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대중들이 생각한 인문학은 인문학자들의 생각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중들은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부에 와 닿는 인문학을 요구한다. 문화유산과 역사 인물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감하고, 일상의 삶에서 '재미와 유익', '감동과 느낌', '여유와 관조'를 얻으려 한다. 인문학은 그러한 콘텐츠를 갖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문학자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과 소통하는 자세과 필요하다. -8쪽
퇴계를 비롯한 유교의 지적 거장들이 추구한 함양(涵養)과 체찰(體察)의 삶, 혹은 성(誠)과 경(敬)의 공부 자세는 인간의 건전한 삶에 대한 희구와 염원의 표출이다. 그것을 유기적으로 고려하는 인간 사회와 우주의 색깔은 다양하다. 그것은 유교 사회가 지향한,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의식과 정신의 지시에 의해 드러난다. 이 중에서도 함양과 체찰의 공부, 그것이 걸어가려는 길은 '죽임'보다는 '살림'이요, '답답함'보다는 '시원함'이며, 이 땅 위의 '푸름'을 향해 삶의 약동을 구가할 수 있는 미학과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17쪽
그런데 요즘은 안타깝게도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 없다. 그저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만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차도만 있고, 인도가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기능과 기술만 중시하고,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다. 인간의 걸어가야 할 길을 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인간의 길을 회복하는 것이다. -58쪽
"추사와 그의 시대를 읽어 보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광기 어린 삶을 만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인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하고 공격해 죽이려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하고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저는 '추사와 그의 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104쪽
사의재에서 쓴 다산의 글은 그의 성정을 뚜렷이 드러낸다. 다산이 말하는 4가지 의로움이란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가리킨다.
사의재는 내가 강진에서 귀양가 살던 집이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음이 있거든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음이 있거든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음이 있으면 서둘러 멈춰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음이 있음이 있으면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했다. 마땅하다(宜)는 것은 의롭다(義)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어감을 생각하면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을 슬퍼하게 마련이러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란 것이다. -108쪽
서울이라는 말은 높이 올라간다는 뜻의 접두어 '솟'과 너른 들이라는 뜻의 '벌', 또는 울타리라는 뜻의 '울'이 합쳐진 말이다. -177쪽
강이나 하천이 지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재화와 문물, 문화의 Input과 Output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할 때이다. 즉, 두 요인의 균형이 상실되어 Output의 단순한 통로로서 존재할 때, 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은 상실된다. 고려.조선의 두 왕조 기간 동안 이 지역에 금강 일대의 세미(稅米)를 집적하는 조창(漕倉)이 설치된다. 이를 통해 이곳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이 중앙으로 보내졌다. 금강으로 상징되는, 하천과 강이 지니는 문명과 물질, 문화와 역사의 중심지 역할은 고려왕조가 성립된 10세기 이후부터 근대 20세기까지 상실된다. 특히, 일제는 군산항을 개항해 한반도에서 생산된 미곡을 일본에 대량으로 유출시켰다. 강과 하천이 지니는 이점을 상실한 채 Output의 단순한 통로로서 기능한 구체적인 예다. -244-245쪽
실존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 존재는, 항상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가? 저기 어제 내가 지나간 길이 있다. 그 길을 오늘 내가 지나왔다. 이길은 같은 길인가? 내가 늘 바라보는, 저기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는 정말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가? 저기 푸른 소나무는 항상 그 소나무일런가? 어쩌면 이런 물음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 대답은 이미 응답이 아닌 또 다른 물음이다. 내 존재의 길조차도 항상 흐늘거리며 바뀌었다 돌아오곤 하는데, 무슨 '항상' . '늘' . '그러함'이 있으랴! 인생무상(人生無常)! 그것은 부정정 시각의 허무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요, 진실이요, 자연이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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