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조주은의 여성, 노동,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 민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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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자전적인 성장 소설 ‘안녕, 기요시코’라는 책에는 말을 심하게 더듬는 탓에 이지메의 대상이 되어버린 소년이 주인공이었다. 소설의 주요 포인트는 마음 속의 친구 '기요시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좀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내가 시선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은 왜 주인공 소년이 말을 더듬게 되었는가였다. 소년은 세살 때까지 직장일 때문에 바쁘신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살았던 것. 이것이 말을 더듬게 된 이유라고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소년이 기억하는 세 살 무렵의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잠에서 깼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굉장한 공포를 느꼈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충분히 암시가 되었다. 


스티븐 비덜프의 아들 키우는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도 남자 아이들이 산만하고 폭력적이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저학년 시절에 자기의 모델이 될 만한 -적어도 같은 성인 게 좋고-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는 요지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내 자식은 달라요’라는 생각은 고사하고, 남들 하는 것만큼도 못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한참 그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을  때 칼럼집이고, ‘기혼’, ‘어머니’의 정체성을 지닌 여성주의자의 입장에 입각해서 일상들을 성찰한 글들을 읽다. 이와 같은 책은 사실, 내가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에 직결되는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잘 읽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에 마음은 복잡하다.


나야 사회 운동-모든 사회 운동이 피해나 차별의 당사자가 직접 나서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어 시작되기도 한다. -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자가 말하는 여타의 이야기들은 항상 나의 생활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니깐.


이러니 저러니해도 내가 본 이 책의 결정적으로 빛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56~157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연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파편화되고 쪼개져서 서로에 대한 반목을 지속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을 부정해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모순된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통 크게 단결하지 못하는, 쩨쩨하기 짝이 없는 여성들의 ‘속성’ 때문인가?


여성들을 이분화하고 여성끼리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하는 이면에는 지배 권력의 가부장성이 숨어 있다. 성녀/창녀, 선녀/악녀라는 이분법 뒤에는 여성과 남성의 성욕을 다르게 규정하는 성 이중 규범과 성 산업이 숨어 있다. 전업주부와 취업주부 간 갈등에는 노동 시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방과 후) 보육 시설의 취약성 들이 감춰져 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저자는 여성의 적은 계급 사회의 불공정한 자원 배분이고, 성 차별주의적 의식과 제도이며, 거기서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p.46~47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여성이 '감정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사랑과 관련한 남녀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녀 차이는 식민지화된 여성들로부터 다양한 서비스를 얻으려는 남성 중심 권력의 산물일 뿐이다. 남녀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에까지 성별 분업이 나타난 것은 남성과 여성의 일상 활동이 점차 분리되고 기질이 양극화되는 산업화와 근대화 이후이다. (...) 근대 이후에 '과학(자연과학, 생물학 따위)'이라는 이름으로 강조된 성차는 남녀 간 불평등한 성 역할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p.51


2005년에도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육통계 연감을 발간하면서 '초등교 여교사 비율 사상 첫 70% 넘었다'라는 기사가 나가자 각계각층의 쓴소리가 줄을 이었다. 내용은 주로 "여성 교사가 대부분인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성 역할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힘들다"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는 남녀라는 두 성이 어느 집단이나 고르게 분포해야 한다는 관념 아래서 보면 언뜻 정당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우려들을 한 차원 더 나아가 헤아려보면, 남성과 여성에게는 각각에 걸맞은 역할과 정체성이 있다는 성 차별적인 전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p.76~77


한국 사회에서 이혼율이 높은 것은 건강가정기본법의 전제처럼 '경솔할 정도로 이혼을 너무 쉽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한 욕망과 기대를 인지하지 못한 채 '결혼을 너무 쉽게' 하는 데 원인이 있다.


p.118~119

혹시 당신은 신성해야 할 어머니가 속물 근성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어머니!”라고 외치며 영원한 향수의 대상으로만 그녀를 고착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착취의 메커니즘에 눈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찾는 어머니는 없다. 어머니를 찾지 마라. 어머니는 일하러 갔다. 어머니는 여행 갔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갔다.

어머니는 연애하러 갔다. 자신들의 욕망을 거세당하고, 경험을 풀어낼 언어를 찾지 못해 가위눌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살려내자.


p.121~122

아동 관련 서적들의 모든 전제, ‘어릴 때 결정된다’류의 이론들과 그것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그것이다. 몇 세 때 지능이 완성되고 몇 세 대 인격 형성이 마무리된다는 이론들은 결국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책임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전가시킨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면, 혹은 지나친 말썽쟁이가 된다면 그에 대한 일차적 원인은 어린 아이 시기에 잘 보살피며 적절한 자극과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간주되는 어머니에게로 돌려지게 되는 것이다.  (...)

이처럼 아동기 신화는 일터와 삶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정에 남게 된 중간 계급 여성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려 있다.


p.136

모순적이지만, 노동운동 진영도 ‘노동’에 대한 개념이 둔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환원되고, 여전히 자본가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일터에서의 노역, 공식적인 임금이 지불되는 일만이 노동으로 인정받는다. 임금 인상을 비롯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할 때 노래패 불러 노래 부르게 하고, 문화패 불러 춤과 공연을 시키며, 강사 불러 좋은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한다. 문화 일꾼들의 각종 공연이나 강사 노동자들의 강연은 노동자를 향한 ‘애정에 입각한 행위’로 한정된다. 이들 단체에 섭외받을 때는 해당 노동의 대가가 얼마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일할 때 자기 노동력의 대가인 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시작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p.142

지난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아내가 결혼했다>에는 일처다부를 실천하는 여주인공 인아가 등장한다. 직장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는 주인공인 인아는 축구경기 관람과 술 마시기라는 보통의 남성들 영역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통장이 10개가 넘을 만큼 돈 관리를 잘하고 집안일과 요리의 달인이다. 오죽하면 정리정돈이 특기일까? 여기에 더해 그녀는 남성을 만족시키는 섹스도 완벽해서 남성들이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두 남자와 결혼하여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은, 항간의 평가처럼 "가부장제의 종말을 보는 듯' 혹은 "일부일처제를 흔드는 기발한 상상력"이 전혀 아니라 두 남자에게 완벽하게 가사노동과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21세기판 남성 판타지다.



p.153

나 또한 몇 년 전 주체할 수 없는 상처로 비틀거리며 헤매고 있을 때 불교를 공부하는 여성주의자 동료로부터 다음과 같은 위로를 받은 적은 있다. "주은아, 물론 네가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거 알아. 그런데 사람들마다 반응은 다 다를 수 있어. 그 정도 상처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너만큼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또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넘어갈 만큼 덤덤한 사람도 있을 거야. 네 마음에 불이 났다면 일단 그 불을 끄는 데 집중해봐. 누가 불을 냈는지 방화범을 잡으러 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집은 새까많게 타버렸다는 거지. 일단 네 마음의 불을 끄는 데 집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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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꼭 보고픈데 아직 못봤습니다. 관련된 책 한번 읽기 시작할때 줄줄이 보려고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 손이 안닿네요.

icaru 2007-06-1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님 이후로 또 마음에 드는 필자를 발견한 기회였답니다~
현대 가족 이야기나 어케 수소문해서 읽어봐야 겠어요.

잉크냄새 2007-06-12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76~77 : 저랑 정반대의 사람들 이야기네요.^^
그나저나 쭈욱 읽어보니 새겨야할 글들이 많네요.

icaru 2007-06-1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잉 과장님..미혼인 이유는 결혼을 아주아주~ 심사숙고해서 하려 하기 때문이시란 거쥬?

humpty 2007-06-1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 가족, 지한테 있는 거 알고 있던감요? 한눈에 안 보이는 거 보니 어디 숨어 있는 거 같긴 한데, 있긴 있지라~

icaru 2007-06-1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쿠나~ 고거참 잘 됐다야!!!! (험프티 책은 곧 내 책이다 라는 위험한 도식 크크크)
근디, 어디 숨어있을꼬?

humpty 2007-07-1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대가족, 찾았어요!! 어느 가방 안에다가 넣어 놓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었다는...
책도 찾았겠다, 언제 함 전달을 해야겠구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