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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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쪽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는 돌봐 줄 큰 형님이 계시는 거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51쪽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주장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 하나님이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자학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빈약한 변론임에 틀림없다. (...) 고통 받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윤리적 가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항시 고통과 불행에 대한 변명거리를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192~193쪽
행카셔 지방에서 직물 산업이 일어난 이후로 영국에서는 선교사들과 면직업자들 간에 긴밀한 동맹 관계가 존재해왔다. 선교사들이 미개인들에게 몸뚱이를 가리도록 가르치면서 면제품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의 몸 중에 부끄러운 데가 전혀 없다면 직물업자들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챙길 수 없었을 것이다.

228 쪽
다수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는 독재나 마찬가지로 압제적 일 수 있다. 소수를 용인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그러나 이 부분이 항시 충분하게 명심되는 것은 아니다.

 291쪽  

과학자들의 경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속세의 권력에 호소하진 않는다. 그 사안을 판단해 줄 증거가 더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하는 사람들로서, 양쪽 다 무오류일 순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자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어느 쪽이나 매달릴 기준이 없기 때문에,서로 증오하면서 공개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무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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