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일어 시간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평점 :
화가를 모델로 한 소설 하면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검색해보니 그 외에도 몇 작품이 있지만 내가 읽은 것은 <달과 6펜스>가 유일하고 이제 한권 추가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를 모델로 한 바로 이 소설 <독일어 시간>이다.
그걸 알고 집어든 책이고, 내용이 난해하거나, 지루하지도 않은데 왜 그리 읽는데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결국 끝냈다.
1,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알라딘에서 리뷰 올릴땐 리뷰 한편당 두 권 선택이 안되니 1권만 읽은 것 처럼 올라가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것.
화자가 되는 것은 '지기'라는 이름의 아이.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저자와 이름이 같다.
소년 감화원의 독일어 작문 시간에 백지로 제출한 벌로 혼자 독방에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 소년 '지기 예프젠'. 그가 작문 노트를 백지로 제출한 이유는 '의무의 기쁨'이라는 제목에 합당한 추억들을 불러들이느라 시간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년 '지기'가 떠올린 추억은 어떤 추억일까? 그 추억이 결국 이 소설의 내용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기 맡은 임무는 외딴 집에 고립되어 있는 화가 난센의 거동을 살피는 일이었다. 지기는 이웃 화가 난센의 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동시에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데만 열의를 보이는 아버지를 지켜본다. 여기서 화가는 짐작하다시피 소설의 모델이 된 에밀 놀데이다. 아버지라는 인물이 맹목적인 복종심으로 관철된 의무감으로 사는 사람을 나타낸다면 화가 난센은 역시 독일인이지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체제에 반항할 줄 아는 자를 나타낸다. 서로 대립되는 입장이지만 둘 다 당시 독일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소년 지기는 둘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목격하는 자이다.
화가는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하는 소년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림을 보는 법을 가르친다.
본다는 것은 뚫고 들어가 증대시키는 거야. 또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지. 너다워지기 위해서는 항시,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너 자신을 찾아내야 해. 발견되는 것은 사실화되는 거야.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너 자신도 동시에 바라보는 거야. 네 시선이 다시 네게로 되돌아오는거지. (131쪽)
11살 소년이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느꼈을 것이다.
창작 금지의 감시라는 아버지의 의무에 대해 소년 지기는 화가의 그림이 압수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화가의 그림을 몰래 빼돌려 자기만 아는 장소에 보관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중엔 화가의 그림을 훔친 것으로 되어 소년원에 송치되고, 그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해 소년원 원장과 심리학자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지기는 대답한다.
'그림들을, 제 아버지가 찾아다니는 그림들을 안전한 곳에 옮겨놓은 것 때문이지요. 그것뿐입니다.'
환각적 방어반응이니, 전향적 공격성이니, 생소한 용어로 그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심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이곳에 보낸 겁니다. 소년들을 말예요. 옳지 않은 양심들을 배에 실어 이곳에 날라놓는 것입니다.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밥을 먹고 밤에는 그로그주를 홀짝거릴 수 있겠지요.'
소년 지기를 통해서 작가는 독일인의 마지막 양심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일인에게도 그런 양심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1926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17세때 해군으로 징집되어 참전, 탈영하였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작가는 후에 대학에서 영문학, 철학을 공부하고 기자 생활을 거쳐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42세때 발표한 <독일어 시간>은 출간되자 마자 독일에서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발판이 되어 1999년엔 괴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4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그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은 소년의 눈을 통해 나치 시대를 본다는 점에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도 비교되는데 양철북의 경우 좀더 풍자, 환상적이라면 지그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은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핵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실제로 지그프리트 렌츠와 귄터 그라스 둘다 문학 그룹 47의 멤버로서 전후 독일의 도덕 재건과 문학적 현실참여를 목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느 해설을 봐도 흠잡을데 없이 완벽해보이는 이 작품을 읽는 속도가 기대만큼 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앞뒤로 너무 완벽하게 짜맞춘 듯하다는 감을 일찌감치 잡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