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에서 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의 기준 중에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조물 유형, 건축적.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 항목은 마치 조선왕를을 일컫는 말처럼 딱 맞아떨어집니다. 조선왕릉은 1408년 조성된 태조대와의 건원릉을 비롯해 1926년 순종황제의 유릉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공간 구성과 석물 등이 갖고 있는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더욱이 한 조형물이 500년의 역사를 지나며 계속해서 보존된다는 것은 수백 층의 건물을 짓는 일보다 더 경이로운 일이 아닐까요?-14쪽
조선왕실은 42기의 능과 13기의 원 그리고 64기의 묘가 있습니다. 영릉, 광해군묘, 그리고 영회원의 예를 통해 무덤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영릉은 세종과 그의 부인인 소현왕후의 무덤이죠. 이렇게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왕위에서 쫓겨나 일반 왕자(군)이 신분으로 강등된 인물들의 무덤은 '묘'라고 합니다. 광해군은 임금 재위 시절에는 주상전하라고 불렸겠지만 반정으로 인해 쫓겨나 광해군(임금이 되기 전에 불리던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그의 무덤 역시 능이 아닌 묘가 되어 광해군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왕의 자손들(대군 또는 공주, 옹주)이나 후궁들의 무덤도 이처럼 묘를 붙이게 됩니다. 영회원은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왕세자였던 소현세자의 세자비 강씨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소현세자는 다음 왕위를 물려 받을 왕세자였지만 왕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이처럼 왕이 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뜬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을 '원'이라고 합니다.(소현세자의 묘는 '소경원') -33-34쪽
정종의 능인 후릉은 개성에 있습니다. 왕릉의 위치만으로도 조선왕조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왕릉은 도성(한양)으로부터 80리 안에 조성해야 한다는 국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은 개성으로 정해집니다. 게다가 늘 관리가 되어오던 다른 왕릉에 비해 마치 후손 없는 무연고 묘처럼 후릉의 상태는 오랜 세월 방치한 처량한 느낌마저 줍니다. 후릉은 봉분을 둘러싼 곡장이 이미 파손되었고 뒤의 병풍석도 없습니다. 마치 힘없는 허수아비 왕 정종의 정치 인생처럼 말이죠. 하지만 정종은 시대의 흐름을 아는 동생 이방원보다 한 수 위의 정치가였는지 모릅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 남은 생을 가족들과 함께 편하게 즐기다 승하하셨으니 말이죠.-82-83쪽
선조는 조선이 개국되고 첫 후궁 소생의 임금으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처럼 자신은 왕이 아니지만 아들이 왕이 되어 신분이 상승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대원군이라 부릅니다.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던 덕흥군은 아들(선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역시 조선 최초의 대원군 지위를 받아 덕흥대원군이라 불리게 됩니다. -182쪽
숙종은 이렇게 철저하게 신하들의 정치적 대결을 이용해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한 편을 들어주지 않고 왕권의 힘을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심지어 사적인 왕비 책봉에서도 이런 환국정치를 이용했으니 말이죠. 재위기간 45년 동안 이런 왕권 강화에 힘입어 숙종은 국방, 외교 등 많은 업적을 쌓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숙종의 치세 중 하나가 역사 바로잡기입니다. 숙종은 비운의 왕 노산군을 복위해 단종이라는 묘호를 종묘에 올렸으며, 억울하게 서인으로 강등된 후 시아버지 인조에게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빈 역시 복위시켜주었습니다. -228-229쪽
유릉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일제 36년의 치욕과 그 책임을 유릉의 주인공 순종황제에게 떠넘기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치욕의 역사도 분명한 역사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한 건 치욕의 역사를 살펴 그 치욕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의 마지막 왕릉, 유릉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8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