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저는 이게 글의 힘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사랑이 먼저라는 이야기인데요. 사랑이 먼저 존재했는데 이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사람의 몸이 만들어졌다는 거죠. 정말 아름다운 시선 아닙니까? 지금 말씀 드린 것들은 [광장]속의 단 몇 구절일 뿐입니다. -31-32쪽
만약 우리나라에 수박이라는 게 없어서 어느 날 수박이라는 걸 처음 수입해 나눴줬다고 칩시다. 생전 처음 수박이라는 걸 본 거죠. 그럼 김훈이 보듯이 볼 겁니다. 동그란 녹색에 검은 줄은 뭐지? 그 속의 빨간색은? 그 씨앗은? 달콤한 맛은? 이렇게 되는 거죠. 결핍의 결핍. 너무 낯이 익어서 볼 수 없는 겁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통해 "그에게 두려웠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90쪽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116쪽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연인과 같이 가면 "와, 좋다. 예쁘다'할 거예요. 그리고 금방 상대를 보느라 호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하지만 헤어지고 혼자 가서 보면 호수가 보일 거고 또 얼마나 휑하겠어요. 평소엔 잘 안 보이다가 헤어지고 가면 감정이입이 되면서 텅 빈 호수가 훨씬 더 잘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어느 때보다 호수가 강력하게 인상에 남는 순간은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라는 얘기입니다. -151쪽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의 욕망으로 채워넣고, 제멋대로 실망하곤 다툴 필요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육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영혼은 기쁨으로 넘치지 않아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들떠 걷다가 전화가 와서 통화를 시작하면, 갑자기 풍경이 싹 없어져요. 풍경을 향하고 있던 시선에, 정신에 셔터가 탁 내려가죠. 육신과 영혼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배가 고프거나 화장실이 급하면 아무 풍경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빨리 뛰어가서 육신의 고통을 해결해야겠죠. 그래서 육신이 만족을 해야 영혼은 기쁨으로 넘치게 되는 거라고 조르바는 말했던 것이고요. 그는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200-201쪽
보이는 거짓과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이 책읠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키치'라는 단어와 맞물려 있어요.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장'을 위해 '편집'을 필요로 합니다. 키치적이에요. 그래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투쟁, 슬로건 또한 키치적이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정치 선동자들의 특징은 '그래야만 한다'를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는 거예요. 흔들리는 사람은 선동가가 될 수 없어요.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만 우리 민족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키치는 편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잘라서 편집하는 게 바로 키치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광고는 아주 키치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편집이에요. 편집이 없을 수 없죠. -260쪽
호학심사 심기지의好學深思 心知其意.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짜증을 낼 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냐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십 대라 좋겠다, 영어도 잘하고 부럽다, 잘 생겨서 좋겠다, 돈 많아서 좋겠다. 다 좋겠다예요. 그런데 어쩌겠다는 겁니까. 나를 바꿀 수는 없어요. 행복을 선택하지 않은 거죠.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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