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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내게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작가였다. 제대로 읽어보기 전에 얻어들은 것들로 이미 선입견과 편견이 자리잡고 있는 작가.
자살로 마감한 작가가 어디 버지니아 울프뿐이냐마는 그녀의 명특하면서도 우울한 성향은 내게 '이런 소설 피해야돼.'라는 자기 방어 본능까지 발동시켜 지금까지 그녀를 제대로 알아볼 기회를 안주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이 작품 <등대로> 을 읽어볼 것을 강력 추천하였다. 이제까지 읽던 소설이 동네 맛집이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이 작품은 파인 다이닝이라는 것이다.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1882년 런던 출생 (음, 우리 나라에선 고종 임금때.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로구나. )
<등대로>는 그녀가 44세때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자전적 내용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을 누구로 봐야하는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 같고, 주제 또한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선 등장인물들을 보면, 램지씨와 램지 부인, 그리고 여덟명의 자녀가 영국 스코틀랜드 해안의 한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집에는 램지 가족 외에도 화가 지망생인 릴리 브리스코, 시를 쓰는 카마이클, 시니컬한 성격의 주인공이며 학문을 연구 중인 찰스 탠슬리, 점잖은 뱅크스씨 등이 함께 지내고 있다. 램지는 철학자로서 분별력 있고 공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램지 부인은 아름답고 기품있으며 고적하고 초연한 성격으로, 가족들을 매우 신경써서 돌보고 가족들 외에 집에 함께 머무는 친구들까지, 잘 어울리고 편히 지내도록 조율하려고 애쓴다. 이런 램지 부인을 관찰하며 흠모하는 릴리 브리스코는 33살의 노처녀로, 주위의 인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며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 관해, 자기의 그림에 관해 생각한다.
줄거리 속에는 별 사건이 없다. 어느 날 큰 아들 제임스가 별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등대에 가보고 싶다고 하고, 아버지인 램지 씨는 내일 날씨가 안 좋아 불가능하다고 단번에 거절한다. 그 자리에서 램지 부인은 가만히 있었지만 제임스가 상심했을까봐 마음을 쓰며 남편에게 불쾌해한다.
이 별장에 머무는 이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사회, 문화, 책, 예술, 철학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일상적인 시간들을 기술하며 작가는 실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더 이상 섬세할 수 없게, 버니지아 울프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쓸 수 있으랴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겨우 몇개 예문을 인용하는게 의미 없을 정도로.
작가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각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그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그것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설명해주고 있는데, 특히 한 등장인물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인물은 바로 별장의 안주인 램지 부인이 아니고 여기 손님으로 와 있는 릴리라고 생각된다. 릴리가 보기에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램지 부인을 주의깊게 관찰하는데 램지 부인의 말, 행동,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 거의 모든 구석구석을 분석하고 그녀가 자기에게 해준 말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릴리가 그리는 그림의 의미, 어떻게 진행시킬까,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며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설에 보면 램지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엄마를, 램지는 아버지를 반영하였다고 하고, 버지니아 울프 자신은 릴리라는 인물 속에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고 나와있었다.
아마 그래서 10년 후에 폐허가 된 별장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램지 부인이 아닌 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릴리가 고민하던 그림의 마지막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이 되었는지도.
알아주는 철학자로서 공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자신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하는 램지, 그리고 그런 욕구를 존경심을 가지고 채워주는 램지 부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보다 주위 사람의 만족을 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는 것을 본분으로 안다. 결혼한 여자의 본분이 그랬었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도 자기의 삶을 뒤돌아 보며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소모되기만 하는 것인가 라고.
그녀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 작은 시간 조각들이 그녀가 살아온 오십 년 세월을 눈앞에 드러냈다. 삶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삶. 삶이라. 그녀는 생각했지만,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녀는 삶을 바라보았다. 아이들과도, 남편과도 나누지 않은 실재하는 어떤 것, 은밀한 어떤 것이 있음을 분명히 느꼈으니까. 한쪽 편에 놓인 그녀와 다른 쪽에 있는 삶 사이에서 일종의 거래가 진행되었고, 삶이 그녀를 이기려고 했듯이 그녀도 늘 삶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 이따금 그녀는 (혼자 앉아 있을 때) 삶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98)
여길 보면 마치 삶이 그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말없이 있는 것, 홀로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가 팽창하면서 반짝이고 시끌벅적하다가 흩어져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엄숙함을 느끼며 오그라들어 본연의 자신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쐐기 모양 어둠의 응어리가 된다.
밀착되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이 자아는 더없이 자유롭게 기이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삶이 잠시 침잠할 때, 경험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 보였다.
모두들 제각기 자신의 환영,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겉모습들이 유치할 따름이라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 환영의 밑바닥은 온통 어둡고,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포착할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이따금 표면으로 솟구치는 것이 남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103)
램지 부인이 삶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버지니아 울프 특유의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보다 이렇게 혼자 앉아 있을 때 삶을 생각하고 극복하려하고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나의 삶은 확실히 같지 않음을, 램지 부인의 이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남이 보는 나의 모습으로 나를 규정하려는 행위는 얼마나 우스운가.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은 권위적이고 수용하지 않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램지 부인은 이들의 사이가 서로 이해 가능 하도록 교섭해주는 것을 자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여긴다.
10년 후. 램지 가족 내에도 변화가 생겼고, 램지 가족 일부와 릴리, 카마이클 등이 별장에 돌아오고, 10년 전 그 날과 달리 배를 타고 등대에 가보자고 램지가 제안하고 제임스 (아들)과 켐 (딸)은 아버지의 제안이 내키지 않지만 할 수없이 동행한다. 날씨가 좋지 않음에도 그들은 등대로 향한다.
그들이 잘 도착했는지, 별장에 남아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던 릴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그림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야할지 발견한다.
이 책의 큰 줄거리는 이뿐이다.
이 책 <등대로>는 소설이긴 하지만 작가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있는 중수필의 느낌도 난다.
그녀는 왜 이 작품을 썼을까. 무슨 얘기를 꼭 하고 싶어 단순한 서사 속에 이렇게 섬세하고 아슬아슬하기까지한 심리를, 보통 사람의 다섯 배쯤 되는 민감도와 구체성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등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읽는 사람 대부분 한번씩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 같다.
그 의미라는게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 해도 사람마다 다를것이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을 두고 달라졌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것.
릴리가 이제 이세상에 없는 램지 부인을 생각하며 세상 사람들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눈물로 대신하고 혼잣말로 삼킨, 다음의 말처럼 그녀의 심정이 되어 본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암기할 순 없을까요? 안내자도, 피난처도 없고, 그저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고, 높은 뾰족탑에서 허공으로 뛰어드는 것에 불과할까요? (292)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까지 알고 싶었나 보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작가의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자기의 심연을, 이렇게 느끼고 말하고 살도록 만든 근원을, 바닥에서 부터 헤쳐 올려보고 싶었나보다.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헤쳐 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그녀의 화법은 어둡고, 모호하고, 독백과 같을 수 밖에.
그녀는 아마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정신분석 주치의로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만의 독특한 처방전을 써내려 갔고,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아니 괴롭게 읽어내려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