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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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한 곳에 있던 것들은 꺼내본다. 내가 썼던 것인데도 낯설고 간지럽다 싶기는 한데, 그 당시의 내 말투와 내 생각이니까 참아줘야지 뭐....

 

영원한 이방인   2004. 9. 20.       19 : 20

 

나는 막연히 그런 생각 많이 했다. 외국에 나가서 살면 좋겠다고. 그런데 나는 최근 두 가지 일을 계기로, 그 막연한 생각에 작은 마침표 하나를 찍었다. 하나는 이 책 때문이고, 하나는 친구의 경우 때문이다. 먼저, 친구 이야기를 하자면, 그 아이는 6년 전에 가족 모두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그 친구는 현재 한국을 무척 그리워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여건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실현 안 될 가망성이 99%에 가깝다.) 이민 가서 처음에는 한국에서 하던 공부를 살려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직종의 일(베이비시터, 썸머스쿨 한국어 교사 등)을 거쳤고, 현재 네일 아트 일을 하고 있다. 사실 뉴욕에 사는 한국인 여자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아무리 고국에서 수련한 학문의 정도가 깊고 얕고 간에,) 네일 아트 일을 한다는 게 친구의 말이다.(그리 고되지 않으면서도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 준다고.) 그 아이가 전하는 뉴욕 생활은 한국의 케이블 채널 속 섹스 앤 시티에서 보는 네 여성의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곳은 소수 이민족끼리의 갈등도 많고, 주류 백인들의 소수 민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뿐만 아니라 보이는 차별도 심하다고. 특히 9.11 이후에. 게다가 문제는 언어이다. 성인이 다 되어 영어를 완전 마스터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민자로서 주류에서 자신의 자장을 넓히며, 살기 위해서 한 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아야 하고, 이 책 속의 헨리 박이 그런 것처럼, 한국적인 일체의 것을 자신에게 체화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친구는 말한다.

하지만, 한 살 때부터 그 곳에서 철저히 미국 사람으로 산다고 해서 그가 주류 미국 시민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헨리의 어린아들 밋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류에 끼지 못하는 이민자들이 국외자로서 갖게 되는 관찰 능력이 있다. 그 관찰 능력이 거대하게 민감해진(그러니까...이렇게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래이션으로 설정될 수 있었겠지...) 이민 1.5세대 헨리 박이 주인공이다. 그와 백인 아내 릴리아 사이에서의 아들 밋에 대해 그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닮아 흰 피부에 가까웠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한다.


“ 나는 우리 아들이 고국의 언어를 결코 배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생각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애가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하나의 감각만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 내 희망이기도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삶. 그래야만 아이의 반은 노란색인 넓적한 얼굴로는 얻을 수 없는 권위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다가 아이가 일곱 살때 백인 아이들과 놀다가 사고로 죽게 된다. 유색 인종에 대한 어릴 적부터의 고질적인 놀림과 치열한 기득권 싸움의 단면을 헨리 아들의 사고가 보여 준다.


그러면서 헨리 박은 생각한다.

“백인처럼 생활을 하면서 백인이 될 수 없는 나는 누구인가.”


헨리 박에게 정체성의 의문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이 소설에서 뉴욕에 사는 소수민족 집단인 한인들의 독특한 삶, 즉 비시민권자들의 삶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내 릴리아가 맡기도 한다. 그녀의 직업은 이민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 교사이다. 그녀는 언어(영어)를 웃음거리로 삼는 창백한 백인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이 책은 작게는 한국인으로 건너간 미국 이민자의 정체성 찾기를 실감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이며, 넓게는 이 나라 안에서 살건 밖에서 살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건 간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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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7-10-12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능하면 제가 힘을 행사하기 쉬운 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에 이민은 어렵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글구 책..., 영어나 다른 언어로 수준있는? 어휘를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들까 싶어서 ㅎㅎ

icaru 2017-10-12 22:3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마녀고양이님!!! 느무느무 반가워욤!!!!
저 또한 정이 고픈 사람이라선지 이땅이 살기에는 제일인 듯해요! 교민사회는 더 좁을거라 ...
글구 책... ㅎㅎㅎ 그러게요~ 한국에서 들 해외배송 받아야 하려나 싶고!! ㅎㅎㅎㅎ
 
작가의 책 - 작가 55인의 은밀한 독서 편력
패멀라 폴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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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책이 다 있담,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읽고 있는 중이라서 꼼꼼한 리뷰는 못 쓸 것이다. (뭐 언제는 완독한 책의 리뷰를 꼼꼼하게 썼다고)

하필 이렇게 바쁜 시국에 내 눈에 들어 오다니 ( 눈앞에 산적한 탑처럼 쌓인 그것을 피해 도피처를 찾아 눈을 휘번덕거린게지), 하기는 비슷한 류의 책을 많이 갖고 있어서,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의 집, 작가의 방과 같은 류-  봤어도 눈에 안 들어왔을 수도 있다. 저기서 나온 작가가 여기서 나올 것이고, 아마도 인터뷰이의 질문 의도 방식에 따라 답변이 달랐을수야 있겠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을테니까.... 하고 보니, 옮긴이가 정혜윤이다. (아아아.... 그래서 내가 곁눈으로 책 표지를 보고 흘렸나보다. 전에....)  정혜윤 작가?피디? 아..님.. 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한 10년에 침대와 책 이런 책을 정말 좋아했던 내가 맞나... ) 이 작가는 그 피디님이 아니었다. 다른 정혜윤 번역자 님.

 

그런데 이 책은 작가들 본인의 독서 습관과 성향을 묻는 것이니까, 완전히 다르다거나 에두르지 않고, 독서라는 장르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 주제라고 봐도 되겠다. 게다가 선정한 작가들도 이언 메큐언 같은 대작가 두엇만 중복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대다수가 모르겠거나 다른 분 서재에서 이름만 걸출하게 들어봤거나 한 사람들이다. 특히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썼다는 캐서린 부나  빵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는 고요한 삶을 쓴 애너 퀸들런, 저주받은 사람들을 썼다는 조이스 캐럴 오츠 등은 인터뷰 내용만 보고 반해 버렸다. 세상엔 여성 위인이 적다지만 작가군에서는 꽤 되는 듯도 하다. 황금방울새를 썼다는 도나 타트 라는 작가도 좀 달라 보인다. 피하는 이야기 종류는요? 라는 질문에 저는 이 시대의 미국에 관한 리얼리즘 소설에는 관심이 없어요. 결혼, 자녀 양육, 도시 근교에 사는 이야기, 이혼, 뭐 그런 것들 말이지요. 왓.우.

도로시 파커의 작품을 읽으며 눈물날 정도로 웃었다는 작가도 있는데, 당최 검색이 안 된다. 도시 파커라는 작가는...( 내가 몰랐던 그러나 읽고 싶은 작가와 책의 목록이 엄청 불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음)

 

 알랭 보통이 어릴 적에 독서보다는 레고를 취미로 갖는 비문학적인 소년이었다는 데에 실낱같은 희망을 느끼는 나라는 사람은 뭔가! ( 책과 안 친한 우리 둘째 아직은 안심을 해도 되는 건가요?)

목차를 보니, 재미 작가도 있다. 영원한 이방인의 그 이창래다. 우아! (뿌리는 토착 환경에서 내리지 않았기에, 그를 한국인이라 볼 수야 없겟지만ㅠ)

 

작가들에게 나가는 질문은 80프로가 고정 질문이고, 작가군(역사 계열이냐, 추리 계열이거나 과학 에세이를 쓰는 (동물학자) 부류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특수하냐) 에 따라 특별한 질문이 나간다. 고정 질문 중에 우문 같았던 질문 " 웃게 하는 책이 더 좋으세요, 울게 하는 책이 더 좋으세요? 교훈적인 책과 낯선 곳으로 데려가주는 책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나요?  " 대부분의 작가가 현답을 하는데, 그 대답을 듣고 보니, 그 질문이 우문(웃음과 눈물과 감동과 교훈은 대개 좋은 책 한 권에 다 들어 있으므로)만 은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또한 실망스럽거나, 과대평가되었거나, 신통치 않은,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안았던 책이 있냐는 물음에 열이면 둘 정도의 작가만 이 질문에 대답하고, 대부분 요리조리 취권을 부리듯 작가는 언급하지 않고 질문의 핵심에는 충실하게 답변하는 묘술을 발휘해 피해감. 그러나 대답했던 이들 중에 한낮의 우울을 쓴 앤드류 솔로몬이 있었는데 올리버 색스 (다행인지, 뭔지 그이는 2년전 고인이 되었네)를 이야기했다. 그가 아주 유려하게 글을 쓰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살짝 무대 감독 같은 허세가 있다는 것이다. "이봐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잠시 멈추고 이것 좀 보라고요!" 하는 논조가 깔려 있다고 한다. 그런 관음증적인 정서없이도 의료 행위의 엄격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아 그럴 것도 같지만, 그런 지점들 때문에 뭇독자들은 올리버색스를 읽는지도. 무엇보다 두 작가 모두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공통점 아닌 공통점.  

 

또하나 발견한 작가들의 공통점 '종이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전자책도 보편적으로 많이 본다는 사실. 이게 나는 왜 놀라울까?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앤 라모트(작동 설명서, 글쓰기 수업 등 국내 번역 안 된 책이 대다수인 듯) : 오후에는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며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현실이 그 추한 머리를 들이밀 때까지는 말이지요. 낮 시간에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책을 읽는데, 이때는 주로 논픽션이나 <뉴요커>를 읽어요. 그리고 열한시까지는 잠자리에 들어서 한 시간가량 책을 읽다가 자는데, 그때는 주로 소설을 읽지요. ...한 번에 여러 종류의 글을 읽는 건 말하자면 즐거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과 같아요.

 

 

 

지금까지 독자에게 받은 편지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가 있다면요? 어떤 이유로 그 편지가 특별한가요?

한 이탈리아 독자가 자기가 아내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는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어요. 아내가 버스에서 제 책 중 하나를 읽고 있었는데, 자신이 이제 막 다 읽은 책이더랍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서로 만나기 시작했죠. 지금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셋이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존재가 그들 부모의 책에 대한 사랑 덕분이었을지 궁금해지더군요.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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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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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글쓰기 슬럼프는 있어도 독서 슬럼프는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책을 읽고 난 후에 부산물을 염두에 두고 하는 목적 지향적인 독서가 아니라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독서의 동인이 되어야 슬럼프 없이 오래 읽을 수 있나 보다.

 

본인 책에서 말하기를 좋은 책은 책의 3분의 2 지점을 훑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지점이 필력이 떨어질 즈음이라서...

 

이  책의 3분의 2지점을 옮겨 오면...

 

146쪽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책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거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읽을 때 저자의 세계 전체와 상대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독서 행위의 정말 중요한 가치는 '이 사람이 한 권의 책에서 구현해낸 엄청난 세계를 내가 어떻게 빨리 습득하느냐'가 아니죠. '이 책은 저렇게 말하는데 나는 이렇지'하고 자기 반성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핵심이 아니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두 세계 사이의 교직에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깊은 방식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핵심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다는 거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만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을 함께 흘려 보내는 식으로 만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좋은 삶은 뭐겠어요. 시간을 흘려 보내는 삶, 시간 속에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잘 선택하는 삶, 그것이 좋은 삶이잖아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습관이라는 것도 시간을 경영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면,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검증된, 유쾌한, 훌륭한 방식 중 하나가 책 읽기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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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유 2017-10-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 사색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지 얼마 안되어서 반가워 댓글 남겨요.^^

icaru 2017-10-11 19:05   좋아요 0 | URL
네~말씀이 맞습니다!! 전투마법사 님 굉장히 오랜만에 댓글로 뵙는 것 같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책 리뷰 올리신 거 보고 반가웠는데 저도... 그 책 얼마전에 봤더래서요~
책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는 것에도 공감하고요~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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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책에서도 나온다. 훌륭한 책은 반드시 서문이 좋다는 것. 그러면서 이 책의 서문을 예시로 들고 있다. 본문 전체의 맥락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면서 그 자체로 힘 있는 멋진 글. 

 

머리말

 

나는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었으면 하는 유혹에 빠질 만큼 스스로를 대단한 인간이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의 세대에 보통 주어지는 갖가지 사건들, 파국, 시련보다 한없이 더 많은 사건들을 겪게 되고서야,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중심부에 내세워 책 한 권을 써 보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중략)

사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이다.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어떠한 세대도 경험해 본 바 없는 그런 운명을 견뎌낸 우리 세대의 운명 말이다.

 

 

영원한 청춘의 도시 파리(158~159쪽)

 

파리 인상파 화가들의 생활은 외견상으로는 소시민이나 연금 생활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집은 증축한, 아틀리에를 가진 작은 집 같은 것으로, 뮌헨에서 렌바하나 다른 유명 화가들이 화화 별장에서 남에게 보이려고 만든 듯한, 모방한 사치스러운 그런 설비는 아니었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 안 있어 개인적으로 친하게 된 시인들도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거의 실제로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작은 정부 관리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최저 지위의 사람으로부터 최고 지위의 사람에까지 뚜렷이 보이는 정신적인 일에 대한 높은 존경이 수년 전부터 높은 수입을 얻지 못하는 시인과 작가에게 눈에 띄지 않는 한직을 주는 현명한 방법을 채택하게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해군성이나 상원의 부속 도서관 사서로 임명되었다. 이것으로 얼마간의 월급이 주어졌으나 일은 없었다. 상원 의원은 아주 드물게만 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행스러운 직장의 소유자는 훌륭한 양식의 오래된 상원 건물에서 뤽상부르 공원이 바라보이는 창문 앞에 조용하고 쾌적하게 앉아서, 집무 시간 중에도 조금도 원고료 생각을 할 필요 없이 시를 쓸 수가 있었다. 이 얼마 안 되는 안정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훗날 듀아멜과 듀르탕처럼 의사였다든지, 샤를 빌드라크처럼 작은 화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 로맹이나 장 리샤르 블로크처럼 김나지움의 교사이기도 하고, 폴 발레리처럼 몇 시간을 통신사에 앉아 지내는 사람도 있었고, 출판사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중의 아무도, 영화나 많은 판매 부수로 버릇없게 되고, 최초의 예술적인 인기에 기고만장하여 곧 독립하여 살려고 하는 그들의 후배들처럼 오만하지는 않았다. 이 시인들이 그들의 작고 야심 같은 건 전혀 없는 직업에서 얻으려고 한 것은, 내면적인 작업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외면적인 생활의 조그만 안정뿐이었다. 이 소박한 안정 덕분으로 그들은 부패한 파리의 대 일간 신문들을 경멸하며 그냥 지나쳐 갈 수 있었고, 개인의 희생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그들의 작은 잡지에 원고료 없이 글을 썼다. ...언제나 도와주고 충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성실함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데가 있었으며, 시계 장치처럼 어김없던 그는, 다른 사람에 관한 모든 일에 신경을 썼지만, 절대로 자신의 개인적 이득에 신경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만약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시간 같은  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돈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참 이 책 맨 앞에는 유서도 있다. 사실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를 60세에 아내와 동반 자살을 한 일로 그가 평생 펴낸 저작들보다 먼저 만나고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으니, 그도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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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7-11-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청 좋아하는 책! ^^

icaru 2017-12-04 16:07   좋아요 0 | URL
오오 역시 수준이 높으셩... 저는 범접 못하겠더라고요~ 여러번 읽어야 마땅한 듯 합니당 ㅎㅎ

북극곰 2017-12-11 11:36   좋아요 0 | URL
힝... 무슨 말씀이십니꽈. ㅜ.ㅜ 이해와 통찰과 상관없이 그냥 좋은 책은 좋다고 느껴지는 거? 같은 거?? 라는 거죠. ㅎㅎ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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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를 보니까 딱 12년 전에 읽었고, 썼던 리뷰다. 알라딘에 서재에 쓴 건 분명한데, 책으로 검색해서 찾았더니 안 나오고 내 서재로 들어와서 파고파고파고 또 파서 꺼내놓는다. 

지금껏 읽은 책은 조금 되는 것 같고, 앞으로 살날 동안 읽고 싶은 책도 다 못 읽고 하직을 하겠지 이 세상을... 그래서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두세번 다시 읽기는 잘 안 된다. 인상적인 장면이라든가 구절들이 있는 부분을 뒤적거리기는 하지만,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렇게 가끔 다시 생각나는 책이 있다. 이 책처럼. 그 책 참 좋았지. 그 저자(여성이다, 정말 훌륭한 수필가(?) 혹은 과학심리에세이스트(?)인 듯 하다. 아무튼 이 책은 너무 좋았어서 다시 살펴보고 싶고 책넘김의 질감도 느끼고 싶고 헌데, 그 책은 그때 당시 회사 동료를 빌려줬었고 여태 돌려받지 못했다. 내가 선물한 줄 알았나,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책을 살 법도 한데, 그건 또 콜렉터의 병리적 증상에 지나지 않을 듯도 하고...

 

대신 로렌 슬레이터의 다른 책을 찾아보는 것도 대체 방법일 듯 하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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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수전증이 있는 나( 다른 사람과 밥 먹을 때 전방 30센티 이내에 위치하지 않은 반찬은 가급적 먹지 않는다. 좀더 멀리 있는 반찬을 내 밥까지 가져올 때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내가 느끼고, 남이 알아채고 하는 게 싫어서 말이다. 대학 다닐 때는 내내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있었는데, 나 혼자 기타를 중뿔나게 연습하거나 할 때는 눈에 안 띠던 떨림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서 연주를 하려 하면 원곡에 심히 무리가 갈 정도였다.-- 내가 만약 외과 의사였다면 사람 여럿 잡았을까? ). 이 증세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이것이 죽고 사는 문제이거나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의료 기관에 자문을 구한다거나, 딱딱하고 단조로운 의학 서적을 찾아볼 적극성은 갖지 않았다.

뭐, 수전증뿐일까. 각성 기능에도 문제가 있고, 탐닉 중독 경향이 짙다. 일명 “폐인기질” 같은 게. 음식 조절(좋아하는 음식은 배터질 때까지), 인터넷 시간 조절, 게임 종료 조절, 수면 조절... 같은 걸 못하고 끝장을 보려 하는 기질.
  
한번은 이것에 대한 뭐 얻어 들을 지식이 있을까 싶어 ‘학습 부진과 뇌기능’이라는 제목의 어떤 세미나를 들었던 적이 있다. 요는 그거였다. 전두엽의 실행기능 중 한 부분인 주의력에는 이 실행 기능을 조절해 주는 주요한 신경 전달 물질 도파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도파민이 결핍되면 저와 같은 증상이 일어난다는.... 그러면서 세미나는 약 장수의 그것이 되어 갔다. 왜냐, 다른 해결책은 없고, 도파민이라는 결핍 약물을 주입해 주면 된다는 진단으로 강의가 흘렀기 때문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도파민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좀더 타탕한 가설과 이론 그리고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통찰력 같은 좀 거창한 것이었는가 보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이 책.  이 책에서는 10명의 심리학자 혹은 정신과 의사들의 각각 인간의 자유 의지와 복종, 군중 심리와 방관자 효과, 기억의 메커니즘, 스킨십의 힘, 정신 진단의 타당성 등에 대한 10가지 실험과 수술을 소개한다. 당시 이 실험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알고 있던 지식과 사실에 반하는 놀라운 발견에 당혹해했다. 인간의 행동은 보상과 처벌에 의해 좌우됨을 최초로 증명한 스키너의 상자 실험이, 할로의 철사 원숭이 실험이,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이 그리고 인간 기억의 허구성을 증명한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이식 실험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이 실험들의 내용에 있지 않다.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험들과 피실험자들의 중간에서 부단하게 행동을 하고 있는 글쓴이의 고뇌의 흔적과 그 바지런함이 통찰력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일테면 글쓴이는 실험 상자에서 키워졌다는 스키너의 딸을 수소문해 소문의 진의를 알아낸다.  사람이 불합리한 권위 앞에 복종하는 이유를 밝혀낸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 찾아(인명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과 인터뷰한다.  실험에 복종했던 사람과 실험에 반항했던 사람들의 인생이 그 실험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그려낸다. 바로 이것이 실험 밖의 영역 그러니까 순전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모든 판단은 개인에게서 시작된다고 본다. 누구에게는 절실하지만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 모두 사람이고 보니, 생생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발견하는 장(場)에서는 그만 주의가 환기되고 만다.

가설과 실험의 사이,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믿음이 탄생하는 그 곳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참으로 흥미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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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수전증은 12년 전보다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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