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10
로버트 스키델스키 &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박종현 감수 / 부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스키델스키 부자가 함께 썼다. 아버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세계 최고의 케인스 전문가이고, 아들인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미학과 도덕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다. 아버지와 아들도 인상적이지만, 경제학자와 철학자의 콜라보라는 점. 옛날에는 경제학이 ‘도덕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철학과 긴민하게 연결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경제학이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도덕과학이 ‘선택의 과학’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극단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시발점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들어, 오늘날처럼 돈이 우선순위를 찾아하는 것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예외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돈에 대한 본능을 도덕과 교양으로 제어하는 게 근대 이전의 사회적 규범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또한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이 더 뚱뚱해지기 위한 게 아니듯 돈벌이 자체는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행복 경제학은 경제 성장이 언제나 소망스럽지만은 않으며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입증한다. 또한 행복한 삶이란 일련의 즐거운 심리적 상태나 욕망이 단순히 충족된 삶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선 또는 ‘좋음’들이 구현되는 삶이다. 이들은 행복 경제학의 한계가 고대의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좋은 삶’이라는 비전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행복이란 단순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건강한 태도이자 입장이라는 것. 이와 관련하여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외적인 강제 없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일에 몰입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소외되지 않는 노동’과 유사하며, 삶의 자유로운 표출이자 삶의 향유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이다. 좋은 삶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노력은 ‘기본재’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재에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속하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기본적 권리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로 주당 노동 시간의 제한, 법정 휴일의 확대, 기본 소득, 누진소비세, 광고 줄이기, 세계화의 속도 조절을 제안한다.

그동안의 유토피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한데, 하나는 고통과 불의가 없고 일하지 않아도 풍요가 넘치는 시인과 예술가들의 찬란하면서도 순진한 유토피아. 다른 하나는 모든 이들이 고된 노동과 소박한 생활 그리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민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철학자들의 정의롭고도 엄숙한 유토피아가 있다. 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는 도덕적 규율의 제어가 없는 한 욕구가 무한히 커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했으며, 후자에는 공공선의 명분 아래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에서는 각자가 ‘자기만의 방’이나 ‘점포 뒷방’과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펼쳐 가면서도 동시에 이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좋음을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며 우애를 나누는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구현된다.    


74~75쪽 

자본주의의 경쟁적 논리는 회사들로 하여금 욕구를 조작함으로써 새 시장을 만들어 내도록 몰아붙인다. 광고가 끝없는 욕구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더 많이’ 소비하지 않는다면 삶은 너절하고 이류에 불과할 것이라고 우리 귀에 속삭인다. 제네럴모터스 연구소의 전임 소장이 근사하게 표현했듯이 광고는 “불만족의 체계적 창조”이다.


160쪽 

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에 몰두하는 세계에서 좋은 삶이란 기껏해야 괴짜와 열성분자들이나 하는 일인 중요치 않은 관심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쟁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는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리기 쉽다. 혹은 자신들의 이상이라는 것이 그저 실패를 은폐하는 가면은 아닌지에 대한 의혹도 떨치지 못한다.


274쪽

여가가 왜 기본재인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여가 없는 삶, 모든 것을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만 행하는 삶은 정말 공허하다. 그것은 무언가를 준비하면서 보낸 삶일 뿐 실제로 삶 그 자체를 위해 영위된 적이 한번도 없는 삶이다. 여가는 높은 수준의 사유와 문화의 원천이다.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세계를 참되게 바라볼 수 있고 삶의 고유한 특성과 윤곽을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그리스 어에서 여가라는 말인 스콜레는 이와 관련된 의미를 암시한다. 피퍼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장미꽃 봉오리나 놀고 있는 아이, 신성한 신비에 맡기고 고요히 있으면 우리는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난 것처럼 잘 쉬고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세계를 조화롭게 묶어 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가끔씩 인간의 영혼에 찾아오는 때는 이처럼 고요하고 감수성 넘치는 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진정한 문명도 없고 그저 라보데르가 말한 것 같은 기계적 문명만 남는다. ‘목표 대상’이니 ‘산출물’이니 하는 기계적인 논의가 횡행하는 현대의 대학교는 이러한 불길한 유령의 화신이다.


275쪽

여가의 경제적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고역의 감소이다. 고역이란 돈을 받고 행하는 노동만이 아니라 출퇴근과 가사노동 등 필수적인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범주로서, 열성적인 작가나 장인의 노동처럼 그 자체를 위해 행하는 유급 노동은 일차적으로 배제된다. 우리의 일상에서 고역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잠자고 쉴 시간밖에 없게 된다면 여가는 불가능하다. (...) 교환 가능한 산출물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구조화된 경제는 자발적인 형태의 여가보다는 기성품이 된 여가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343쪽

부국의 자본가들은 제조업과 일부 서비스업을 훨씬 값싼 노동력이 있는 빈국들로 옮겨 가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값싼 재화와 서비스는 다시 부국들로 수출되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자유무역이 시행되려면 부국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임금의 경쟁자가 있는 상황에서 완전고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부국의 임금이 유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설사 부국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가 항상 새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새 일자리가 과거의 것만큼 좋은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중국과 인도로 일자리를 옮긴 것은 무역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서구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을 하락 또는 정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이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야채를 월마트에서 20퍼센트 더 싼 값으로 살 수 있다고 해도 이러한 제품이 중국에서 생산됨으로서 유발된 임금 손실을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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