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같은 사람에게도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면, 그 중에서도 리뷰를 쓰는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면, 그 중에서도 내가 정말 써낼 수 없는, 그러니까 책이 뿜어내는 내공에 깔려버려, 쉽게 리뷰 형식으로 쓰지 못하는, 억지로라도 서평으로 옮겼을 땐 그저 변죽만 울리고 마는 꼴이 될 거 같아 저어하게 되는 책이 있다면, 그런 독서를 위한 책이 아니라, 책 자체를 위한 책을 꼽으라면, 나는 너무나 절박하게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라고 말할 것이다.

어느 지인의 말씀처럼, 이 책은 ‘새끼를 치는’ 책이다. 책이 책을 부르고, 음악 앨범을 불러들이는 책이다. 굴드라는 한 사람을 비로소 이해하려면, 그와 힘든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책이다.

 

아름다움은 견딜 수 없고 냉혹하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우리의 눈길을 후려친다. 굴드는 특히 피아노 테크닉의 견딜 수 없는 순수성으로 우리의 제압한다. 페달을 사용하고 낭만주의적인 프레이징을 만들어 나가는 호로비츠의 연주와는 절대 닮지 않은 굴드의 연주. 굴드의 음색은 겸손한 자, 헐벗은 사물, 집착하지 않는 낮은 상태의 음색이다.

 

미셸 슈나이더가 표현한 굴드와 피아노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면


굴드는 피아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본다. “네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아주 분명한 분석적인 개념을 가지고 내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없이 추잡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피아노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한다. “이것이 정말 네가 바라는 것인가?” 라고 물으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도록 다그친다. 굴드는 피아노의 이 같은 점을 좋아했다. 그의 방해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너머로 나아가도록 다그치는 것. 그 때 번번히 방해물이 되는 바로 자기 자신. 이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 굴드의 음악가로서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해본다. 음악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굴드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종의 야만성 광증을 용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개념을 발명했다는 점이다.’라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바로 ‘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음악은 두려움의 원천이고 과학 중에 가장 덜 과학적인 것 실체 중에 가장 실체를 지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이지도 못하고 실체를 지니지도 못한, 이 음악에 우리가 이토록 감동하는 것, 음악이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그렇게 하듯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주머니를 뒤집어보고, 책상의 서랍을 열어본다. ‘왜 죽었을까’에서 ‘그 사람의 성생활을 어땠을까’에 이르기까지 숱한 질문들을 채워 넣는다. 그 괴팍한 음악가 굴드가 죽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생에 대해 너무 깊이 조명하고, 상품화시키고 과장하며, 높이 기리려 들었을 것이다. 거기엔 분명 잘못된 것이 있다. (일례로 굴드는 평생 홀과 콘서트의 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연주홀에 그의 이름을 붙이고, 굴드는 더없이 과격한 말로 ‘음악 경연대회’를 비난했는데, 사람들은 글렌 굴드 피아노 콩쿠르를 제정해 놓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오로지 뒷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는 미디어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굴드에 대한 여러 명상들은 심어 주었는데,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글의 작가 미셸 슈나이더는 그 부류가 명명백백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뒤집어 굴드를 낭만적인 이야기의 인물로 여겼던 것 같다.


미셸 슈나이더를 전기 작가로 보는게 맞을까. 글쎄. 미셸 슈나이더는 전기의 정확성과 지식 전달의 측면에서 굴드를 구출해 내어, 허구의 질서, 진실의 질서로 들어가도록 했던 사람 같다.


누가 진실 속에 있는 것일까? 누가 알겠는가? 그걸 알아야 할까? 사랑하려면 알아야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랑에는 아니면 단지 귀기울이는 데에는 전기적인 앎과는 다른 앎이 있다. 설령 안다는 것이 사랑을 확장시키고 활력을 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절대로 사랑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해하려면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우리들 각자와 마찬가지로 굴드 역시 전기로는 씌어질 수 없는 무엇을 위해 살았을 뿐이다.

 

 

우리의 가슴을 찢어 놓는 어떤 하늘, 우리를 바꾸어 놓는 한 권의 책, 선물처럼 주어지는 어떤 미소. 그리고 아무데도 없는 곳을 되뇌면서 음악으로서 사라져서 다른 무엇이 되는 시벨리우스의 음악, 어떤 빈터, 어떤 눈길, 어떤 생각. 전기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 거의 가르쳐 주는 바가 없으며 창조자에 대해선 더더욱 입을 굳게 다문다. 각자는 자신만의 광기와 비밀스럽거나 눈에 띄는 편집증들, 기록된 삶의 페이지들 사이에서만 찾아지는 광범위한, 혹은 미미한 균열들만을 소유할 따름이다. 


굴드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는  대단한 심기증 환자였다. 가벼운 스침을 부딪침과 혼동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워할 만큼 예민했고, 마치 타인의 몸이 그에겐 오로지 상처나 감염의 원인에 불과한 것처럼--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그렇다면 이 예술가의 이같은 별난 행동들을 기인의 전설로 치부해버리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미셸 슈나이더는 굴드의 육신의 병, 이 공포가 음악가에게 기계의 작동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과 섬세한 조음 감각 그리고 그의 세련된 연주를 가능하게 했다고 믿었다.


굴드는 20세기 피아노의 신동 호로비츠처럼 굴드 역시 비행기를 몹시 싫어했으며, 파이노 앞에서 팔꿈치가 건반 아래로 내려가도록 매우 낮은 자세로 연주를 했고, 아주 엄격한 식이요법을 따랐다. 또한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주 은거했으며, 감염을 두려워했고, 타성적으로 연주회를 갖는 걸 싫어해서 자주 연주회 일정을 취소하고 연주회를 멀리한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우울증, 자기 혐오, 타인들로부터의 시달림. 


굴드는 청중은 이미 무시했던지라 연주회에선 종종 청중에게 등을 돌린 모습이었다. 청중들은 굴드가 ‘나를 위해 연주하고 있다. 나를 감동시키기 원한다’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연주했으며, 이 사실은 그가 선택한 음향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따금 ‘불시에 사로잡는 듯한’ 음향, 먼 데서 오는 이 소리는 우리에게 건넨 소리가 아닌 듯이 들린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굴드는 왜 콘서트를 꺼리고 비난했을까. 미셸 슈나이더는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기분 전환과 황홀경. 굴드가 콘서트를 비난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청중의 존재로 인해 그의 연주가 왜곡된다는 점이었다. 연주자는 바흐의 다성 음악의 고전적인 절제를 어쩔 수 없이 변형시켜 과장된 웅변이 되도록 한다. 물론 그도 예술가는 대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음악가의 강력한 요구들을 기분 전환을 요구하는 사회의 요구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가장 사적인 영역, 창조의 영역 안에서 예술이 그것의 수신자들의 접촉을 통해 변질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급속하고 화려한 악구를 늘이고, 자신을 투사하고, 자신을 상실하는 것. 이렇게 될 때 자신으로부터의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 밖으로 추방되는 것을 혐오했다. 자신의 자아가 사랑스럽다고 믿어서도, 혹은 기분 전환을 완전히 피하려 했기 때문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고 보내는 시간들이 그처럼 달콤한 것일까?


황홀경은 다른 이들에 의해서가 아닌 ‘타자’에 의해 자신 밖으로 내쫓기는 것이다. 그것은 기분 전환이 되는 장소에서 볼거리를 만나는 게 아니고, 명명백백한 증거와의 만남이다.

어떤 이들에겐 고독이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으며, 어떤 이들에겐 얼굴도 형체도 없는 무엇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나’가 없으며, 그 말을 들어줄 상대방도 없다. 설령 착각으로 그가 상대방에게서 독자성을 끌어내더라도 상대방 역시 그런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동공 속에 말하자면 끝도 없이 떠도는.......


기분 전환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지만, 황홀경은 반대로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신들의 열망에 의해 쫓겨난 자를 ‘나 자신’으로부터 탈취하여 환희에 넘겨 줌으로써라고 그리스인들은 말했다.


‘전기를 쓰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누구인가를 이야기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찾도록 만든다는 것’이라고, 미셜 슈나이더는 말한다. 미셸 슈나이더의 말을 빌려 이 리뷰 쓰기를 표현하자면, ‘미셸 슈나이더가 말한 굴드를 이야기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를 찾게 된’ 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훗날 이 책을 다시 읽고, 굳이 또 리뷰라는 걸 쓰게 된다면 나는 지금의 것과는 또 다른 리뷰를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책은 매번 나에게 다르게 읽혀질 것이고, 나는 매번 다른 리뷰를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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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1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3-0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3-02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슈나이더는 참으로 묘한 방식으로 굴드를 이야기한 듯해요. 굴드를 말하고 있으나 굴드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스스로 자신을 꿰뚫어보게 하는 방식을 쓰고 있으니. 복순이언니님 버전 리뷰, 역시 책 전반을 아우르는 상냥한 글이에요. ^^

icaru 2005-03-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 님.. 님이 표현이 딱 맞습니다..
"굴드를 말하고 있으나 굴드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스스로 자신을 꿰뚫어보게 하는 방식"이요..
삼일절 아침에 일어나 저 리뷰를 쓰고 났는데... 정말 쓰고 나서...척. 하고 늘어졌었어요...
님처럼 멋지게 소화해 쓸려면 한참 멀었지만... ^^
그래도... 쓰고 나니, 이상하죠... 마음 한켠이 홀가분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고맙습니다...다시한번 꾸벅..

michelle 2005-03-1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고 있으면 막 책을 읽고 쓰시는게 아닐까 생각해요. 바로 읽고 난 후의 감동이나 생생함이 느껴지거든요.

icaru 2005-03-1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을 읽고 일주일 안에 리뷰를 쓰려고 하거든요~ 게다가 책 내용을 인용을 많이 하니까...(말 지어내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 아닐지...^^;;) 더 그렇게 느껴지셨나봐요~ 생생함...이 말은 칭찬이지요? michelle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