려다가 머리가 멍하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선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SNS에 접속하여 머리를 좀 식혔다. 한참 후에 해당 연구원이 미안하다며 문자를 보냈다. 보고서를 위한 조사 차원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평소 관심이 많아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며, 너무 긴 시간을 뺐어서 미안해 했다. 시간은 어차피 내기로 했으니 괜찮은데,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한 일인 줄은 몰랐다. 이것도 다 나이 탓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시간이나 4시간짜리 강의를 해도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암튼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날 저녁에는 거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장 문 닫을 시간까지만 가벼운 일들만 처리하고 퇴근했다.



반가운 목소리


9시가 다 되어 매장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으니 갑자기 높은 톤으로 내 이름 두 글자를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이름만 부를 정도라면 무척 친한 사이일텐데, 왜 내 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네,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높은 톤으로 자신의 이름을 크게 말했다.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어쩐지 조금 익숙한 목소리였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17년 전쯤 시민단체에서 함께 일했던 활동가였다. 나보다 한 두살 정도 어려서 그는 나를 오빠 혹은 그냥 이름으로 불렀고, 우린 서로 말을 놓고 지냈었다. 당시 그와 동갑인 여성 활동가가 두세명 정도 더 있었는데, 그 중에 다른 친구들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와는 친했었다. 그 단체를 그만두고 나서는 서로 연락이 끊겨서 긴 시간 연락이 없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전화해놓고,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편하게 내게 말을 이어갔다. 뭐 언론 기사를 봤는데, 너무 반가웠다며, 머리도 길렀더라 막 이러면서 같이 기사를 찾아봤던 사람에게 나 이 사람 알아. 나 이 사람하고 친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음,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떤 기사를 봤을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나는 모른 체하고 그냥 응. 응. 대꾸만 했다. 내 이름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보니까 전화기에 내 번호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나도 어지간하면 전화번호를 잘 지우지 않는 편인데, 왜 내 전화기에는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을까. 암튼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냥 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어떤 프로젝트에 관해 소개하면서 관련해서 한번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지난 주에 그 내용을 메일로 받아봤기 때문에 듣자마자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주 정도에 한번 찾아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같이 일했던 당시의 어떤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녀석과는 유독 힘들게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들이 많았다.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 잠시 쉴 때 그가 차가운 음료수를 갖고 와 내 뒷목에 갖다대어 깜짝 놀랐던 기억.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다가 서로 몸을 부딪혔던 기억.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놀았던 기억 등등. 아,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같은 나이의 다른 후배들과 달리 유독 이 녀석과 친해졌던 이유가 있긴 있었네.


갑작스런 만남의 기억


몇 해 전이었나? 여기 서재에 글을 썼던 이야기인데, 예전에도 환경단체 동기(교육기수로 동기라 나이도 지역도 모두 다름)가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아마 그 친구를 못 본지 한 15년 정도는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정말 일이 많고 바빴다. 그 전날 밤새 일하고 씻지도 못하고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아니 이틀 연속 밤샘에 집에도 못 들어갔던 것 같다. 게다가 피곤에 쩔어서 멍한 상태였다. 누군가 공동사무실로 들어선 후 입구 쪽 비어있는 자리들을 지나서 내게 다가올 때까지 나는 굽은 허리에 거북 목 상태로 모니터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내 자리 근처까지 다가와서야 말을 걸었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배시시 웃는 그가 있었다. 아마 첫 마디가 "오빠, 진짜 오랜만이지?" 였던 것 같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한발 다가서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감탄사 외엔 말도 나오지 않았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는 팔을 벌리며 나를 안으려고 다가왔다. 순간 이틀이나 집에 못 들어가서 담배 냄새, 땀 냄새에 쩌들어 있을 내 옷과 몸 상태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십 수년만에 만나 반갑다는 그 포옹을 피할 수도 없는 일.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그냥 가볍게 포옹을 하고 빠르게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색 덕분에 언제나 눈에 잘 띄었고, 꽤 귀여운 얼굴과 작은 키 때문에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또 목소리가 좀 독특했다. 반가운 마음은 엄청 컸지만, 마감에 쫓기는 일 때문이기도 하고, 어색한 상황 때문이기도 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친구는 내가 바쁜 상황임을 짐작하고,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급한 일 마무리하고 자신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공동사무실 바로 밖에 있는 홀에서 조금 기다리면 최대한 빨리 이것만 끝내고 나간다고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은 엄청 길었지만, 간혹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은 접하고 있었다. 결혼 소식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전해들었던 것 같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페이스북에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내 소식도 가끔 접했다고 했다. 내가 여기 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도 내 일과 관련해 제안할 것이 있어서였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그 녀석과 프로젝트 하나를 함께 하면서 몇 번 만났고, 계획했던 행사를 무사히 마쳤고, 종종 연락하자고, 언제 친했던 동기들끼리 한번 보자고 약속을 했지만, 그 후로 다시 몇 년이 흐르도록 만나지는 못했다. 언젠가 또 불쑥 찾아와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시험과 재미


큰 아이와 통화하면서 학교 이야기를 물었더니 모의고사를 쳤다고 했다. 수능과 같은 방식이었냐고 물었더니 똑같은 방식이라고 답이 왔다. 나는 재미있었겠네 하고 말을 했는데, 아이는 황당해하면서 어떻게 시험이 재미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중간고사나 모의고사는 성적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었지만, 모의고사는 재미있었다. 그건 따로 시험 범위가 정해진 것도 아니라서 막 닥쳐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냥 평소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라, 내가 정말 수능을 치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올지 알아보는 것이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재미있었다. 어쨌든 시험이니 잘 보기는 해야했고, 나름 긴장도 하고 열심히 풀었는데, 그런 일들이 내게는 재미였다. 게다가 신기하게 모의고사는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나는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압박을 즐기는 사람이었구나. 떠올려보면 내가 가장 즐겁다고 느낄 때는 강의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순간인데, 그때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 적당히 긴장도 되고, 내가 준비한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속으로 잘 해야지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 마음 상태가 나는 즐거운 것 같다. 내게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적당한 긴장감과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혹시 완전히 망쳐서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드는 순간의 어떤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더 재미있고 즐거운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잘 해내고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이리라.


운동도 그렇다. 나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고 주로 전신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과 어려운 동작들을 계속 시도하는데, 그 무게나 그 강도를 버티기 위한 온 몸의 긴장감을 즐기고, 혹시 실수로 다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을 즐기며, 이걸 결국 해냈을 때의 느낄 짜릿한 성취감에 대한 기대감을 가장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 긴 시간 지루하게 운동하지 않는다. 준비운동을 통해 몸을 충분히 풀어준 다음에는 짧은 시간 고강도로 몸을 움직여 그 순간의 아드레날린을 확 늘리는 방식으로 운동하는데, 그런 운동이 내게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는데, 노래방에서도 그런 재미를 가끔 느낀다. 결코 노래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들을 잘 부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고음을 부르지 못해서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친한 후배에게 두성을 배운 이후로는 어느 정도의 고음에도 조금은 자신이 생겼고, 그래서 노래 부르는 일이 더 즐거웠다.


며칠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서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마이크를 넘겨 받으면 항상 긴장된다. 그 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 노래만 주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혹시 음정 박자가 틀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하면 늘 실망부터 먼저 든다. 하! 내 목소리는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나도 남들처렴 멋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다 노래가 점점 크라이막스를 향해가고 음이 높아지고 두성을 쓰기 시작하면 조금씩 만족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노래를 이 정도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거 아니겠어. 뭐 이런 마음이 드는 거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엄지 손가락을 세우거나, 좋았다고 한 마디씩 던지면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야근을 하다 말고 글을 썼고, 이제 퇴근을 해야겠다. 누군가를 불러 맛난 것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가도, 집에 가서 샌드백을 두드리고 케틀벨과 바벨 그리고 불가리안백이랑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뒷정리를 시작하고 고민을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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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28 0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의고사를 즐기기도 하셨군요 저는 모의고사라 해도 시험이라 생각했네요 그렇게 해서 성적도 좋게 나온 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긴장 하면 더 안 되기도 하잖아요 조금 즐거운 마음과 긴장감이 있다면 나을 듯해요 그게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얄라알라 2023-04-06 12:11   좋아요 1 | URL
시험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냐는 자녀분의 반문과 표정이 훤히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사실 저도 감은빛 님처럼 시험, 정확히는 그 초집중의 시간을 좋아하던 한 사람이었어요^^

감은빛 2023-04-07 01:59   좋아요 1 | URL
희선님. 고맙습니다!
긴장하면 잘 하던 일도 오히려 안 되는 경우도 있죠.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늘 달라지겠지요.
저는 그걸 조금 즐기는 편이라 그래도 결과가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적어도 저는 결과가 좋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남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감은빛 2023-04-07 02:00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그렇죠?
아이는 엄청 황당하다는 표정과 말투였어요. ㅎㅎ
그런데 ‘좋아하던‘ 이라고 과거형을 쓰신 이유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3-03-29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쁜 가운데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편이 좋지요.
저는 대중 앞에 서서 말하는 게 무섭고 스트레스 만당일 것 같아요.
말보단 글이 편해요. 수정이 가능하니까요.^^

감은빛 2023-04-07 02:03   좋아요 1 | URL
페크님. 저도 가끔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두렵기도 합니다.
또 긴장해서 손을 떨거나 목소리가 떨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긴장을 조금 해야 결과가 더 좋은 것 같더라구요.
지난 월요일에도 한참 강의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는데,
제가 포인터와 마이크를 쥐지 않은 왼손을 떨고 있더라구요.
아, 나 지금 살짝 긴장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2023-04-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로나 확진

내 주위에 아직 코로나에 걸려본 적 없는 지인들이 몇 명 있다. 최근까지는 나도 그 중 하나였는데, 지난 주에 나도 드디어 확진자 대열에 합류했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느낀 건 2주 전 일요일 오후였다. 바로 다음날에 중요한 일정이 있었고, 중요한 문서 작업도 남아있어서 사무실에 나갔다. 일을 하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밤늦게까지 문서를 붙들고 씨름했다. 새벽에 좀 졸다가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를 사와서 마시고 다시 일했다. 잠깐씩 졸기는 했지만, 암튼 밤새 일을 했다. 월요일 오전에 일터 동료가 출근하자마자 내 몰골을 보고 밤을 샜다는 걸 눈치챘다. 급한 문서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고 중요한 일정을 다녀오고, 오후에 좀 일찍 퇴근해서 쉬고 싶었는데, 일이 꼬여서 그러지 못했다. 일요일 오후에 사무실에 나와서 약 30시간 가량 일을 하다가 월요일 저녁 9시쯤 퇴근했다. 월요일 저녁때부터 급격하게 몸 상태가 안 좋았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했고, 감기 몸살 기운이 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화요일에는 저녁에 또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요일 오후에 출근하기로 하고 오전을 쉬었는데, 딱 감기몸살 기운이라고 여겼다. 콧물이 나오고, 기침이 잦고, 목이 아팠다. 어쨌든 오후에 출근해서 저녁때까지 일을 했다. 회의를 마친 시간은 대략 10시쯤이었다. 같이 회의를 한 선배들이 배도 고픈데 간단하게 뭘 먹자고 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따라갔겠지만, 그날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냥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했다. 마치 다음날인 수요일이 삼일절이라 약 먹고 하루종일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다고 나를 붙잡아서 결국 따라 나섰다. 맛있는 연포탕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전부터도 친했지만, 최근 서너달 사이에 부쩍 친해진 이 분들이 그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팬하기 너무 힘드네. 우리가 서퍼터즈가 되어서 열심히 밀어줄테니 맘껏 날개를 펼쳐봐라.˝ 이런 얘기였다. 즉, 본인들이 내 팬이 되어 열심히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제서야 최근 유난히 자주 챙겨줬던 일들이 떠올랐다. 정말 고마운 마음이었지만, 쑥스럽기도 하고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삼일절에 집에서 감기약을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이날까지만해도 그냥 감기몸살이겠지 했다. 설마 코로나일 줄은 몰랐다. 다음날 목요일 아침에도 증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열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코로나를 의심한 건 발열 때문이었다. 집에 있던 자가진단키트를 찾아서 검사해보니 양성이 나왔다. 곧바로 보건소로 연락했더니, 오후에 와서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화요일 저녁에 같이 회의했단 분들에게 알리고 특히 따뜻한 국물을 사주셨던 분들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팬이라고 서포터즈를 자처해주시는 분들에게 코로나를 전염시키면 너무나도 죄송한 일이 아닌가! 다행히 이 분들은 모두 코로나 확진 경험이 있어서 그랬는지 별 증상이 없다고 걱정 말라고 하셨다. 오후에 보건소를 향해 출발하면서 버스를 타면 안 될 것 같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평소 걸음으로는 30분 정도 걸릴 거리인데, 몸이 아프니 한 45분 넘게 걸린 것 같았다. 피씨알 검사를 받고 나오는데, 검사 결과는 다음날 오전에 문자로 통보한다고 했다.

정말 너무너무 바쁜 시기에 이렇게 코로나에 걸리니 답답했다.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무실에 잠시 들러 노트북을 챙겼다. 내가 자가격리로 자리를 비울 일주일 동안 사무실과 매장을 지켜야 할 일터 동료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그리고 집 근처 마트들 중에 평소 제일 사람이 없는 곳에 들러 일주일치 먹을 거리를 챙겼다. 간편식 위주로, 간단히 요기하고 약 먹기 편하게 데워먹는 죽 제품들을 주로 골랐다. 코로나를 핑계로 아무 생각없이 푹 쉴수 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일 년 중에 제일 바쁜 시기라서.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문서 작업들을 하면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자가격리

다음날 아침 일찍 확진 통보 문자가 왔다. 자가진단키트 양성 나왔을때 이미 각오하고 있어서 놀랍지는 않았다. 드디어 나도 걸렸구나. 이런 마음이었다. 미리 사둔 감기약을 먹고 보건소 연락을 기다렸다. 다른 건 안 궁금했지만, 약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는 궁금했다. 작년에 걸렸던 지인 말로는 전화로 증상을 말해서 약을 지은 후 심부름 업체 통해 약을 배달받았다고 했다. 집에 있는 감기약은 이틀 분량이라 계속 증상이 안 좋으면 추가로 약이 필요할테니, 그 부분은 꼭 미리 알아둬야 했다. 한참을 기다려 보건소 연락을 받았는데, 돌아온 답은 좀 허무했다. 코로나 전담 병원 뭐 그런 병원이 정해져있어서 그 병원에 그냥 다녀오면 된다는 것이다. 7일 자가격리하고 그 다음엔 다른 절차 없이 그냥 일상생활하면 된다고 했다. 코로나도 4년차라 이제 거의 끝물이라는 느낌을 확 받았다.

여러 거래처들과 연락을 주고 받을 때에도 다들 그런 반응이었다. 이제서야 걸렸냐? 뒤늦게 걸렸구나. 남들 다 걸릴 때 뭐하고 이제서야. 뭐 이런 반응들. 앞서도 말했듯 엄청나게 바쁠 때라서 각종 증상들이 제일 심할 시기에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감기약으 독해서 약 먹으면 엄청 졸리는데, 졸음을 참아가며 억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휙 시간이 지났다.

주말에는 좀 맘 편히 쉴 수 있었다. 준비해뒀던 감기약을 다 먹고, 집안을 뒤져서 언제 사먹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감기약을 찾아냈다. 유통기한도 확인하지 않고 그 약을 그냥 먹었다. 주말 이틀은 이걸로 해결했다. 월요일에도 계속 증상이 심하면 그때 병원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죽과 간편식만 먹었더니 좀 지겨웠다. 토요일 저녁에 뭔가 맛난 걸 먹고 싶어서 배달 앱을 켰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이 많아서 뭘 고르기가 어려웠다. 배는 고픈데 보는 음식들마다 다 먹고 싶어서 자꾸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고룬 음식은 돼지국밥과 파전이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영화도 하나 보고 나니 이제 좀 쉬는 것처럼 쉬는구나 싶었다.

주말을 지나면서 발열도 사라지고, 여러 증상들이 나아졌다. 주말에 일부러 안 먹고 남겨준 감기약이 2번 분량 남아있었다. 병원을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루 더 상황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좀 하고 좀 여유있게 쉬기를 반복했다.


다른 증상들은 거의 나았는데, 기침이 낫지 않고 계속 나왔다. 게다가 한번 기침이 시작되면,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다. 이렇게 기침이 안 그치니 목도 계속 아팠다. 거기에 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같이 와서 좀 힘들기도 했다.

어쨌든 자가격리 후반 이삼일 가량은 그래도 조금 쉬면서 잘 보냈다. 코로나 확진이 아니었다면, 이 바쁜 시기에 꿈도 못 꿀 휴식이었을 것이다.

다시 일상

격리 중에도 집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암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일주일을 지냈다가 다시 출근하려니 뭔가 엄청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출근하기 싫었다. 그렇지만 나 없이 이 바쁜 시기를 보낸 일터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서 서둘러 나갔다. 역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겹고 지긋지긋한 업무들. 이제서야 바쁜 시기에 확진이 되어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좀 안 바쁜 시기에 다시 확진이 되어 아무 생각없이 좀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몸이 안 아파야 놀 수 있겠지만.

다들 후유증은 없는지 묻곤 하는데, 잔기침이 조금 남아있는 걸 제외하면 다른 증상은 없다. 기침은 좀 더 오래갈 것 같다. 앞서 코로나를 경험한 여러 지인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기침이 안 멈추고 좀 오래갔다는 이야기들이 많더라.

혼자 살아서 편한 점도 많지만, 역시 혼자라 제일 서러울 때는 아픈 때라는 걸 또 한번 깨달았다. 물룬 코로나 같은 전염병은 차라리 혼자인 경우가 편하긴 하다. 작년에 확진 판정을 받은 친한 후배는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다가, 확진되자 본인이 집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다른 가족들(부모님과 형제)이 호텔방에 임시로 머물렀다고 했다. 호텔 일주일이면 그 비용도 참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자가격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주일 넘게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코로나 소식을 전했을 때에도 아이들은 아빠 아프지 말라고, 얼른 나으라고 같이 걱정을 해줬다. 같이 살지 않으니 평소에도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늘 크지만, 아플 때에는 유난히 더 보고 싶었다. 문득 언젠가 아이들과 영영 이별해야 할 때가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언젠가는 닥칠 일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죽음과 이별은 평등하니까. 주말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월요일을 앞둔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우울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힘내서 씩씩하게 잘 지내야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내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를 아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도 힘을 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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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1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처음보다 아주 달라지기는 했지요 그때는 그거 걸리면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심해서 죽기도 했겠습니다 변이가 나타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처음보다 증상이 약해졌으니, 사람마다 다르기도 해요 누군가는 아주 많이 아프기도 하고, 누군가는 잠깐 아프고 말기도 하니... 감은빛 님 한주 동안 혼자 지내셨군요 전에 보니 자가격리 사흘이나 나흘인가로 줄인다는 말도 있던데, 아직 한주인가 봅니다 한주 지나서 다행입니다 기침 시간이 가면 나을 거예요


희선

감은빛 2023-03-17 18:39   좋아요 1 | URL
아직은 자가격리가 7일이더라구요.
기침이 낫지 않고 계속되어서 8일동안 홀로 지냈습니다.
지금은 기침도 거의 나았어요.
희선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3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침 되도록 빨리 잡으셔야 합니다. 정말 오래갑니다. 피로도도 계속 질질 끌고 가는 것 같구요. 전 한, 두 달 정도 몸이 개운하지 않고, 피로감이 계속 진행되는 느낌이어 이상했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피로감이 두 석 달 갔었다고 하시더라구요.
무리하지 않으면서 잘 챙겨드시는 게 후유증을 빨리 없앨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요^^
이제 마스크 의무 폐지화도 실내,외 진행되면서 어떻게 진행될지? 조금 걱정이 앞서네요. 아직도 끝이 없는 것 같네요?
암튼 몸조리 잘하세요^^

감은빛 2023-03-17 18:40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책읽는나무님.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기침도 거의 나았어요.

이젠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 안 써도 된다고 하네요.
정말 코로나 초기에 비해서 많은 변화가 생겼네요.

다락방 2023-03-13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코로나 앓을 때 너무 아파서 책 한 글자도 못읽겠었는데 그 와중에 일을 하셨다니.. 너무 대단하셔요. 감은빛 님 글 읽을 때마다 진짜 엄청 바쁘게 지내시는데 한가하게 지내시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한가한 걸 원한다는 건 제 기준일지도 모르겠지만요. ㅠㅠ

감은빛 2023-03-17 18:42   좋아요 1 | URL
네, 다락방님. 저도 아프고 힘들어서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정 상 도저히 그냥 쉴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꾹 참고 일을 했어요.
3월이 지나면 조금은 한가해질 수 있는데,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위치가 조금 달라져서 다시 더 열심히 일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yamoo 2023-03-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 걸렸는데, 진짜 지금도 걸리는 분들이 있군요! 그중에 감은빛 님이 속해있다니!!
여전히 안심할 수 없고 계속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할 듯합니다.
감은빛 님 보니, 저도 걸릴 수가 있을 거 같아 매우 불안하네요..

얼른 쾌차하시길 빕니다!!

감은빛 2023-03-17 18:45   좋아요 0 | URL
와! 야무님. 아직 안 걸리셨군요.
제 주위에도 아직 몇 명 있어요. 저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랬는데요. ㅎㅎ
막판에 걸리니까 더 억울하더라구요.
야무님께선 끝까지 안 걸리고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3-03-1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봄에 코로나 걸렸었고... 그 다음부터 음식점에 편하게 갈 수 있는 등 오히려 좋더라고요.
빨리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23-03-17 18:45   좋아요 1 | URL
네, 페크님.
오히려 먼저 걸린 사람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구요.
막판에 걸리니 다들 왜 이제서야 걸리냐? 고 시비 걸듯이 말하곤 해요.
뭔가 억울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기침도 거의 다 나았어요.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23-03-1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딱 일주일 정도를 앓았는데 기계처럼 단계별/일별로 몸의 상태가 바뀌는 걸 보고 이건 확실히 engineered 된 바이러스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연말에 생일에 딱 감염되어 그 주말부터 열흘 정도 양성이 나오다 음성으로 바뀌더라구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은빛 2023-03-17 18:48   좋아요 1 | URL
아, 단계별 날짜별로 상태가 바뀌는 측면이 확실히 있네요.
저도 기침 때문에 막 나다니기가 꺼려지는 기간이 딱 열흘까지였던 것 같아요.
그 후로도 기침이 있긴 했지만, 그리 심하지 않았고,
이젠 거의 다 나았어요.
고맙습니다!
 


달, 목성, 금성


어제 저녁에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손톱 모양 달과 거기서 비스듬히 대각선 아래로 두 개의 밝은 별이 보였다. 폰을 열어서 별자리 앱을 열었더니 달과 목성과 금성이 일직선 상에 놓인 상태였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직선으로 모여있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신기하다. 얼른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아이들에게 자랑했다. 오늘 아침에 잠시 SNS 를 살펴보다가 나처럼 달, 목성, 금성이 모여있는 사진을 찍어서 올린 사람이 있는 걸 확인했다.


아마 평생 지구라는 행성 밖으로 나가볼 일이 없을 테니 저 달과 목성과 금성 등을 가까이 볼 일도 없겠지. 달이라는 위성이 지구의 크기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위성이라는 이야기와 달이 조금씩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떠올리며 달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긴 목성에 대해서도, 금성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한 편으로 평소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그저 우연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마침 저 셋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그게 대단히 신기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것도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너희는 각자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지구에 사는 우리에겐 가지런히 줄을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인데 말이다. 목성이나 금성 입장에서는 헛웃음이 날 일이다.


이름


여기서 다시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달은 왜 달일까? 목성과 금성의 이름은 요일 이름과 겹치는 것 같은데, 어쩌다 나무와 쇠(혹은 금?)의 행성이 되었을까? 영어 이름으로는 제우스(로마 이름 쥬피터)와 아프로디테(로마 이름 비너스)로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건 알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 이름(혹은 중국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들어본 기억이 없네.


이름이 가진 이미지가 정말 중요하다보니 작명이라는 행위는 참 어려운 일이다. 소설이랍시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 보려고 몰두 할 때마다 항상 제일 망설여지고 오래 걸리는 작업은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적절한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다. 지금까지 완성한 몇 안 되는 소설들 중에 그나마 제일 무난하게 괜찮게 썼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그 졸고를 읽어본 몇 안되는 지인들의 평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글은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을 모티브로 전체 이야기와 구성을 완성했었다. 이름만 잘 지어도 이야기 하나를 거의 완성할 수도 있었던 것.


소설 주인공 이름을 지을 때에도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 또 얼마나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일인지는 자명하다. 혹시나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발음이 좀 어색하지는 않은지? 좀 더 예쁜 느낌의 이름을 없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내 이름에 만족하고 크게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학창시절에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가끔은 내 이름이지만 발음이 좀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좀 더 어감이 좋았으면, 좀 더 둥근 발음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평생 쓸 이름을 신중하게 정할 수 밖에 없다. 


처음에 큰 아이 이름을 정할 때에는 우리 부모님과 장모님께서 이런저런 훈수를 두셨다. 좀 촌스러운 이름도 있었고, 작명소에서 지어줬을 것 같은 이름도 있었다. 나와 애들엄마는 독립운동가의 호를 따온 이름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어감은 좋으나 워낙 독특한 이름이라 좀 마음에 걸려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출생신고를 1달 안에 해야 한다고 해서 1달 동안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 이름으로 하자고 애들엄마와 대략적인 합의를 하고 시간을 보냈다. 한동안 이런 저런 이름들을 보내곤 하시던 양가 부모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견이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결국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며 참견을 그만두셨다. 거의 1달이 다 될 때까지 더 좋은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고,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그 독립운동가의 호를 이름으로 하고 출생신고를 했다. 아, 엄밀히 말하면 그 독립운동가는 그 이름을 호로 사용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쨌든 그 이름을 한자까지 그대로 따왔는데, 한자의 해석은 그 분과 다르게 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렀다. 당시 아내는 둘째는 전혀 생각이 없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위 친구들, 지인들이 차례로 둘째를 낳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둘째를 갖고 싶어졌다고 심경의 변화를 내게 전했다. 그리고 금방 둘째를 가졌다. 둘째 이름을 어떻게 정할지는 정말 고민이었다. 첫째 때와는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약간 농담 식으로 했던 생각이 큰 아이의 이름을 따온 독립운동가와 아주 친한 동지였던 다른 독립운동가의 호에서 이름을 따올까 하는 것이었다. 그 호는 어감이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매우 독특한 이름이었고, 내 성과 썩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기도 해서 나로서는 정말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애들엄마는 그거 좋다고 그렇게 하자고 했다. 음, 애들엄마는 너무 쉽게 그 이름이 좋다고 정해버린 듯한데, 나는 뭔가 좀 아쉬워서 그 이름 보다는 다른 이름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옥편을 뒤지고, 인명 사전을 찾아보고, 새로운 글자 조합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주위에서 큰 아이 이름을 잘 지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고, 심지어 자신의 아이 이름을 지을 때 도와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어서 더 부담이 되고 어깨가 무거웠다. 이번에도 출생신고 기한 1달까지 최대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더 좋은 이름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다른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고, 마감 기한이 다가올 수록 나도 애들엄마에게 설득당했다. 그 이름도 나쁘지 않네. 에서 그 이름 괜찮네. 로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 두 독립운동가가 절친이었으며, 역사에 분명한 궤적을 남긴 훌륭하신 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만 큰 아이와는 달리 작은 아이의 이름은 한자까지 가져올 수 없는 글자였다. 한자는 발음이 같은 글자 중에 의미를 새로 부여해 정해야 했다.


그렇게 두 아이의 이름을 아주 특이하게 정하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특이한 아이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큰 아이가 초등 3학년쯤 되었을 때 동네에서 공동육아 방과후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이들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듣는 분을 만났다. 역사학 교수였다. 역사학자라면 당연히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이름들을 실제로 아이들에게 지어줄 생각을 했냐고 엄청 신기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두 독립운동가들의 남한 내 인식이 좋지많은 않을 사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듣고 쉽게 그 두 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한 분까지 셋이서 트로이카로 활동했었다. 나는 굳이 만약 셋째를 낳으면 또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전혀 쓸데없는 고민이었지만. 그 나머지 한 분은 두 분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많이 낮고 활동 기간도 짧다. 두 분에 비해 일찍 일제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셨고 나중에 석방된 후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호도 없었다. 다른 대안은 있었다. 그 두 분 보다 훨씬 더 유명한 한 사람의 호를 갖다 쓰는 일인데, 그 이름도 정말 독특했지만 어감 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물론 셋째를 낳을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전혀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들의 이름이 확실히 독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큰 아이의 이름은 워낙 특이해서 그랬고, 작은 아이는 이름만으로는 그렇게 특이하지 않지만, 내 성과 붙이면 특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둘 다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큰 아이는 초등 고학년 시절에 이미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고 내가 존경해서 새로 바꾼 이름을 빌려온 그 분의 존재를 알았던 모양이다. 이 녀석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내게 자기 이름을 빌려온 분이 누구냐고 묻곤 했다. 작은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 모르는 눈치인데, 저번에 왜 자기 이름을 이렇게 지었냐고 물었을 때 설명해 준 적은 있었다. 다만,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적어 놓고 아이들 이름을 밝히지 못해서 유감이다. 개인 정보에 민감해야 할 시대를 살아가다보니 아이들 실명을 오픈된 공간에 밝히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오늘도 한창 바쁜 날인데 어제 저녁에 본 달과 목성, 금성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 이름까지 주저리 주저리 떠드느라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버렸네. 얼른 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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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2-2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가 호를 이름으로 쓰시다니... 좀 무거울 것 같으면서도 한국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을 기억해서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알아보시는 분도 있군요


희선

감은빛 2023-03-17 18:34   좋아요 0 | URL
독립운동가의 호라고 하면 좀 무겁거나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어감이 좋아서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희선님. 늘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3-02-25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이름 지을 때 정말 고민많이 하죠. 감은빛님 아이들 이름 진짜 막 궁금해지네요. 누굴까 하면서.... 설마 경성트로이카 인물들은 아니겠죠 하다가 진짜 그럴까 싶기도 하고요. ㅎㅎ
저는 아이들 이름 지을때는 무조건 가볍게 짓자였어요. 뭔가 이름이 좀 대단한 아이들이 그 이름에 눌린다는 느낌이랄까 그런 경우를 좀 자주 봐서였던듯요. 그래서 저희집 아이들 이름은 굉장히 가볍습니다. ^^

감은빛 2023-03-17 18:38   좋아요 1 | URL
궁금하시죠? ㅎㅎㅎㅎ
경성트로이카는 아닙니다. 그보다 조금 더 이전에 활동하신 분들이예요.

이름에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긴 해요.
저도 막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이름을 이런 뜻으로 지었다가 아니라,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계셨는데, 그 이름을 따왔을 뿐이다.
뭐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줬어요.
아이들도 재미있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