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농구 플레이오프 5차전 두 경기를 보고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운동하는 걸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축구만 했는데, 운동에 소질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분단 대항 축구 대회가 열려 최종 수비수(스위퍼)로 뛰었는데, 그 대회의 엠브이피가 되었다. 당시 우리 팀에는 우리 반에서 가장 빠르면서 발 재간도 좋았던 공격수가 있었다. 우리팀은 매 경기 두세골 정도는 넣어주면서 계속 이겼고, 결국 우승했다. 그럼 그 친구가 엠브이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다른 아이들도 모두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최우수 선수 상을 받은 것은 우리 팀이 꾸준히 점수를 넣으면서도 가장 적은 실점으로 항상 수비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축구를 했으면서도 공을 잘 다루지 못했고, 킥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과 상대 선수가 나를 제쳐도 곧바로 따라가 앞을 막아서는 순발력과 체력으로 끝까지 상대방 스트라이커를 괴롭혔다. 아마도 결승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팀이 전반에 두 점을 넣어 2대 0으로 앞서 있었다. 후반전 초반에 좀 쉽게 한 점을 주고, 점수는 2대 1이 되었다. 후반 내내 상대 팀은 동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 팀은 추가점을 넣어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팀 모두 결정적인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약간 소강상태에 들어가 종반으로 가고 있었다. 양팀 선수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막바지에 상대팀 스트라이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측면으로 공을 몰고 올라왔다. 우리 미드필더는 돌파를 당하거나, 움직임을 못 읽어 뒤쳐졌다. 그는 빠르게 치고 들어왔고 나는 뒤돌아 골키퍼를 한 번 보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리를 좁히자마자 그는 속이는 동작으로 나를 제치고 나갔다.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살짝 미끄러졌다가 곧 몸을 일으켜 달렸다. 골키퍼가 앞으로 나가야할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할지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을 때 상대 스트라이커가 조금은 성급하게 슛을 쏘려고 잠시 속도를 줄였을 무렵 내가 뒤에서 뛰어와 공을 빼았았다. 우리 팀은 열광했고, 지겨보던 다른 분단 아이들도 모두 그 장면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았다. 내가 그 공을 몰고 중앙으로 가는 동안 경기가 끝났고, 우리 팀이 우승했다. 그 마지막 장면과 지금까지 수비에서 활약 덕분에 나는 엠브이피를 받았다. 그리고 아마 이삼일 학교를 빠졌다. 그날 너무 심하게 무리를 해서 앓아누워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축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중학생 시절에는 역기를 들거나 철봉을 하는 등 힘을 기르는 운동을 주로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당시엔 아직 이 나라에 프로농구는 없었고, 실업농구와 대학농구가 각각 인기가 있었는데 농구대잔치 라는 리그에서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모두 맞붙었다. 이때 실업팀은 기아팀의 허재, 강동희, 김유택의 막강한 트리오가 독보적이었고, 내가 좋아했던 컴퓨터 슈터로 불린 삼성의 김현준이 있었다. 대학팀은 당시 오빠 부대라고 불리는 여성들을 몰고 다닌 연세대가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었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이 포진한 연세대는 나중에 실업팀을 모두 제치고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암튼 슬램덩크를 비롯해 드라마 마지막 승부 등 미디어의 영향으로 나도 농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농구를 좀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키도 작은 편이었고, 역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뭐 썩 잘하는 편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실제로 해본 스포츠와 보는 것을 즐긴 스포츠를 비교해보면, 야구는 가장 오랫동안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야구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다들 가난했기 때문에 야구공은 커녕 배트나 글로버 하나 가진 친구들이 드물었다. 그저 테니스공을 주먹으로 쳐서 간이 야구를 하곤 했는데, 이런 걸 실제 야구랑 비교할 수는 없다. 축구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해본 경기이겠지만, 관람하는 스포츠로서 축구는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저 위에서 언급한 중학생 시절에 부산 대우 로얄즈의 김주성 선수를 좋아하긴 했지만, 축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가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국가대표 경기는 어지간하면 중계를 보기는 했지만, 야구를 거의 매일 보았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농구는 뒤늦게 해봤지만, 키가 작다는 한계를 많이 느꼈고,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보는 농구는 그래도 꽤 좋아했었다. 삼성의 김현준 선수를 좋아해서 중계방송을 좀 봤었고,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기아나 연세대, 고려대 경기도 가끔 봤었다. 배구는 실제로 경기를 해본 기억은 없고,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우기는 했었다. 배구 경기도 가끔 보기는 했었다. 농구와 배구는 주로 늦가을부터 봄까지 하는 편이라 야구나 축구에 비하면 적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여자농구를 한참 즐겼던 시기가 딱 몇년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은퇴한 정은순, 전주원 선수 두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응원했던 선수는 정은순 선수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농구 경기 자체를 보지 않고 살았다. 배구는 가끔 봤었는데, 이상하게 농구는 안 봤었다. 그러다가 이번 겨울에 유튜브로 여자농구를 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여자 농구 올스타전을 봤는데, 일본 올스타와 국가 대항전을 벌였다. 그런데 올스타전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일전이라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라 웃음과 장난이 판을 치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여자 농구 경기를 보지는 않았지만, 스포츠 뉴스 따위와 노는 언니 등의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김단비, 박지수, 강이슬 등의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박지수는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튀르키에 리그로 갔다고 한다. 배구로 치면 김연경 선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그 올스타전을 본 것을 계기로 자주 유튜브로 여자농구 경기를 보았다.

내가 주목한 팀은 우리은행과 비앤케이 두 곳이었다. 우리은행은 이번 시즌에 들어오면서 주전 멤버들 대부분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고, 김단비 혼자 팀을 이끄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를 보다보면 이 김단비 선수의 활약이 어마어마했다. 초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각 종목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배구의 세계적인 선수인 김연경 선수가 아무리 잘 해도 한 경기에서 미치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농구의 김단비가 한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김연경보다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리그를 진행하면서 다른 선수들도 김단비의 영향을 받아 경기력이 향상되어갔다. 우리은행이 김단비 원맨팀이었다면, 부산 비앤케이는 김소니아 원맨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팀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앤케이는 다른 선수들이 조금 더 존재감을 드러내는 편이다. 김소니아 선수가 각 경기마다 김단비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 용병 선수를 비롯해 박혜진 선수라던가 안혜지 선수 등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곤 했다.

팀으로 가장 눈길이 가는 팀인 우리은행이 정규리그 우승을 했고, 비앤케이는 내 고향 부산이 연고지이기도 하고, 김소니아 선수와 안혜지 선수에게 자꾸 눈이 가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체 선수들 중에 가장 눈이 가는 선수는 케이비의 허예은 선수였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링을 향해 달려들어 레이업이나 훅슛을 넣는 모습이나 플로터를 던지는 모습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가끔씩 터지는 노룩 패스들, 결정적인 어시스트들을 보면 왜 농구를 지배하는 자리가 포인트가드인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터지는 삼점슛.

내가 키가 작아서 그런지 슬램덩크 만화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선수는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었다. 저 위에서 언급한 연세대 이상민이 포인트가드 치고 키도 크고 득점력도 좋은 편이라 가장 이상적인 포인트 가드로 꼽히곤 하는데, 내 기준에서 여자농구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는 포인트 가드는 허예은 선수라고 본다. 그 다음이 아까도 얘기한 안혜지 선수다.

정규리그 우승한 우리은행과 4위인 케이비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고 2위인 비앤케이와 3위인 삼성생명이 맞붙었다. 네 팀이 각 5판 3선승제인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는데, 우리은행이 먼저 2승을, 비앤케이가 2승을 먼저 올리며 쉽게 끝날줄 알았으나 막판에 케이비와 삼성생명이 투지를 끌어올려 2대 2를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나란히 2연승 후 2연패를 당한 우리은행과 비앤케이는 이러다 떨어지는 이변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렇게 나란히 5차전에 들어간 두 경기 엄청 재미있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와서는 김단비 선수와 김소니아 선수 모두 어느정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지 예전에 느꼈던 만큼의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신 좀 더 유기적인 팀플레이가 나와서 보다 이상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3년 전에 아이들이 무슨 농구 웹툰을 보고 농구공을 샀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레이업슛과 뱅크슛 그리고 자유투 던지는 법 등을 알려줬는데, 아이들은 어려워하면서도 재미있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이들이 좀 더 열심히 농구를 했다면, 나도 같이 뒤늦게 농구 열정을 불피워보려나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지금 이렇게 유튜브로 열심히 농구 경기를 찾아보는 것이겠지.

윤석열이 석방되는 이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 속에서 그나마 농구 경기를 보면서 빠져들어서 현실을 잠시 잊는다. 얼른 윤석열을 다시 감방에 쳐놓고 좀 더 마음 편하게 남은 챔피언 결정전을 즐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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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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