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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는 인간
정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되었던 작품 여덟편이 묶여져 있다.
처음 읽어보는 작가의 소설인데 기대했던 것 보다 다음 페이지로 주저없이 넘어가게 하는 재미가 있어서 술술 읽혔다.
1. 양장 제본서 전기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해준 작품이다.
도서관이 책을 빌려주고 보관하는 기능 뿐 아니라 개인의 기억을 추출해내 양장 제본서로 남기는 일을 해준다는 아이디어는 얼마전에 읽은, 마인드를 보관해주는 도서관을 소재로 한 김초엽의 <관내분실>을 떠올리게 한다. 의뢰자는 머물고자 하는 기억을 선택할 수 있고 도서관에서는 그것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영원히 보관해준다. 김초엽의 <관내분실>은 2018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있다.
2. 실수하는 인간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 같지만 그것이 회복불가능하고 운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다. 예측불허이다. 계획하여 일어나지 않을 일을 '실수'라고 정의한다면 주인공에게 실수하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겠지만 과연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실수의 근원마저 없었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어쩌면 계획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무의식, 양심, 상처의 결과를 우리는 그저 실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실수하는 인간, 즉 모든 인간 (everyman)이다.
3. 너를 닮은 사람
오싹하다. 어떤 형벌보다 무섭고 끈질긴 형벌은 자기 양심이라고 했던가.
문화원에서 독일어 강좌에 참여하게 된 계기로 처음 알게 된 이름이 같은 두 여자 클라인과 주인공. 더 어리고 작은 쪽을 클라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이차가 있음에도 서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어 친자매보다 가까워지지만 언제부터인가 피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관계가 되어 서로에게서 도망쳐 살게 된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주인공 여자 앞에 클라인을 닮은 사람으로 출현하는 사건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이 될 것이다. 클라인의 실제 생사에 상관없이.
너는 실재가 아니라 내게서 분열되어 나온 병리학적 인격체일지도 몰랐다. (112쪽)
우리의 삶을 잘 쪼개보면 때로 작품 속의 클라인이 되었다가 주인공이 되었다가 하지 않겠는가? 감히 내 인생을 쪼개보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소설가는 이런 일을 기꺼이 자청하는 사람인 것 같다.
4. 폐쇄되는 도시
폐쇄되는 대상은 도시인 것으로 시작하지만 읽다보면 정작 폐쇄되는 것은 가족의 의미, 세대간 이해임을 알게 된다. 폐쇄의 주체는 계산된 관계와 물질적 성공에 눈먼 인간들,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
5. 돌아오다
읽다가 오싹하게 하는 것은 이제 각오해야겠다. 무의식은 때로 의식이 못해내는 일을 한다.
이 세상 떠남을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돌아가기만 해야하나.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일까.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작품을 쓰고 제목을 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용은 제목에 매우 충실했다.
울지 마. 모두 지나간 일이잖아. 스무 살의 그녀는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오래전 가고 싶었던 길로 훌훌 떠났다가 잠시 이곳으로 돌아온 또 다른 나를 만난 것 같았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 그녀와 합체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과 미래를 맞지 않게 될 것 같았다. (168쪽)
6. 지나간 미래
작가는 유기시킨 인간과 유기된 인간을 끌어내어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을 마구 혼합시켜 놓았다. 모든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이고,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서 미래를 보고 미래에서 묻혔던 과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인공여자만의 특별한 능력은 아닐 것이다.
스토리는 재미있고 치밀한데, 이쯤 되면 정소현 작가 작품 속 인물들과 이야기의 패턴이 읽히려고 한다. 책 뒤 해설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바로 '유기된 인간'이 작품 속 인물들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패턴이 읽힌다는 것은 작가에겐 어쩌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있다. 매너리즘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경우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과거, 현재, 미래를 시간대로서만 끌어들이지만 않고 인물마저도 과거, 현재, 미래의 인물을 동시에 이야기 속에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엔 주인공 여자에게 남편의 친한 친구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 남자가 주인공 여자의 미래의 아들이며, 남자의 어머니라는 치매노인이 곧 주인공 여자의 미래 모습인 것이다. 근거 없는 중복으로 읽히지 않고 각 인물간 치환과 대치에 개연성을 부여한 치밀한 플롯은 작가의 능력이라고 인정한다.
7. 이곳에서 얼마나 먼
여기 실린 여덟 작품 중 가장 끔찍하다.
자매보다 더 친하게 지냈으나 연락이 끊긴 어릴 때 친구 제인을 찾아가는 시작은 평범하다. 자매도 아닌데 어떻게 한집에 살게 되었는지, 그러다 왜 관계가 끊겼는지, 제인의 존재가 어떻게 몇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지, 처절하고 음습한 내력이 밝혀진다.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거라는 주인공 여자의 예상과 달리 제인 역시 원망과 복수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며 쓸쓸히 살아 버티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가독성 있으나 너무 나레이션 식인게 흠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게 제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거지요. 제인은 아마도 내가 찾을 수 없는 먼 곳에서 조용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내 주위에 나타나 자신을 찾고 있는 나를 바라볼 겁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불길한 기운을 품고서 날선 눈으로 나를 엿볼 테지요. 나는 그녀에게 속죄하기 위해 불행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혼자 있는 밤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Y나 M같은 남자를 쉽게 사랑할 것이고 쉽게 버림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혼자 쓸쓸하게 늙어갈 것입니다. 그런다면 언젠가는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그때 그녀와 나눈 이야기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248쪽)
8. 빛나는 상처
나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식 날 실종되었다. (257쪽)
여기서도 주인공은 예전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찾아다닌다. 그 중 한 동네에서 우연히 시작된 한 남자와의 동거.
상처를 가진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가 상처라고 생각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서 점차 정상궤도의 삶으로 돌아올 준비를 갖추어 가는 반면 여자는 모든 기억과 상처를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진심은 그러고 싶어하지 않고 더욱 불안해져간다.
그의 과거에 대해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와 가까워졌다고 착각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면 내게 더 큰 것을 바라게 될 것이므로 골치가 아파질 게 분명했다. (272쪽)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에 대해 들을 때 주인공의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 없는지. 그럼에도 사람들은 남의 상처에 관심이 많고 까발리고 싶어한다.
2012년에 나온 이책이 그녀의 첫소설집이고 아직 후속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그녀의 방식이 너무 금방 파악된다는 것은 유감이다. 나레이티브가 매끈하니 독자는 읽는 재미가 있긴한데 매너리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그녀는 그 매너리즘을 넘어선 후속작을 낼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을 기대로 바꾸고 싶을 만한 즐거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