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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 사회 ㅣ 이매진 시시각각 2
김영선 지음 / 이매진 / 2013년 5월
평점 :
강수돌 씨의 추천사를 요약하며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인간답게 살려고 일을 하는데, 도대체 왜 일을 할수록 더 비인간화되는가?” 여기서 돌파구를 찾는 데 중요한 실마리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 시간은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역사적 변천을 거친다. 산업혁명 이전만 해도 유럽의 많은 노동자들은 1주에 3~4일밖에 일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지장인 없는 정도만 일하고 인생을 즐겼다. 게다가 “전통 사회에서 해진 뒤 밤 시간은 그야말로 자야 하는 시간이었다. ‘원칙적으로’ 야간 노동은 금지돼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노동 시간이 늘었다가, 전세계적인 노동 시간 단축 운동으로 노동 시간이 조금 줄기도 했다. 그렇지만 8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한편에서는 장시간 노동이 부활하고 다른 편에서는 대량 실업이 창출된다.
둘째, 노동에 관한 가치관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자아 실현형, 프랑스는 보람 중시형, 일본은 관계 지향형, 한국은 생계 수단형이다. 이런 차이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공통점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긴밀한 유대가 낱낱이 깨진 뒤, 또한 인간적인 삶의 관계들을 수호하려는 온갖 사회 운동들이 패배한 뒤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만 해도 노동은 노예들이 하는 천한 것이었다. 15~16세기 종교개혁 때 칼뱅주의는 노동을 ‘신성화’했다. 그러나 노동을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농촌에서, 공유지에서, 땅에서 쫒겨난 사람들은 공장 노동의 엄격한 규율에 길들여지기 싫어 방랑하거나 걸인이 됐다. 국가는 이런 사람들을 폭력으로 길들여 갔다. 나중에는 교육과 복지를 통해 순치했다. 그 사이에 노동 운동은 패배하거나 타협했다. 자본, 곧 기업과 국가의 거대한 폭력과 제도에 순치된 노동자들은 내면의 트라우마를 안고 두려움에 떨며 일한다. 이제 노동은 유일한 삶의 원리인 것처럼 내면화하고 말았다. 자신만의 멋진 삶, 인간다운 삶이 필시 존재할 텐데, 이제 사람들은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단지 노동 안에서, 그리고 그 연장에 불과한 소비 안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요컨대 우리의 노동관, 곧 일과 삶, 노동과 인생을 더는 동일시하지 않고 어느 정도 적정한 거리를 두는가, 그리고 내용적으로 삶이 일에 파묻히는 게 아니라 일을 삶 속으로 얼마나 적절히 통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 ‘과로 사회’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셋째, 부자 되기 열풍, 달리 말하면 가난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결코 부자 되기가 목적이 아니다. 인생에 목적이 있다면 단연 행복이다. 그러나 더불어 행복이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일과 쉼이 분리돼 있지 않는 것. 그 속에서 부자 되기를 목표로 하는 삶은 마치 노예 제도 아래 ‘마름’으로 상승하기를 꿈꾸는 것하고 같다. 이 중독들의 뒷면에 도사리는 것은 생존의 두려움, 탈락의 두려움, 배제의 두려움, 가난의 두려움이다.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삶은 풍요가 아니라 가난 속에서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더는 아파트와 자동차를 사고, 아이들 학원이나 과외를 강제하며, 온갖 보험 상품을 사느라 갈수록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런 삶은 ‘풍요 속의 빈곤’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난 속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인생간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따라 ‘과로 사회’가 더 심화할 것인지 아니면 점차 종말을 맞을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46~47쪽
혹실드는 가족 친화적인 회사를 참여 관찰하면서 발견한 독특한 역설 중 하나로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을 선호할 만한 대안으로 여기는 못브을 든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지긋지긋한 설거지(2교대)나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는 아이들의 칭얼거림(3교대)으로 가즉한 집을 떠나 산뜻한 분위기의 일터로 향한다. 불평등한 가사 분담 때문에 가정은 더는 세상의 험한 풍파를 막아줄 천국이 아니다. 가정은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인식 때문에 여성들은 일터로 도망친다. 집을 떠나 있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연장근무를 신청하거나 회사에서 제공하는 가족 친화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도 한다. 직장 여성에게 가정은 ‘휴식’의 장소라기보다는 2교대, 3교대 노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62~63쪽
최저 임금은 평균 임금의 30퍼센트 수준으로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임금 수준이 되려면 최저 임금을 평균 임금의 50~60퍼센트 수준에는 맞춰야 한다. OECD는 최저 임금 산정 기준으로 평균 임금의 50퍼센트를, 유럽연합은 60퍼센트를 권고하고 있다.
66쪽
성과급은 소득을 극대화하려는 개별 노동자의 이해와 공장을 끊임없이 가동하려는 기업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다. 성과급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가져다주는 수단인 한편, 기업에서는 유연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장치다. 특히 기업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신규 채용을 최소화하고 차라리 기존 노동력의 장시간 노동을 적극 활용하려 한다. 성과급을 더 주더라도 세 사람이 할 일을 장시간 일하는 두 명에게 할당하는 게 값싸기 때문이다. 성과급을 매개로 계속되고 있는 장기간 노동 관행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수단이자 일자리를 수탈하는 방식이다.
66~67쪽
경쟁과 성과에 관해 오랫동안 분석한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콘은 인센티브는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동료 관계를 해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인센티브가 실적에 연계되면서 사람들이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안전하고 만만한’ 일만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져 결과적으로 조직 내 상상력을 갉아먹는다고 본다. 새로운 시도나 혁신을 회피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집단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야기다. 성과 시스템이 가져오는 또다른 문제는 평가 기준이 정해지고 프로세스가 진행되면 그때부터 지배 가치가 관철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101~102쪽
쇼어는 생활 기준이 크게 높아지면서 가사의 수준과 범위 또한 계속 증가했다고 이야기한다. 먼저 근대적 산물인 집안 청소의 규범이 세밀해졌다. (...) 요즘에는 깨끗함을 위해 과학적인 방식이 동원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까지 제거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건강에 관한 기준 또한 높아졌다. (...)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아이를 ‘세심하게’ 돌보며, ‘품위 있게’ 살고 ‘바른’ 먹거리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가정 전체 차원에서는 오히려 가사 시간이 증가했다. 이런 이유에서 쇼어는 노동 절약형 가전제품이 가정 전체에 미친 효과는 아주 작다고 봤다.
123쪽
24시간 사회를 가처분 시간이 증대된 자유롭고 멋진 신세계라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지극히 일면적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밤의 시공간은 서부 개척 시대의 변경처럼 이윤 창출의 공급처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자본의 흐름이 시간적으로 더욱 유연해진 것이다. 24시간 사회는 상품 소비로 침윤된 소비 사회의 확장판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또한 밤의 경제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사막의 모래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건강한 노동, 균형 잡힌 삶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부재한 탓에 노동자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잡기가 더욱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