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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읽을것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어린 시절, 읽고 또 읽던 열몇권 짜리 (오십권짜리 어린이 세계문학전집 말고) 세계 전래 동화집중 유독 이야기의 재미보다 신비감을 더 크게 남겨주었던 것은 일본 동화집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현실과 현실 아닌 곳을 왔다 갔다, 눈에 보이는 것과 상상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들이어서 다 읽고서도 갸우뚱, '이게 뭐지?' 하는 여운을 남겼던 기억이 있다. 기이하기도 하고 약간 무섭기도 하고, 확실히 우리 나라 전래 동화와는 달랐고 나머지 다른 어느 나라의 이야기와도 다른 분위기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그나마 몇권 읽은 것들에서 받은 느낌은 어릴 때 기억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이야기에 귀신이 자주 등장하고, 귀신의 출현이 일회성 출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생활에 스스럼없이 침투하여 살아있는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한 경우까지 자주 나오는 것이,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에 편향된 독서를 해오던 나에게는 여전히 일본 소설은 일본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 책을 읽자고 고르면서, '막연한 불안'이 이유라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그 막연한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었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 대부분이 단편인데 이 책에는 열 네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소세키의 극찬을 받았다는 '코'는 한 스님의 신체부위 코가 특이하게 큰 것을 소재로 하였다. 남의 눈을 기준으로 나를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스님을 대상으로 한 것은 종교인이나 수도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부질없는 희비극 끝에 도달하는 곳은 결국 허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마죽'.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 (인생의 욕망)이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어느 날 해 질 녘이었다. 하인 하나가 라쇼몬 아래서 비를 긋고 있었다.
널따란 문 아래에는 이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군데군데 붉은 칠이 벗겨진 커다란 원주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라쇼몬 (羅生門)'은 원래 헤이안 시대 수도 교토의 성문을 말한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해 쓰고 있다. 재해와 기근으로 폐허가 된 교토의 성문 (라쇼몬) 위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노인을 마주친, 갈 곳 없는 하인이 나온다. 도둑질 아니면 굶어 죽음 앞에서 그의 선택은 고민의 여지가 없다. 굳이 사고가 필요없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역동적이고 회화적 묘사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묘한 이야기'는 전쟁에 파병된 남편을 기다림과 동시에 다른 남자와 밀회 약속을 하면서 신경증을 보이는 지에코의 이야기이다. 그녀 앞에 출현했던 빨간 모자의 정체는 그녀의 양심일지도 모른다.
우울의 시작은 이렇게 소소한 것일 수 있지만 결과는 끝도 없이 부풀려 질 수 있다는 '다네코의 우울', 내 아기 잃은 것이 다른 아기 잃은 엄마를 보고 위로가 될 일인가? 과장된 것은 아닐지 공감이 쉽게 되지 않던 '엄마'. 모든 엄마에게 아기는 다른 대상이나 재산을 얻고 잃는 것과는 다른데 말이다.
꿈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그동안 읽었던 일본 소설을 구별짓는 특징 중 하나였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창작 과정에 따르는 필요한 혼돈일지도 모른다. 제목처럼 글 전체가 꿈 얘기인 '꿈'. 그리고 '흙 한덩이'에서는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죽으면 흙 한덩이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되겠고, 며느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토록 움켜쥐고자 했던 욕망의 부질없음을 흙 한덩이라고 보았을 수도 있다.
죄인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지옥변'이라고 한다. 단편 '지옥변'에서는 창작의 고통을 참극으로 극대화하여 비유하였다. 딸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아비의 눈으로 보고 있어야 하는 참극이다. 이렇게 나온 창작의 결과물 앞에서그림을 그린이는 과연 만족할까. '아무리 하나의 예나 능에 뛰어나다한들 인간으로서 오상 (인의예지신)을 못가린다면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라는 짧은 인용문이 나온다. '거미줄'에서 거미줄은 신이 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상징한다. 보기엔 가늘지만 강도가 센 거미줄을 내려주지만 결국 이기적인 인간 본성은 자기손으로 그것을 끊어내고 만다는 비유가 뛰어나다. 연꽃의 아랑곳하지 않음은 변하지 않는 진리, 흔들리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는 설정까지도.
두자춘이라고 하는 사람이 도를 깨우쳐가는 과정을 그린 '두자춘'은 부귀영화의 삶을 누려본 후 마지막으로 그가 원하는 것은 인간답고 정직한 삶, 그에게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것은 산기슭의 집한채와 밭이었다.
'신들의 미소'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신부 (神父)가 일본의 전통 토속 신앙과 대립을 이루는 방식이 몽환적이면서 상징적으로 그려져있다. 꿈의 세계에서 현실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아쿠타가와의 주특기인지.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여러사람의 설명을 모아 놓은 형식의 '덤불속'은 또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죽은 사람에 대한 어느 누구의 말도 일치하는 사람이 없다. 더 많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한들 마찬가지일것 같다. 덤불속이란 제목은 어느 것이 진실인지 가려낼수 없는인간의 삶,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작품 '갓파'는 뜬금없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했다. 갓파라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 나오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과 신분에 해당하는 갓파의 이름들이 나온다. 차크는 의사, 배그는 어부, 토크는 시인, 래프는 학생, 이런 식. 여기까지만 해도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감이 올수도 있다. 인간의 신분과 계급에 대한 비판을 갓파라는 상상의 동물을 통해 쏟아 내겠다는 것이다. 특히 시인에 해당하는 '토크'라는 갓파를 통해서는 창작가로서의 작가의 고뇌를 집중적으로 묘사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을 썼던 해 1927년, 35세를 일기로 아쿠타가와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세상을 등졌다. 35세라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가 소재로 삼고 작품으로 남긴 다양한 세계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세계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불안한 정신 세계를 혼자서 머리속에 구축해왔을까 감히 짐작하게 한다.
막연한 불안이라는 말은 문학의 세계에서 생소한 말이 아닌 듯. 그는 더 살아남아서 그 불안을 다른 형태로 승화시킬 수는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