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
폴 써로우 지음, 서계순 옮김 / 푸른솔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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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써로우의 <중국 기행>은 페이지 655짜리의 굵은 두께의 장정본 책으로 나는 방금 이책의 끝페이지를 덮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북새통의 기차 안에서, 그리고 설날 연휴 내내 틈틈이, 결국에는 연휴의 끝자락에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이 책은 1987 ~ 1988년으로 추정(책의 어느 부분에서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날짜의 정확히 연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보니)되는 시기에 런던에서 출발하여 기차만 타고 중국 대륙 구석구석을 누비는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앞의 80페이지 상당 부분은 런던을 출발하여 프랑스를 지나 동베를린과 폴란드에서의 여정과 러시아에서 보낸 날들에 대한 술회를 차지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변두리를 낡은 회반죽에 지루하고 단조로운 창을 가진 다닥다닥 붙은 건축물쯤으로 일축해 버리고 당시 동구권의 상징적인 도시 베를린을 위대한 과대망상에매력을 느끼는 대도시 정신 분열증의 표본이라고 서술하였던 부분이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오다보면 소로우가 특별히 남다른 애착을 느끼는 듯 보여지는 민족도 있다. 몽고인들과 티벳인들이 그 예이다. 몽고인들은 그들의 천진함과 소박함 높이 사고 있었고 티벳인들의 경우는 그들이 몹시 추운 고산 지대에 살고 있어 잘 씻지 않아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천성이 자유롭고 강인하며 행복한 민족이라고 서술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쏘로우의 여행 내내 암거래 달러상이 달라붙는 일이 일상과 같았던 것, 어느 지역을 기차 여행 하던지간에, 새벽녘이 되면 역무원들이 담요를 수거하기 위해 단잠을 자는 승객들을 깨우며 소동을 부리는 일, 영토가 넓다보니 어느 지역은 너무 더워서 곤란하고 어느 지역은 너무 춥다는 것,어느 지역의 기차가 시설이 좋은지에 대한 평, 등등 소상한 하고도 자잘한 기록들을 읽는 맛이 재미있다.

티벳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이야기할 때는 달라이라마의 생을 다룬 영화 <쿤둔>에서 본 명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이 책에서 보여 주는 티벳 고원의 절정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알프스 같은 꼬불꼬불한 길이나 시커먼 절벽이 없었다. 로키산처럼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압도적인 위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티벳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과 한적함을 향유하도록 하는 단단히 버티고 선 산과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진 지역'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의 근대사에 대한 궤적 또한 보여 주고 있다. 쏘로우가 이 근대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는 다름 아닌 기차로 여행을 하면 만났던 중국의 구비구비에 살고 있는 현인 들의 육성인 것이다. 1957년경에 있었던 과거 문화 대혁명 당시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삶, 그리고 문화 대혁명 수비대인 홍위병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로부터 직접 듣는다.

그리고 1988년 쏘로우가 여행을 하던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남아 있는 마오쩌둥의 위상도 확인한다.(지금은 또다시 마오쩌둥의 붐이 일이나서, 그의 저서가 아주 잘 팔리고 있다고 하지만) 쏘로우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생가 및 기념관에 가서 그 자취를 훑지만, 흥망성쇠가 잦은 민족들간의 기질에 기인한 것인지, 여행 당시에는 마오쩌둥의 사진도 잘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념이 될 만한 유적지는 소수 민족과 한족 간의 흥망과 부침에 따라 몰살되어 자취는 살피기 어렵기 일수라고 쏘로우는 전한다.

맨 뒷장의 번역자 후기를 보니, 중국을 연구하는 분이나, 대학생 그리고 중국과 교역을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는 말이 붙어 있다. 나는 위의 세 분야 중, 어느 분야에도 속하지 않지 만 이 책을 참 재밌게 읽었다. 언젠가 나에게도 중국 구비구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책을 준비해서, 내가 머물게 되는 지역지역마다 쏘로우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참고해 보고 싶다. 그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내게 과연 와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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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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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안치환의 노래 중에 <귀뚜라미>라는 노래가 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아직 내 울음소리는 노래가 아니요,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는.

대학 2학년 때 이 노래를 첨 듣고, 이 노래는 나를 위한 송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노래를 달리 옮기면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으니. 조용히 때를 기다려라 라고 옮겨야 할까나. 밟히고 짖눌려 버리기 쉬운 사소한 존재에게 견고하고 단단한 의지를 불어넣는 마력을 나희덕은 갖고 있다.

4년 남짓한 사회 생활은 나에게 여운을 두지 말고, 복종하지도 말며, 곁을 터 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단단한 틈을 밀고 들어오는 시심(詩心)이 있다. 그건 바로 나희덕의 시이다. 그의 이 시집 중, <속리산에서>라는 시는 이 시집 전체의 경향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가파른 비탈만이 /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산다는 일은 /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이 남아 있는 나에게 /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 산을 오르고 있지만 / 네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 산 속에 갇힌 시간일거라고,'

삶은 그런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천장호에서-
던지는 돌멩이에도 제 속을 보이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열정을 갖고 대들기를 반복해 보지만, 얼음장처럼 닫힌 마음이 그러하듯 돌을 아무리 던져도 호수는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시인이 아니, 내(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은 그렇게 열정과 냉정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희덕은 시에서 노래한다. 냉정을 열정으로 무화시키는 힘을, 과거의 썩은 물웅덩이처럼 남아 있는 상처는 정리되어 이제 현재의 삶을 파헤쳐 놓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기억, 이것은 바로 열정 속에서도 냉정을 찾는 것이며, 냉정 속에서 열정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또 말한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실을 짜깁는다.-고통에게1-' 이렇게 조용히 시인은 나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처럼, 복종함으로 반항에 이르는 길을 풀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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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청목정선세계문학 2
루이제 린저 지음, 김진현 옮김 / 청목(청목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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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는 나의 주변에서 때아닌 독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비운의 그러나 격정적인 삶을 굵고도 짧게 살다간 전혜린과 <생의 한가운데>의 저자인 루이저 린저에 대한 이야기들 모두 독일이라는 나라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기에.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고1 신임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되었다. 당시 클럽활동 부서로 들어갔던 도서반에서 담당 선생님이었던 그 분이 어느날 조용히 청목 출판사에서 나온 <생의 한가운데>를 건네주시며, 다음 시간까지 읽고 발표를 해 보라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이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은 전무후무했고, 그저 선생님이 권해 주신 책이라는 데 무척 각별한 느낌만이 들었었다.

선생님께서 이 책을 통해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보길 바라셨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더더욱 한자한자 주의를 집중하며 첫 장을 훑어나간 기억이 난다. 일곱살 때부터 생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주인공 니나 부쉬만, 그리고 니나를 헌신적으로 짝사랑하는 슈타인 박사, 이렇게 다분히 이상적인 주인공들과 이 글의 화자이기도 한, 니나의 언니가 나온다.

니나의 첫번째 남편은 음악가였고, 두번째 남편은 극작가로 나온다. 그리고 중간중간 우편으로 배달된 니나의 일기를 언니인 안나가 (남의 일기를 읽는 행위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이야기 설정상으로는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동생 니나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보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 자신이 첫번째 남편은 국립 극장 지휘자였고(사별하게 된다.) 두번째 만난 남편은 극작가이다. 이 밖에도 히틀러 정권 하의 격동기에 고난과 시련을 싸우면서 자기 신념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지적면서도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임을 확신할 수 있다.

소녀 시절부터 부단히 생에 회의하고, 생의 의의를 추구하며 고집스러우리 만큼 방황하기를 그치지 않는 니나. 이런 니나의 생의 궤적을 훑고 있으면, 독자인 나 또한 부단하게 차오르는 생에 대한 의지로 긴장하게 된다.

이 책을 권해 주시던 선생님의 깊은 뜻은, 나로하여금 니나처럼 파란만장하진 못하겠지만, 앞으로 나이가 들어서도 생의 감각을 늦추지 않으며 살아가라는 긴 안목의 일침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나를 표현하는 일마저 권태로워질 만큼 축축 늘어지는 나자신을 대할 적마다 십년 전에 읽던 빛바랜 이 책을 그냥 조용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내리곤 한다. 팽팽한 삶의 감각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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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김미진 지음 / 민음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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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라는 소설을 찾아 읽게된 계기는 그랬던 것 같다. 1997경에 잠시 모 일간지에 일주일마다 한 주간의 미술 전시회 소식을 전하던 고정 칼럼니스트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미진이다. 칼럼 옆에는 항상 단아하고 지적인 외모의 이 여자가 밝게 미소짓고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미술계에 종사하고, 일찍부터 도미를 해 대학시절부터 유학 생활을 한 예쁘장한 외모의 그렇고 그런 사람인가보다 했지만, 그의 칼럼을 지켜보면서 그가 기존의 미술계라는 질서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저널리스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기보다 3년 앞서 벌써 그가 장편 소설 하나를 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술가가 그리는 소설이란 어떤 방식일까하는 호기심 반으로 읽게 된 것이 바로 표지도 세련된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다.

어느 정도는 글쓴이의 생활 주변을 소설 속에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는 듯, 이 이야기는 미술학도들의 사랑과 열정과 예술의 문제를 간결한 문체로 이야기한다. 간결하다는 것이 지나쳐 약간은 작가가 우리말 구사 능력이 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1부의 쌍과 지니, 2부의 글라스와 지후, 3부의 윤과 쿠키, 4부의 지니와 류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갈등하는 내용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 방식에 있어서, 상대방의 정작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짧은 단문의 생동감 있는 문체로 그려낸다. 이러한 문체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 소설의 끝에 붙어 있는 평론가의 표현이 백미이다. (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은 이 평론가가 이 소설을 평하며 붙이 해설에 딱 들어맞는 속담이 아닐까 싶다.) 평론가 조성기는 이 소설의 관계 맺기 방식을 존 바스의 소설<성산 악극단> 제1장 ‘피아노를 조율하면서’를 인용하며 김미진의 이 글의 경향을 설명한다.

“배는 정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류에 따라 강 안을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며 관객은 양쪽 둑을 따라 앉아 있다. 그들은 배가 지나갈 때 그 연극의 한 장면이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다른 장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조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중략) 인생도 그런 것이라고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의 친구들은 흘러 지나가고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이 흘러 지나가면 우리는 뜬 소문을 듣거나 아니면 그들의 행방도 모른다. 친구들은 다시 밀려 오고 우리는 서로의 우정을 새로이 하거나 혹은 서로가 남남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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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팡세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198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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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졸업을 하고도... 하릴없이 근근히 지내던 백수 시절 집 근처의 다른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이다. 그 학교에 다니던 아는 후배의 학생증을 빌려 대출받고, 도서관에 비치된 책상 한 켠에 꼼짝 않고 앉아 내리 6시간을 읽었던 낡은 책이, 바로 33세의 팡세이다. 성장 소설이라는 게 있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지난날 나는 왜 그렇게 가난했었는지(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무얼 그리 자신없어 했었던지, 혹 결핍과 상흔의 딱지를 떼지 못하고 상장처럼 달고 다녔는지에 대한 이유같은 걸 계속 스스로에게 반문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게 성장 소설이다.

'33세의 팡세'를 읽는 내내, 내 맘 저편에서부터의 간질거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 글은 소설은 아니고, 김승희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이 글에는 인간 김승희 개인의 문학과 사랑과 가족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이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되어 간다.

'나는 어렸고, 나는 우주의 고아처럼 외로웠으며, 우리 가족에겐 치명적인 아픔이 있다. 나는 열에 달떠 있고, 문학은, 시는 나에게 씻김궂이다.'아마도 이 책은, 이렇게 두 줄로 어설프나마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결핍'이 '문학'을 낳
는 것이란 말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결핍은 또한 독서 행위를 가져 왔다. 꼭 문학에 꿈을 둔 사람이 아닐지라도, 읽는 내내 나처럼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이 책이 알라딘에는 품절되어 있다. 큰 서점에 나가면 구할 수 있을는지, 사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책인데도 절판된 책들을 보면 너무나 아쉽다. 출판 시스템이란 것이 마치 훌륭한 인재들을 쏙쏙 빼놓고 허접 쓰레기들만 요직에 앉혀 놓는 국
가 정책과 조금은 유사하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하긴 뭔들...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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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