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聖衣)

                                   정 호 승

자정 넘은 시각
지하철 입구 계단 밑
냉동장미 다발이 버려져 있는
현금인출기 옆 모서리
라면박스를 깔고
아들 둘을 껴안은 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자
가랑잎도 나뒹굴지 않았던
지난 가을 내내 어디서 노숙을 한 것일까
온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서울의 감옥이 된
창문도 없는 여자가
잠시 잠에서 깨어나 옷을 벗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고 또 벗어
아들에게 입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자정이 넘은 시각
첫눈이 내리는
지하철역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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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카 아다다

                                   정 호 승

봉천동 산동네에 신접살림을 차린
나의 조카 아다다
첫아이가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아다다의 집을
귤 몇 개 사들고 찾아가서 처음 보았다
말없이 수화로 이어지는 어린 딸과 엄마
그들의 손이 맑은 시내를 이루며
고요히 나뭇잎처럼 흐르는 것을
양파를 푹푹 썰어넣고
돼지고기까지 잘게 썰어넣은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먹으며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하늘이 성탄절처럼
온 방안에 가득 내려오는 것을

병원에 가서
청력검사 한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아다다
보청기를 끼어도 고요한 밤에
먼제서 개 짖는 소리 정도만 겨우 들리는 아다다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들처럼
신호등이 반짝이도록 만들어놓은 아다다
불이 켜지면 아다다는 부리나케 일어나 대문을 연다

애기아빠는 타일공
말없이 웃는 눈으로 인사를 한다
그는 오늘 어느 신도시 아파트 공사장에서
타일을 붙이고 돌아온 것일까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맛있게 먹고
진하게 설탕을 탄 커피까지 들고 나오면서
나는 어린 조카 아다다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을 손처럼 부지런하게 살면 된다고
봉천동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아다다의 손은 계속 내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시집(詩集)을 비롯해서- 이 모난 마음 조금이라도 착해지고 싶은, 드러내놓고 말할수 없는 이유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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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7-05-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처음 정호승님의 시를 읽은 건 이 시집이 아니라 다른 시집이었는데 거기 실린 시 들은 다소 처절했어요.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마음을 따뜻하고 착하게 하는 느낌이 짙어서 더 품고 있고 싶어졌어요. 속삭이신 님도 날씨만큼 편안하고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래요.

hnine 2007-05-1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좋아하는 시인이 몇 사람 있어요. 정 호승님도 그 중 한 분인데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섬사이님이 올리신 것 보고 다시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