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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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병 속의 따뜻한 녹차 한 잔, 새벽녘의 강가, 하염없이 달려보기.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흐린 날. 지금은 없는 사람의 부재를 아련하게 느끼며 그리워하기.”

(그리고 영혼의 부엌 님...)”


이것은 요시모토의 소설하면 떠오르는 심상들이다. 


마음이 너무 예민해져서 도무지 그 침잠의 불길이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날은 요시모토의 키친이 젤로 약발이 강하다.



밑줄 그은 부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기능을 잘 살려 오랜 세월 손때가 묻도록 사용한 부엌이라면 더욱 좋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행주가 몇 장 걸려 있고 하얀 타월이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도 끔찍이 좋아한다. 바닥에 채소 부스러기가 널려 있고, 실내와 밑창이 새카매질 만큼 더러운 그곳은, 유난스럽게 넓어야 좋다. 한 겨울쯤 무난히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냉장고가 우뚝 서 있고, 나는 그 은색 문에 기댄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 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 밖에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나와 부엌이 남는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그나마 나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진맥진 지쳤을 때, 나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홀로 있어 추운 곳이든, 누군가 있어 따스한 곳이든, 나는 떨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싶다. 부엌이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행복한 여름, 그 부엌에서. 나는 불에 데어도 칼에 베여도 두렵지 않았다. 철야도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일이 오면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즐거움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순서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만든 당근 케이크에는 내 혼의 단편이 들어 있었고, 수퍼마켓에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발견하면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그렇게 하여 즐거움이 무언지를 알았고,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 그래서, 이런 인생이 되었다. 어둠 속, 깎아지른 듯한 벼랑 끝을 아슬아슬 걸어 국도로 들어서서 후, 하고 안도한다. 이젠 질렸다고 생각하면서 올려다보는 달빛의, 마음으로 스미는 아름다움을 나는 알고 있다.”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아이든가, 화분이든가.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거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싫은 일은 썩어날 정도로 많고, 길은 눈길을 돌리고 싶을 만큼 험하다... 고 생각되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조차 모든 것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황혼녘의 햇살을 받으며 가느다란 손으로 초목에 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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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kitchen 2004-08-26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깜짝 놀랐습니다. ^^a 저는 부엌, 하면 지금보다 많이 젊은 엄마가 한밤중에 부엌문 닫아 걸고 다라이에 물 퍼다 놓고 뒷물하실 때 나던, 쪼르르~쪼르르~뭔가 관능적이면서도 애처러운 그 소리가 먼저 생각나구요 (그 소리를 들으면 왜 그렇게 오줌이 마렵던지..^^), 저보다 몇 살 많지도 않으면서 언니 노릇한답시고 연탄불 위에서 계란 후라이하다 연탄가스 마시고 부엌 바닥에 뻗어버린 큰언니가 생각납니다. 생각해보니, 그 시절 저희 부엌엔 먹을 게 없었어요....

superfrog 2004-08-26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모토 바나나 좋아해요..^^ 저한테도 약발이 센편.

비로그인 2004-08-2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키언니 코멘트도 추천하고 싶어요.ㅋㅋ
그래요...으흠..이런 책을..보관함에 쏘~오옥!^^

2004-08-26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4-08-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솔키 님의 닉네임이 영혼의 부엌인 것이.... 요시모토의 키친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했어요~!
언제나....날것같은 님의 글...생생합니다...!

금붕어 님도 요시모토 팬? 와우~! 전 요시모토 작품이 편안한 느낌을 주어서 좋아요...!!

폭스 님...그죠? 솔키 언니 님의 멘트는 저를 자주 놀라자빠뜨립니다...!!

superfrog 2004-08-2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님, 제 유일무이한 리뷰 당선작이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아닙니까..ㅎㅎ

icaru 2004-08-2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에서야 읽었습니다. 아아....멋진 글이에요...퍼왔습니다. !!!

superfrog 2004-08-2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hanicare님 코멘 덕에 퍼옴을 당했군요^^ 이 리뷰 덕에 hanicare님을 알게 됐다죠.ㅎㅎ

icaru 2004-08-2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러셨구나...

비로그인 2004-08-2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깜딱 놀라서 왔어요. 쏠키를 대상으로 리뷰를..그럼 골룸에 대한 고찰, 뭐 그란 연구보고서인가, 허고요. 흐음..멋진 리뷰.,잘 봤어요, 복순 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