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간 야근을 좀 했다. 내년 개발과 관련된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하느라고. 이 작업은 우리가 흔히 프로패셔널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서  발휘된다고 여기는 특유의 기획력이나 그밖의 능력이 요구되는 일과는 멀다. 그 보다는, 필요한 pdf 파일들을 찾아서 적당한 사이즈로 오려서 붙이는 것, 경쟁사 책 스캔을 얼마나 신속하게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신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게 다른 일들이 피티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고분고분 마감을 늦추며 기다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팀원들에게 일을 나눠주면 할 일이 줄어들지 않겠냐고도 말씀 주시는데, 다들 자기업무 바쁜 사람들에게 잡무라면 잡무랄 수 있는 이런 일을 주기에는 내 얼굴이 얇고, 심장도 약하다.

아무튼, 몇일에 걸쳐 지지부진하던 발표 자료가 어제 오후 완성되었고, 야근을 하면서 발표 멘트 순서에 따라 적절한 사용자 애니메이션을 지정하고 있었다. 주말에도 애들 나몰라라 회사 나왔는데, 월요일 저녁도 야근. 나야 발등에 불떨어져서 하는 일이니, 부당하다거나 하는 맘도 딱히 없는데... 집에서는 계속 전화가 온다. 남편이... 아이들이... 집에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모두 싸들고, 퇴근을 했다.

집에 가니, 10시 반....


아이들은 갤탭으로 로보카 폴리를 보느라 정신이 없고, 남편은 벌써 어딘가에서 달리다가(술) 퇴근하신 터라, 얼큰해져서는 눈감고 취침모드 진입 직전인 듯.


눈감고 있는 사람한테, 싸들고 온 발표자료를 보여주며,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게 화근이었다! 물론 술취한 사람이 뭔가 핵심을 찌르는 고견들을 들려주리라고 기대 안 했고, 당장 내일 아침이 발표인데, 고견을 들은들 반영할 수도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나 이래서 그간 늦었어 ,그냥 뭐, 구경이나 시켜줄게, 하는 마음으로 보여줬는데... 하시는 말씀인즉,


“야, 너는 우리 회사 같은 데 들어오지 않길 참 잘했다. 반려! 반려감이야, 이 발표를 듣는 절반 이상은 잠을 청할 것이며, 임원들은 너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겠지?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고.”

“.......”

“개요부터 바꿔야 해! 핵심을 요약하는 한눈에 보이는 뭔가가 없어! 기승전결도 없고!”

“..., 이보라구 남편님, 우리 업계(?)는 말이지, 한눈에 보이는 요약 혹은 표로 정리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업무 보고 하는 게 아니라고. 표로 정리해서 이렇게 잘~~~~ 했습니다. 라고 하면, 말로만 겁나게~잘 했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잘했는지 실물을 보여 줘야지~! 한다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그림 자료를 세세하게 대조 대비해서 나열한 것이라고!”

“대조라니, 둘이 비슷해 보이는데! 차별화 지점이 명확하지 않잖아!”

“물정 모르는 막눈에 보니까 그렇지!”

“그럼, 네 발표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실무자야? 만약 임원이라면 보통 한가한 임원이 아니고서야, 이걸 어떻게 알아듣고 있니?”

남편님 집에 오기전에 어디서 배알이 꼴리는 일이라도 당하셨나. 왜 이렇게 뒤틀렸어! 어쩐지 독설이다 못해 악의가 느껴지는....

사실 집에 돌아와 발표 마무리하고 끝나는대로 바로 잠을 잘 계획이었는데, 사기가 저하되고, 의욕이 부진하시어서 침울하게 패트병에 담긴 맥주를 연거푸 따라 마신다. 남편님 친절히 옆에서 물 끓여 사발면 대령해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괜찮아! 그냥 말로 풀어 하면 되지~”

“뭐야! 듣는 사람들 절반 이상은 자게 될 거라면서!”

“아유~ 그러면, 땡큐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발표 자료는~ 30분 구성인데~ 5분만에 잠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콘 찍고 있다.


그래도 내일 발표는 망칠 수 없어서, 남편이 말한 것에서 반영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수정하고, 한번 발표하듯 읽어보니, 새벽 세시다.

세시간 잤나보다. 여섯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해 회사와서 한번 더 시연해보고, 아침 업무회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오늘 임원 분들 중 두분이 자리에 안 계셨다. 한분은 출장이시고, 한분은 건강검진이시라 하네.


발표는 다음주에 하라신다. 다행반 불행반.


남편이 오전에 전화를 해서, 엄마 생신 관련 장소에 대한 용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남편, 어제는 술김에 독설한 거지?” 라고 하니,

“아니! 취중 촌철살인인데...”

“.....” 내가 말이 없자,

근데, 발표는 잘 했고?”

임원분들이 몇분이 부재하셔서 못했다 하니,

"그래, 그럼 시간 있으니 다시 만들면 되겠다."

"아니, 그냥 그거 갖고 할.건.데.!"

 “그래그래, 우리는 분야가 다르잖아! 너희는 그런 방식이 통하나 보지 뭐."

 

네~ 훌륭하십니다! 


그러고 나와서 그간 밀린 일들 중에서 결재 올리는 일들을 몰아서 하는데, 자꾸 에러가 난다. 숫자의 자릿수를 틀리게 입력한다. 12만 얼만데, 120만 얼마라고 기입해서 “오류가 있으니, 전산실 문의하라”는 멘트가 뜬다.

그뿐만 아니다. 친구한테 문자가 왔는데,

자기가 맘투맘이라는 중고 사이트에서 애들 디비디를 얼마에 샀는데, “나 잘했니?” 라는 문자였다.

그래서 내가 리엑션에 강한 내가,

“히야~대박~ 잘 샀다~ 나는 그거 절반 구성도 안 되는 것을 삼만 오천원 주고 샀어!”

라는 답문자를 보냈다. 아니 보낸 거 같다.

“ 너는 삼천오백원줬어? 니가 더 싸게 샀잖아!”

라고 왔길래 나는 바로

“미안, 내가 상태가 메롱이야! 삼천오백원 아니구, 삼만 오천원 네가 산 것의 절반도 안 되는 구성이구...”

라고 보내니까, 친구가

"아 글쿠나, 내가 싸게 사서 너 혈압올랐구나! ㅋㅋ“

아, 친구야~ ㅎ

“실은 어제 피티 때문에 세시간 잤나 싶다.”

라고 보냈는데,,,친구가 답문자 보내왔다!


“너 운동 시작했니?”

라고 왔다.

“운동? 피티체조를 말하는거임? ㅎ 프리젠테이션이라고~! ㅎ 네가 오늘 날 제대로 웃기기로 작정했니?”

라고 보내자, 친구는..

“아, 미안 요즘 남편이 퍼스널 트레이닝 이라는 피티를 해서, 피티라고 하면 운동밖엔. ㅎㅎ. 발표라, 발표라면 앉아서 듣고 있는 것도 부담인데, 하는 너는 어떠했겠니~ 수고했다!”

 

그래, 맞아 수고 했다. 불행히도 끝나지 않아서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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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1-1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구차달 님이 온전히 재밌게 소화해서 읽어내는 재주가 있으신거죠~ ㅎ 저는 항상 유머코드를 지향하긴 하지만, 저랑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항상 나이와 위치(?)에 맞게 처우해주느라~ 따라 웃어주는 걸 느낄 정도로 잼없어요. 이런 유머 고만 해야지 합니다만, 그럼에도 듣는 이의 반응을 살피며 유머코드를 비집고 섞으려는 저는 정말 딱 "애쓴다"죠.
아닙니다~ 징징이라뇨~ 작은 통점으로도 그마마한 사유를 하실 수 있다는 게 참 부럽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러는데 삶이란 상대적이라서, 아픔 한조각 기쁨 한 덩어리 제각각 다 다르다고!

hanicare 2012-01-18 09:31   좋아요 0 | URL
리액션 해주는 거..맘이 섬세하고 고운 분들이 잘 하실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분들은 마음이 힘겹거나 다칠 일도 많을 거에요.)
그런데 요즘 봄 가을 같은 계절이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여름 겨울처럼 강하고 독한 계절만 남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됩니다.

여리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주위에서 더 아껴주어야 하는데...

icaru 2012-01-19 09:00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궁금했답니다. 하니케이님을 실제로 만나면 어떤 분일까~ 님의 말씀과 이미지에는 희미하게~ 페이소스랄까,, 하는 잔상들이 따라다니면서 강한 통찰력과 기를 발산하는 쬐금 쎈~ 느낌도 드는데, 실제로 뵈면 섬세하며 여리여리하실지도 모르겠다고~ 이거야 말로, 하니케어의 이중생활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2-01-1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거 웃으면 안 되는거죠!
이카루님,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잼난걸 어떻게 해요.

아, 이거 부부 싸움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순간이었는데
그래도 잘 넘어가서 다행이예요. 저는요, 지난번에 울 신랑네 회사의 프리젠테이션 자료
초안 작업하느라, 사흘동안 집에서 꼬박 했다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안에서 떨어져서 수고료도 못 받았어요! ㅋ

고생하셨어요, 이카루님의 눈이 아마 옆지기 님 센스보다 나으실겁니다.
여자들이 훨씬 그런 면에서 강하잖아요, 암, 그렇고 말구요!

icaru 2012-01-19 09:02   좋아요 0 | URL
아유~ 진짜 시간 너무 들어가지 않나요? 노다가 랄까, 중노동이랄까 하는 표현이 딱! 근데,,, 제가 이런 작업에 익숙치 않아서일수도 있고요..

ㅎㅎㅎㅎㅎ 웃으시라고~ 써보건데, 웃으시면 전 성공이죠... 그러고 보니, 제 페이퍼는 저 자신을 희화화한 게 많은 거 같네요 ㅎ

2012-01-25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1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운 2012-02-1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피지컬 트레이닝 입니다.

icaru 2012-02-28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스장에 가면 퍼스널도 있고, 체조하러 가면 피지컬도 있고, (시장에 가면, 열무도 있고- 배추도 있고- 붕어빵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