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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부처

 

                                                         이 원규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깨어보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은 봄이로세
부시시 일어나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꽃피는 법당 하나 차렸다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목불 하나 없는 법당에서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였다

한 번 절하고
너는 누구냐
또 한 번 절하고
너는 또 누구냐
묻고 묻다가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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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라는 제목의, 곽 재구 시인이 모아 놓은 다른 사람들의 시 모음집을 어제 손에 넣었다. 곽 재구 시인의 시는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지만, 여기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또 한번 이 세상에는 곽 재구 시인같이 '시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온 시를 한 편 골라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는 나, 그 물음을 되도록 묻지 않으며 살기를 바라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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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5-2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찾아보아야 겠네요, 바로 내가 나인 것을 어디에서 찾을꼬.

hnine 2007-05-27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한번은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인것 같아요. 다 나 자신에 대한 욕심때문에 갖는 질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도 언제 바뀔지 모르지요.
 

성의(聖衣)

                                   정 호 승

자정 넘은 시각
지하철 입구 계단 밑
냉동장미 다발이 버려져 있는
현금인출기 옆 모서리
라면박스를 깔고
아들 둘을 껴안은 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자
가랑잎도 나뒹굴지 않았던
지난 가을 내내 어디서 노숙을 한 것일까
온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서울의 감옥이 된
창문도 없는 여자가
잠시 잠에서 깨어나 옷을 벗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고 또 벗어
아들에게 입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자정이 넘은 시각
첫눈이 내리는
지하철역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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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카 아다다

                                   정 호 승

봉천동 산동네에 신접살림을 차린
나의 조카 아다다
첫아이가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아다다의 집을
귤 몇 개 사들고 찾아가서 처음 보았다
말없이 수화로 이어지는 어린 딸과 엄마
그들의 손이 맑은 시내를 이루며
고요히 나뭇잎처럼 흐르는 것을
양파를 푹푹 썰어넣고
돼지고기까지 잘게 썰어넣은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먹으며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하늘이 성탄절처럼
온 방안에 가득 내려오는 것을

병원에 가서
청력검사 한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아다다
보청기를 끼어도 고요한 밤에
먼제서 개 짖는 소리 정도만 겨우 들리는 아다다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들처럼
신호등이 반짝이도록 만들어놓은 아다다
불이 켜지면 아다다는 부리나케 일어나 대문을 연다

애기아빠는 타일공
말없이 웃는 눈으로 인사를 한다
그는 오늘 어느 신도시 아파트 공사장에서
타일을 붙이고 돌아온 것일까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맛있게 먹고
진하게 설탕을 탄 커피까지 들고 나오면서
나는 어린 조카 아다다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을 손처럼 부지런하게 살면 된다고
봉천동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아다다의 손은 계속 내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시집(詩集)을 비롯해서- 이 모난 마음 조금이라도 착해지고 싶은, 드러내놓고 말할수 없는 이유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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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7-05-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처음 정호승님의 시를 읽은 건 이 시집이 아니라 다른 시집이었는데 거기 실린 시 들은 다소 처절했어요.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마음을 따뜻하고 착하게 하는 느낌이 짙어서 더 품고 있고 싶어졌어요. 속삭이신 님도 날씨만큼 편안하고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래요.

hnine 2007-05-1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좋아하는 시인이 몇 사람 있어요. 정 호승님도 그 중 한 분인데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섬사이님이 올리신 것 보고 다시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지요.
 

결혼에 대하여

 

                                                                  정 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을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섬사이님의 '수선화에게'를 읽고서 정 호승님의 시집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특히 잘 읽히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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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5-0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사람과 결혼한다고 치자...결혼 후에도 계속 저런 사람일까, 전 요런 짖궂은 생각도 들었답니다 ㅋㅋ... 많이 닳고 닳은 부부라는 것도 알고 보면 소중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겉돌고 있는 부부도 있으니까요.
 

나의 혀

 

                                     정 호승

 

한때는 내 혀가
작설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가난한 벗들의
침묵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우습도다
땀 흘리지 않은 나의 혀여
이제는 작살이 나기를
작살이 나 기어가다가
길 위에 눈물이나 있으면 몇 방울 찍어 먹기를
달팽이를 만나면 큰 절을 하고
쇠똥이나 있으면 핥아먹기를
저녁안개에 섞여 앞산에 어둠이 몰려오고
어머니가 허리 굽혀 군불을 땔 때
여물통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기를
내 한때 내 혀가
진실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작설이 되지도 못하고, 침묵의 향기, 진실의 향기는 더더욱 되지 못하는 혀를 가진 사람으로서 위안이 되는 시라서 적어본다. 땀 흘리지 않은 모든 것들은 겸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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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0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 시 가져갈게요^^
땀 흘리지 않은 모든 것들은 겸손할 것!

hnine 2007-05-0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저는 오늘도 땀 흘리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왔습니다 흑 흑...
섬사이님, 하루를 정리하며 오늘 내 입에서 나간 말들을 돌이켜 보면, 솔직히 끔찍할 때가 많아요. 더구나, 아이 앞에서 한 말들 중에도 말입니다.
 

어긋나는 것들

                                                    조 은 (1960~  )

 

포식하고 싶을 때 굶주렸다
행복을 생각할 때 불행했다
일해야 할 때 쉬어야 했다

어긋나는 삶
어긋나는 빛

결코 내게서 싹틀 수 없는 것들이
버석거리는 내 몸에
또다시

 

사는게 뭐 이런가 생각될 때가 있다. 나는 왜 되는 일이 없냐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그런 말 하는 횟수가 줄어간다.
내 인생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기 때문인가보다.
오히려 감사하고 살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감사하며 살아야할 이유가 넘치도록 많지 않은가.
그래도 안다. 나를 둘러싸고 어긋나는 삶을 피부로 느낄 때의 그 쓴 맛을.
쉽게 격려나 위로를 할 수 없는 그 순간을 안다.

김 서령의 '가(家)'란 책에서 이 시인의 사직동 그 조그맣고 정갈한 집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오늘에야 직접 그녀의 시집을 손에 넣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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