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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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1

 

이 책을 읽기 전, <그 남자네 집>을 단숨에 재미나게 읽어냈으니, 이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도 그래질 것 같았다. 멀리 사는 친척, 애어른 할 것 없이 왁짜하게 모여 득시글한 시댁에서 음식 준비하고 설거지해대는 짬짬이, 부엌데기가 잠시 일손 놓을 때의 소일거리로 하는 십자수 놓듯, 그리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골랐다. 이 판국에 다비드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나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2>를 읽는 것은 망쪼고 분명 산만한 읽기의 대마왕 사례를 보여 줄 것이기에.

이 책 꼬박 이틀 동안 명절의 전야와 이후 초절정의 시기에 읽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느슨하고도 지릿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지루해지지 않을 책을 고르기 위해였다지만, 정말이지 어른들이 모인 명절 즈음에 이 책을 읽은 건 좀 아이러니 같다. 왜냐 하면,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오는 (주로 50~60대 아주머니 친척들이 나누는) ‘뉘집 이야기’ 그것 말이다. 뉘집 자식 돈 있는 집으로 시집 장가 갔으나, 있는 집에 간 탓에 시댁 눈치에 맘대로 외출도 못하고 매여 사는 이야기. 있는 집에 장가 든 탓에 처가 손에 쥐락펴락하는 청맹과니가 된 뉘집 아들이야기. 뉘집 땅 사둔 걸로 갑자가 돈벌었는데 하는 모양새가 무식한 졸부 못 벗어난다고 비꼬는 이야기, 어느메 집은 어떻게 땅을 사두었는데 요즘 한참 망해 먹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 누구네 집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고 그 집 어머니 떵떵거린다는, 어머니의 지위가 아들을 통해 나타난다는 의식의 반영된 듯한 튀틀린 이야기들 말이다. 돈에 관한 헤프닝들이다. 비뚤어진 가부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책에도 나온다. 딸만 둘 나은 며느리에게 어머니는 은연중에 아들을 바라, 그 며느리는 남편 몰래 뱃속 아이를 낙태시키고 나이 마흔에 세 번째아이(사내 아이)를 임신한다.) 이 소설 속의 내용과 어른들의 이야기가 몽롱하게 섞여드니 당최 이야기가 책이야기같고, 그게 그것 같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경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돈에 의해 굴절되고 변형된 인간의 사랑과 애정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애정이라 했나,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난 의사가 주인공이기도 하니, 세상사 이야기는 다 하는 셈. 어른들 모인 자리에서도 조강지처 집나가고 딴 여자와 바람난 누구 이야기가 곧잘 등장하듯이. 


어른들의 이야기, 그 요점은 ‘돈이 제일이고, 세상을 호령한다’ 에만 있는 것이 아닐거다. 돈의 물신성이나 가부장적 이념이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를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하게 만드는가 하는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의 폐해 같은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책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부러 자본주의의 썩어빠질 노름을 이야기하기 위해 인물들을 선별했다고 보여 진다.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는 평생을 치킨 만드는 일로 직업을 삼아 어렵게 자신의 치킨 가게를 연 치킨 박의 죽음에 관한 것. 나머지 등장 인물들은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돈으로 위세를 떠는 직업군과 자칭 재벌 집안의 인물들이다.

   

작가는 ‘뭘 자본주의 씩이나,’ 라고 말했다지. 후기를 보니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희망은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죽어가는 아들을 치료하는 데도 돈과 권력의 과시가 앞서는 속물성, 돈에는 돈으로 갚음을 하는 영빈의 형의 처세 등등. 작가의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필력으로 그려낸 우리 생의 허위 의식은 글쎄,,,, 이것이 세태라면 어쩐지 너무너무 씁쓸해지는 것이다.


누구는 이러한 박완서의 글쓰기가 굳은 살 베어나가고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새살 차오르는 느낌을 잘 챙기는 것은 독자가 알아서 잘 할 나름인지, 나에겐 담배잎을 타놓은 물을 마신 듯, 입안 그득 쓴 느낌이 먼저이다. 구두를 신은 채, 가려운 발등을 긁는 것 같은 답답함도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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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5-05-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구판으로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나중에 개정판으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편안한 오후되세요.^^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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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9 20:23



 

 


스푸트니크 여인에서 넘실대는 농밀한 언어의 바다에 빠져서 술 취한 사람처럼, 뼈가 노골노골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렇게 취하게 만들더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뭐라 딱이 말로 답하긴 어렵다. 음.....굳이 이 소설 속의 맛깔나는 문장을 맛보기로 들자면,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 이상한 거야.-(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너 보기와 달리 특이한 데가 있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하루키의 이 문장으로 점잖게 대구해 줄 것이다’)라거나 ‘책장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이 지적(知的) 난민처럼 바닥에 쌓여 있다.’ 같은 것.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아도 도수높은 알콜이 혈관으로 스미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아 나는 확실히 표현이 딸린다.

스미레는 소설 쓰는 일에 골몰해 있는 22살의 여자였다. 작중 ‘나’는 스미레를 좋아, 아니 사랑했지만, 스미레는 ‘나’를 좋아했는지 몰라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욕을 몰랐다. 그러던 그녀가 자기보다 17세 연상의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들은 첫 만남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마음의 교감을 이루었다. 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미레의 동성애 성향이 아니다.
스미레의 꿈, 그러니까 스미레가 결국 만족할 만한 소설을 완성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스미레는 글을 쓰고 또 썼지만...아직 미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경험과 시간이었다. 그녀가 쓴 문장에는 독특한 신선미가 있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정직하게 표현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녀는 누군가의 모조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만으로 잔재주를 부려 완성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진정한 소설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주술적인 세계가 필요하다. 그녀는 17세 연상의 여인과 나누는 즐거운 시간들과 상처가 된 경험들 이 모두는 사실 주술적인 힘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소설이 아니다. 진정한 ‘나’를 찾는 것에도 이모든 아픈 경험과 시련의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사이에 둔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는 이쪽 세상에 살고 있지만, 본래는 저 쪽 세상의 출신인 것 같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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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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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6 14:45



 

 

이 책을 읽기를 권하는 사람의 항목 중에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그게 나다. 

경제 성장, 민주주의 , 평화, 지속가능한 문명, 환경오염,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 지난 수십년간 고도 경제 성장을 경험해온 사회들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절박한 관심하가 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문제들은 저자가 처음 다룬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제기되어 온 논쟁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논의들을 어느 책보다도  비교적 잘 지적하고 있고, 대안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끔 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은 경제 성장에 대한 검토되지 않은 맹목적 신앙에서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부의 분배 방식은 이것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풍부해진 파이를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이 그 자체가 커지면 작은 조각도 그 나름대로 커질 테니 모두 만족할 수 있게 끔 될 것이라는 경쟁 성장 논리이다. 이 논리를 통해 경제적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물질적인 측면은 제외한 인간적으로서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경로들은 없어져 버렸고, 갈수록 빈부의 차이는 극심해져 가며,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방법들은 점차로 약화되어 간다. 그 뿐인가. 자연환경은? 지금의 인간 사회의 소비 행태와 사회 구조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수많은 쓰레기를 폐기하는 등의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인 사회의 모습은 분명 아닐 터. 그러나 경제정치 세계론이 패권을 잡고, 그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비극인거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두 가지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하나는 ‘일 중독’이고 하나는 ‘소비 중독’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사회는 경쟁 사회이다. 경쟁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암묵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이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병에라도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공포. 결국에는 어떻든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개인적인 선택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런 공포가 있다는 것은 사회의 안전구조가 약하기 때문이다. 경쟁사회란 기본적로 그런 구조이다. 즐겁기 때문에 일을 한다 혹은 계속 한다기보다는 공포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사회이다.


저자는 파이의 크기를 늘려 가난한 나라와 국민들에게 돌아갈 몫도 키우자는 눈감고 아웅하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대항발전'을 하자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줄여 나가도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별 탈없이 살 수 있다고. 산업혁명 이후 줄곧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으면서도 여전히 과로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그는 서비스와 상품 구입 대신 자신이 스스로 창출할 수 있는 미의식과 감성을 기르라고 한다.


이것은 딴소리 같지만, 나는 배우 임현식이 좋다. 경직되지 않은 털털한 아저씨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달까. 나는 인물 비평가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 그럴싸한 표현으로 그가 왜 좋은지를 말할 재간이 없지만, 요는 이거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서 보이는 넉넉함이 있는 것 같다. 교외에 있는 집에서 자기 소유의 텃밭과 농장을 아내와 함께 일구는 모습을 모 아침 토크쇼에서 보았다. 악기가 몹시 배우고 싶어서 바이얼린을 배웠다고. 


실천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데에 있다. 세상이 앞으로 점점 경제의 교환 가치 이외의 본래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감성과 미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부활한다면, 시장 경제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갖는 지배력은 많이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고 있다는 믿음에서 희망이 솟아나며, 전정으로 일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언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수단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온갖 인간의 경험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역사라든가 미의식이라든가 사고방식이라든가 세계관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의미의 창고이자, 감각의 창고이고, 기억의 창고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한 언어는 인류 문화와 문명의 일부이자 인간의 한 가지 가능성이 거기에 실현되어 있다. 두 세대라는 짧은 시간에 5000개 이상의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상 예가 없는 문화적 재난일 것이다."


"오늘날 산업 노동자의 생활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부자유스러운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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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노엄 촘스키 지음,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어, 강주헌 옮김, 레미 말랭그레 그림, / 시대의창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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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7 15:06


 

 

바츨라프 하벨이 제 7회 서울 평화상에 수상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평화(?)를 주는데 저 외국인이 상당히 일조를 했나? 허울좋은 세계화!!! 구호 속에 묻혀 과연 '서울 평화상'의 의미는 무언지.......!!

나는 그 사람을 잘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 주말에 하는 퀴즈 프로(검색 문제로 저 상과 저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를 보고, 서울평화상 수상자라는 하벨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본적이 있다.

찾아보니...하벨은 공공연하게 김정일을 “세계 최악의 독재자”라면서 “그는 핵과 미사일 등으로 세계를 협박해 받아 낸 식량을 군대 등 자신의 충성 세력에 나눠줄 뿐 주민들은 굶어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는 내용의 기사들(하벨과 부시는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벨이 왜 미국이 가장 높이 받드는 ‘유럽의 양심’으로의 상징적 존재인가 라는 점이다. 하벨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체코의 민주주의 체제로 바꾼 사람으로, 미국이 대놓고 칭찬하기에 딱 좋은 지식인 계층이다. 그런데 당시 하벨과는 반대 급부(미국의 입장에서)의 엘살바도르 지식인 6명이 소리 소문없이 미국이 훈련시킨 코만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것은 거의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이 쯤에서 드는 생각은 언론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1966년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미국이 자신을 향해 어떤 비난과 질시를 하든 개의치 않고 미국의 ‘외교정책- 언론-지식인’의 유착 관계에 주목하여 그 본질을 폭로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촘스키는 말한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대중을 그저 무기력한 구경꾼으로 만드는 이런 흐름을 충분히 꿰뚫어 보았을 것이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한다. 왜? 그것이 이들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현재의 경제 체제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고 말한다.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그리고 나는 일순 무정부주의자처럼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같은 일개 개인이 무슨 힘으로, 어떻게. 알고는 있지만 어찌해 보지 못하는 방관자로..... 남게 된다.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지만,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노동 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신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치면, 나의 동료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 열매를 즐길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촘스키는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노동 조합을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민주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정치 발전의 결과를 이뤄낸 것들로 생각하기 쉬운 여성 권리 신장이라던지, 인권 개선과 같은 법안들 하나하나는 사실 정치적 공백을 메우려는 의원의 노력으로 이뤄낸 결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일개 개인들이 피흘린 희생의 결과물이고 인권을 보호하려는 여론들의 거센 압력을 통해 통과된 것이다. 사회에 영합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의 투쟁물들인 것이다.


대중을 얌전한 방관자로 만드는 정책에 편승하지 말아야겠다.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 따위 여지없이 깨 주어야 한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밑줄 그은 문장


“정치 투쟁은 거짓말을 폭로하고, 그에 관련된 주역들과 꼭두각시들을 구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관련된 문제를 합리적으로 제기하면서 그 문제를 현실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도 정치 투쟁의 한 부분이다.


“세계화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점을 지향해서 정치적으로 고안된 현상입니다.”


“군부가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 계급이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산다. 범죄자를 두려워하고, 마약 밀매자를 무서워한다. 심지어 흑인과 외국인까지 무서워한다. 미국의 테러에 대한 두려움을 유럽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코소보 사태의 경우 인공 청소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랬을까...미국과 유럽은 발칸 반도의 국가들이 제 3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치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값싼 노동력을제공하는 국가여아 한다는 뜻이다. 보스니아를 원조하면서 외국인의 투자를 개방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 그 증거이다. 요컨대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유럽의 멕시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조만간 세르비아의 산업기지와 광산이 다국적 기업의 소유가 될 것이다. 경제 정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금융기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실질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 소비에트 연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토 군이 주도한 전쟁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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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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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8 13:47

 


 

 

 

이 소설 속에서 동구라는 아주 착한 소년을 만났고, 그 녀석의 가족 이야기 때문에 나는 울고, 웃었다. 동구네 할머니를 보면서 엄청 무서우셨던 살아생전 우리 친할머니도 생각났고, 나를 가르쳤던 초등학교 적 선생님 생각도 났고,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빠진 호랑이신 우리 아버지가 내가 동구만할 때의 젊으셨을 적 생각까지 부쩍 많이 났다.  이 소설은 동구의 이야기를 따라서, 잠깐 나를 어린 시절로 돌려 놓았던 듯하다.


사람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성숙을 불러오게 하는 ‘부조리하고 흉폭한 세계’와의 맞닥뜨림이 필요한 듯하다.

한 친구에게 나는 그런 것을 물은 적이 있다.

“너는 니가 언제부터 부쩍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나.”

친구가 말했다. “나는 열한 살이 되도록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있는 줄 알았다. 엄마 아빠가 그만큼 곱게만 키워 주셨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아빠가 사업에 크게 실패하시자, 이후 가족들이 전셋집을 전전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곱고 편안하게만 자라왔는지 알았다.”

이 친구에게 내면적 성숙을 위한 “흉폭한 세계”와의 대면은 바로 아버지의 사업 실패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 착한 동구에게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각설하고......


심윤경의 글은 ‘언어의 마력을 갖고 있다’ 둥의 책 뒷표지의 평론가들의 칭찬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다 싶게, 글을 잘 썼다.

작가의 글이 빛나는 부분은 그러니까, 작가가 이건 정말 잘 하는구나 하고 생각되는 부분은 ‘서사’이다.

주리 삼촌과 선생님의 등 뒤로 훔쳐본 어지러운 어른들의 세상을 들어내는 방식이라든지, 소설 속 등장 인물의 성격을 섬세한 내면의 변화를 ‘서술’하거나 일일 ‘직접 표현하는’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이 탄복하며 알아차릴 정도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이걸, 사람들은 ‘밀도 높은 서사’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동구는 어른스러워서"라는 박 선생님의 칭찬에, 선생님이 자신을 어른으로 생각한다며, 기뻐하는 동구의 모습.   흡...동구가 나로 하여금 오랜 동안 미소짓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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