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75

우리가 고급 양식만 먹으며 일생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신을 환하게 하는 사치스러운(?) 지식만을 추구하며 평생을 소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활인으로 살기 위해 입시, 취직, 고시 공부를 해야만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157쪽

광장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는 놀랍게도 서두에서 특정 역사관의 주입이 아니라 " 역사적 사고력 함양"을 목표로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신정권 시기 노비 만적의 난을 사례로 들어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자. 우리도 20세기에 군부독재라는 이름의 무신정권을 겪었고, 그 나름 사회 전반의 동요가 있었으므로 과연 교과서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사고력을 키우는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적은 외쳤다. "무신 난이 일어난 이래로 고위 관리들 중에 천인 출신이 많아졌다. 장수와 재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교 역사 교과서 91페이지가 제공하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무신정변 후 신분 질서가 흔들리자 농민들과 천민들도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봉기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

이것은 보수적 역사 해석도 아니고, 진보적 역사 해석도 아니다. 다만 모순적인 역사 해석이다. 신분 상승과 신분 해방은 별개다.  신분 상승의 열망은 현존하는 신분 체제 내에서 자신이 신분의 사다리를 빨리 타고 오르겠다는 것이고, 신분 해방의 열망은 그 사다리 자체를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협잡을 통해서라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열망과 대학제도 자체를 개혁하겠다는 열망이 같지 않듯이. 청소년기부터 이러한 차이와 모순을 논하는 기회를 얻지 않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정상적인 토의민주주의를 구현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로 점철된 교과서로 주입식 교육을 받다보면, 대체로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생겨난다.

-모순을 판별할 능력이 없으므로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 “애국하는 마음으로 부정을 일삼았어요.” “음식이 너무 맛이 없으니 한 그릇 더 먹을게요.”

-어떤 모순도 참아내는 정신의 굳은살이 발달한다. 불의나 모순을 보면 일단 참는다. 그리고 그 굳은살로 현실의 뾰족한 모순을 밟고 나아가 서슴없이 부정을 저지른다. 영혼의 속살이 퇴화한 이들에게 도덕적 지탄을 하거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체질상 굳은살이 생기지 않는 이들은, 각종 불의와 헛소리에 대한 알레르기를 지병으로 갖게 된다. 이들은 상시적 분노 상태에 있다. 이들의 분노는 고독한 독백으로만 표현될 뿐, 함성이 되지 못한다. 이들의 고독에는 원인이 있다. 집권세력은 분노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지만, 그 분노를 제압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집단행동을 하는 데 드는 시간적, 금전적, 체력적, 정서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기 어렵게 사람들을 궁핍한 상태로 유지시킨다. 그러나 2016년 사람들은 이제 비열한 거리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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