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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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어딘가에 쏟아 붓고 싶은 심정이다. 이럴 때면 뭔가가 쓰고 싶어진다. 소모적인 감정을 생산적인 뭔가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의지. 고작 치부책 수준의 까발림 밖에 되지 못할지언정 말이다.

 소노 아야꼬의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 법, 아름답게 나이드는 법 등에 책을 찾아 보는 게 딱 적절해 보이기는 하나, 달리는 행위를 통해 하루키식으로 나이듦을 이야기한 책을 다시 들춘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고, 결여된 자신을 혐오하고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니(일테면,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고, 마을버스에 시달려 내려서도 5분을 걷는 출근길 예전 같으면, 이 노릇 언제까지 해야 해,라며 힘들어 죽겠다.... 했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당장 그 프로세스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라면, 거기-아침에 일찍 일어나 차를 여러번 갈아타 가며 출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의도 묻지 않는다.) 결국엔 체념한다.(그냥 참는다.)

 

달린다는 행위를 통해서 25년여 세월 동안 소설가로서 또 어디에나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나를 정리한 글.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게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 그러한 성격이 누군가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동해주는 사람은 조금쯤은(아마도 아주 적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호감을 얻는 일은 드물다. 협조하려는 마음이 없는 그런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혼자 벽장 속에 웅크리고 있으려고 하는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누가 호의(또는 그와 비슷한 것)를 느낄 수 있겠는가? “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서 순수한 이론이나 도리를 조립해서 살아가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 그보다는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 소리를(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 사물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품도 든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걸려 가까스로 납득을 했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쳐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애당초의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면, 나는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하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는가?”



 

완주를 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 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가면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게 된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남아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그리고 어느 정도는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우메보시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 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 -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자세 교정을 위해서 몇 사람인가 수영 코치의 지도를 받았지만, 여간해서 맍고할 만한 사람과는 만날 수 없었다. (…) 소설을 쓴느 법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적어도 나로서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수영법을 가르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수영이나 소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수순으로 정해진 말을 써서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있어도, 상대를 보고 상대의 능력이나 경향에 맞춰서 자신의 언어로 어떤 사물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많지 않다 라고 할까.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 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 그런 효율은 나쁘지만 의미 있는 행위의 사이클을 언제까지나 현실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나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어떻게 해서든 질리지 않고 끈질기게 해왔기 때문에, 어쨌든 계속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생각한다. (...) 아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른 선택을 할 만한 여지도 없는 것이다. 자동차의 핸들을 쥐면서 문득 그런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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