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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최영미를 처음 보았던 건 1994년 여름 경이다. 텔레비전에서 당시 김한길의 토크쇼라는 프로에 그녀의 화제의 초기작이자, 신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들고 나왔을 때였다.
그녀는 약간은 굳은 표정에 흥분되고 떨리는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큰 키에 마른 몸, 조금은 구부정한 어깨. 이것이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첫인상이다.
그 이후로 그 시집은 물론이고, 그녀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되었다. 1997년 초여름쯤 동아일보를 신작 소개란에서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서평 형식으로 쓴 <시대의 우울>을 보고, 당장에 서점에 달려가 <시대의 우울>을 사들었다. 나로서는 근 삼년만의 공백을 깨고, 읽게 된 그녀의 책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었다.
나의 아이디는 1997년을 기점으로 이카루스에서 따온 이카루이다. <시대의 우울>에서 본 그림 중 하나에 착안을 하여 나의 아이디로 삼았음을 고백한다. 브뤼겔이 그린 <이카로스의 추락>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해변을 배경으로 한다. 이 그림에 나오는 농부, 양치기, 낚시꾼은 모두가 각각 제 할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도데체 이카로스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린 걸까? 그런데 저쪽 어두운 오른 쪽 하단에 두 다리가 하늘을 향해 버둥거리고 있는 게 아주 작게 보인다.
바로 앞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에겐 저 두 다리가 안 보인단 말인가.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이 해변은 이카로스라는 한 소년이 익사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방관하는 철저히 무관심한 세계이다. 정말... 이런 끔찍한 리얼리티를 표현한 화가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시대의 우울>에 담겨 있는 일기와 같은 지은이의 단상 중에 또 하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지은이 자신은 동구권 사회주의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
었고, 그것이 작은 환상에 불과했음을 시인하는 부분이 있다. 프라하 등지의 호텔에서 머물려 지내던 기록 중에 '을씨년스럽고, 지저분하며 오줌냄새가 코를 찌른다'는 부분을 읽는데 나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최영미가 <시대의 우울>을 펴내고, 그 뒤로 들리는 그녀의 행보에 관한 소식들은 조금은 나를 맥빠지게 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듯 더 이상의 진전없는 중얼거림이라고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을 모질게 폄하하기도 했다. 그녀의 지금이 어떻건, <시대의 우울>이 제본 상태가 좋은, 상당히 읽은 만한 책이라고 여기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