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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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라, 이라부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세이지의 인생은 고슴도치 그 자체였다. 열두 살 때부터 어깨에 힘을 넣고 다니기 시작했고, 이날 이때까지 상대를 위협하며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정학을 먹어 더 이상 나팔바지를 입고 활개 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지금도 기성복 양복에 카롤러(도요타의 인기 차종)를 타면 똑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하기야, 야쿠자는 모두 그렇다. 자기뿐만이 아니다. -31쪽

"중요한 건 훈련입니다. 지상 5센티미터 높이에서 건너는 평균대를 지상 10미터에서도 건널 수 있느냐, 그게 일반 사람과 서커스 단원의 차이니까 넘어서야 할 건 기술이라기보다 오히려 공포감이라고 해야겠죠."-79쪽

뻔뻔스러운 인간은 그 뻔뻔스러움을 주위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게 만듦으로써, 점점 더 뻔뻔스럽게 변해간다. -151쪽

자유라는 건 분명 자기 손으로 붙잡는 것이다. -162쪽

"선생님, 자꾸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강박증 치료도 생각 좀 해보세요."
"맞다, 그렇지." 머리를 긁적거린다. "구토증하고 근본 원인은 같으니까, 다른 걸로 분출해버리면 좋을 거 같은데."
"다른 거요?"
"정작 토해내야 할 감정들을 쌓아두고 있으니까, 위 속에 든 음식이 대신 나와버리는 거잖아. 강박증도 그 연장선상이지. 한밤중에 베란다에 서서 허공에 대고 다른 사람 욕이라도 실컷 떠들어보면 어떨까?"-273-274쪽

인간의 보물은 말이다. 한순간에 사람을 다시 일으켜주는 게 말이다. 그런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 신에게 감사하자.-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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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구판절판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저는 이게 글의 힘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사랑이 먼저라는 이야기인데요. 사랑이 먼저 존재했는데 이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사람의 몸이 만들어졌다는 거죠. 정말 아름다운 시선 아닙니까? 지금 말씀 드린 것들은 [광장]속의 단 몇 구절일 뿐입니다. -31-32쪽

만약 우리나라에 수박이라는 게 없어서 어느 날 수박이라는 걸 처음 수입해 나눴줬다고 칩시다. 생전 처음 수박이라는 걸 본 거죠. 그럼 김훈이 보듯이 볼 겁니다. 동그란 녹색에 검은 줄은 뭐지? 그 속의 빨간색은? 그 씨앗은? 달콤한 맛은? 이렇게 되는 거죠. 결핍의 결핍. 너무 낯이 익어서 볼 수 없는 겁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통해 "그에게 두려웠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90쪽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116쪽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연인과 같이 가면 "와, 좋다. 예쁘다'할 거예요. 그리고 금방 상대를 보느라 호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하지만 헤어지고 혼자 가서 보면 호수가 보일 거고 또 얼마나 휑하겠어요. 평소엔 잘 안 보이다가 헤어지고 가면 감정이입이 되면서 텅 빈 호수가 훨씬 더 잘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어느 때보다 호수가 강력하게 인상에 남는 순간은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라는 얘기입니다. -151쪽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의 욕망으로 채워넣고, 제멋대로 실망하곤 다툴 필요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육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영혼은 기쁨으로 넘치지 않아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들떠 걷다가 전화가 와서 통화를 시작하면, 갑자기 풍경이 싹 없어져요. 풍경을 향하고 있던 시선에, 정신에 셔터가 탁 내려가죠. 육신과 영혼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배가 고프거나 화장실이 급하면 아무 풍경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빨리 뛰어가서 육신의 고통을 해결해야겠죠. 그래서 육신이 만족을 해야 영혼은 기쁨으로 넘치게 되는 거라고 조르바는 말했던 것이고요. 그는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200-201쪽

보이는 거짓과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이 책읠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키치'라는 단어와 맞물려 있어요.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장'을 위해 '편집'을 필요로 합니다. 키치적이에요. 그래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투쟁, 슬로건 또한 키치적이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정치 선동자들의 특징은 '그래야만 한다'를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는 거예요. 흔들리는 사람은 선동가가 될 수 없어요.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만 우리 민족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키치는 편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잘라서 편집하는 게 바로 키치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광고는 아주 키치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편집이에요. 편집이 없을 수 없죠. -260쪽

호학심사 심기지의好學深思 心知其意.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짜증을 낼 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냐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십 대라 좋겠다, 영어도 잘하고 부럽다, 잘 생겨서 좋겠다, 돈 많아서 좋겠다. 다 좋겠다예요. 그런데 어쩌겠다는 겁니까. 나를 바꿀 수는 없어요. 행복을 선택하지 않은 거죠.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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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싱 체험심리치료 - 내 마음의 지혜와 선물
주은선 지음 / 학지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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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들린 교수는 문제나 이슈를 항상 총체적이고 전체적으로 보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족적, 문화적, 맥락적, 발달적 측면에서 내담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나는 젠들린 교수를 통해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은 문제를 문제 그 자체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해 주었고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네가 그랬구나......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네가 갈등을 느끼는 것은 성장과정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이다."-16쪽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자신의 감정과 본연의 모습을 얼마나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왜 우리는 '나됨'은 없이 '역할 속의 나'에 더 충실해야 하는가?-29-30쪽

로저스는 "인간은 결국 각각의 섬이다."라고 하였다.(주은선 역, 2009). 다시 말해, 인간은 각각의 섬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 있고 저 사람은 저기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섬과 섬이 만나려면 결국 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다. 섬이라는 자각을 못하면 내가 거기에 침범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이는 소유와 관련된 것으로서 경계선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섬이라고 자각하면 차근차근 다리를 놓고 서로를 만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 된다. 일방적으로 다리를 놓는 것도 아니다. 다리를 놓을 만큼 섬이 건강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섬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진다. 이는 곧 관계로 정립될 수 있다. 부부, 부모 자식 모두는 다 각각의 섬일 뿐이다. 다 함께 하나의 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각의 섬에 있는 것이다. -42쪽

포커싱(focusing)은 자기 인식(self-awareness)과 정서적 치유(emotional healing)를 위해 몸에 집중하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과정이다. 즉,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특정한 문제와 연결된 느낌, 또는 '감각느낌(felt sense)'에 초점을 맞추어 특별한 느낌의 신체 자각과 접촉하는 과정을 말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신체적인 반응에 집중하면 이 느낌을 체험할 수 있고, 그곳에 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주은선, 1998).-49쪽

한 가지 문제에는 다양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감정은 포커싱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변화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문제와 관련된 본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수많은 다양한 감정 중에서 변화하고 있는 감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 -152쪽

경청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진술을 해 주거나 포커서가 말하는 것을 반영해 말하는 것이다. 포커서가 "난 슬퍼"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래, 너 슬프구나."라는 식으로 이야기해 준다. 포커서가 "목 안에 단단함이 느껴져."라고 말하면 "아, 네 목에 단단한 것이 느껴지는구나."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요컨대, 포커서가 들을 필요가 있는 말들과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해 주는 것이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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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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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를 "자본. 생산. 시장의 전지구적 통합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기업 수익성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과정"으로 보는 월든 벨로는 세계화의 전위대 노릇을 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를 강하게 비판한다. 벨로가 이 경제기구들을 비판하는 핵심은 강대국의 입김에 따라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비민주성에 있다. 벨로는 세계화의 대안으로 탈세계화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국제경제에서 발을 빼자는 뜻이 아니다. "수출을 위한 생산을 강조하는 데서 벗어나 지역시장을 위한 생산이 되도록 경제의 방향을 재설정하자"는 얘기다. 또한 "탈세계화는 시장논리 및 비용 효율성 추구를 안전. 평등. 사회연대라는 가치에 의식적으로 종속시키는 접근방식"이다.-29쪽

소설가 김성동의 말처럼 "최성각은 사상가"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시대에 한 점 등불 든 생명사상가"다. 서평집에서 그의 통찰과 혜안은 빛난다. "훌륭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대개 긴 무기력의 시간과 짧은 저항의 순간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아주 가끔씩 아름답고 눈부신 저항이 일어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순치되어 불쌍하고 애처롭게 자신의 삶이 노예의 삶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는 게 사실이다."
"사람이란 토론에 의해 자기 생각이 수정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자기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TV토론이 아니라도 사람 사이에 정말 멋진 토론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인간의 한계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58-59쪽

[범인이 진실을 자백하게 하는 방법]에 인용한 저널리스트 히가키다카시가 '가해자의 동기 운운하는 것이 피해자를 기만할 수 있다'고 논한 부분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나는 범죄의 '동기'에 관심이 없지는 않지만, 그 실재를 믿지는 않습니다. '열 받아서 죽였다. 미움을 누를 수가 없었다. 목돈이 필요해서 자식에게 보험금을 걸었다. 잠결에 똥을 쌌다.' 동기와 결과의 인과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이보다 몇십만 배나 되는 확률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났지만 죽이지 않았다. 미움은 누룰 수 없었지만 범죄로 치닫지는 않았다. 돈을 위해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 똥을 싸고 잤다.' 가해자가 말하는 동기를 곧이들으면, 이미 피해자가 절명해 반론할 수 없는 유족은 크나큰 타격을 입을 뿐입니다. 그들의 말하는 동기란 대개 범죄자의 자기변호이기 때문입니다."-63쪽

[논어]에 나오는 '애인'의 다른 용례를 예로 들면서, 사람을 가리키는 두 종류의 개념과 만난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애인이라고 할 때의 '인'이고, 다른 하나는 사민이라고 할 때의 '민'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인'과 '민'은 정치적 위계가 다른 계급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것이다." 공자의 핵심개념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지배층 내부에 한정된 특수한 형태의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예 또한 그러하여 "예란 지배계층 내부의 품위 있는 행동 규범 일반을 가리킨다." 강신주는 철학자답게 개념의 정립이 뛰어나다.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라는 타자의 철학적 의미는, 내가 그간 듣고 봐온 풀이 중에서 가장 와 닿는다. -131쪽

"왜 학교는 우리에게 사고하고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사람이 왜 사는가. 삶은 또 어떤 가치가 있는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무엇인가. 왜 학교는 우리에게 남보다 앞서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어떻게 내재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나눌 것인가를 가르쳐주지 않는가."-176쪽

파스칼 레네는 반어적이고 대조적이며 역설적인 표현을 곧잘 쓴다. "사실상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기대한 것과 너무나 가까웠지만, 그가 보고자 하는 것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우리의 요즘 세태에 적용하면 확대해석하는 것일까? -191쪽

"'배움의 공동체'를 요구하는 학교 개혁이란 학교를 아이들이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만들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교육전문가로서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만드는 개혁"을 가리킨다. 또한 이 '배움의 공동체'에는 학생과 교사 외에 학부모, 시민, 교육 관료도 참여한다. -247쪽

"결혼 이외의 대안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독신 여성들이 결혼하면 여러 면에서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대답하는 반면, 기혼 여성들은 독신이 된다면 대부분의 면에서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264쪽

외국어는 못 알아들어도 외국 사람의 몸짓과 목소리의 톤은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언어는 디지털이고, 몸짓과 준언어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이 관계에 관한 말로 우리의 자세와 태도를 번역하여 해석하기 시작하면 매우 불편해진다. 우리는 이런 주제에 관한 우리의 메시지들이 아날로그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불수의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관계에 관한 메시지를 가장할 수 있는 자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310-311쪽

나치즘에 대한 프롬의 동시대적 고찰(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1941년에 썼다)은 의외로 현재적인 의미가 풍부하다. 예컨대 '정보의 강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보라!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실제의 지식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한다는 슬픈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산발적이며 서로 상관없는 사실들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된다.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는 사실을 보다 많이 주입받기 위해 소비되어 거의 생각할 틈조차 없다. 분명히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구적이다. 그러나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사고에 장애가 된다."-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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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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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수수께끼로 우리 안의 탐정을 자극한다. 두 남녀 중 거짓말을 한 쪽은 누구일까? 남성 작가 줄리언 반즈는 미술관에서 [거짓말]의 유화판을 처음 봤을 때 무심코 여자가 거짓말쨍이라고 인식했다고 2007년 [가디언]지 칼럼에 썼다. 여자가 속삭이는 모양새인데다가, 남자의 표정과 다리 포즈가 꾸밈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여인의 유난히 풍만한 실루엣을 보고 "배 속의 아기는 당신 아이에요"라는 대사까지 상상했다고 한다. 남여의 차이일까? 여인의 자세에서 전폭적인 신뢰를, 남자의 얼굴에서 유혹자의 득의양양함을 읽고 반대 결론에 이르렀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야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이 따로 없지 않는가. 피해망상을 거두고 다시 그림을 본다. 마침 프랑스어 사전이 'mensonge', 즉 거짓말이란 이 단어는 '착각'도 의미한다고 가르쳐준다. 그러니 줄리언 반즈와 나는 다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사랑할 때 상대를 나를, 인간을 신으로, 기도를 율법으로 착각한다. -110-111쪽

잊기 위해 마시고, 기념하기 위해 마신다. 스스로를 치하하려 마시고, 벌하려고 마신다.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마시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어서 마신다. 우리는 수천의 핑계를 싸들고 술에 투항한다. 술은 행복과 불행, 섹시함과 분노를 모두 부풀리기에, 아주 잠시나마 삶이 꽉 차 있는 듯한 감각을 준다. -155쪽

타인의 몸이 아주 가까워져 마침내 나와 그의 거리가 제로, 나아가 마이너스가 될 때 인간의 육체는 홀연 하나의 장소로 변모한다. 자건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코를 묻은 아빠의 등은 너른 평야이고, 최적의 자세로 포옹한 연인에게 서로의 품은 경건한 성당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입부에서 거대한 사막의 능선을 보여주는데, 잠시 후 변화한 카메라 앵글은 그 풍경이 여인의 벗은 몸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극접사로 더듬는 이의 시각과 촉각에 감각된 연인의 겨드랑이는 그 어떤 바다보다 완벽한 곡선을 지닌 만灣이며, 쇄골에 패인 웅덩이는 애틋한 해협이다. 타인의 육체만이 아니다.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159-160쪽

닿을락 말락한 [대성당]의 두 손은, 남은 생을 공유하기로 결단한 연인에게 선사할 만한 이미지다. 타인과 손바닥 전체를 깊이 맞대면 처음에는 흡족해도 시간이 갈수록 상대의 촉감이 둔해지고 결국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심지어는 땀이 배어 불쾌해질 때도 올 것이다. 손을 잡는 행위로 구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결혼을 통해 서로의 몸과 영혼을 구석구석 탐사한 다음, 노년에 이르면 다시 가볍게 손을 잡고 산책하게 되리라.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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