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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평소에 신간을 찾아 재빠르게 읽는 편도 아니고 김영하 작가의 팬도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요즘 즐겨 듣는 문학 관련 팟캐스트에 얼마전에 뭔가 뻘쭘한 짓을 하고는 상품으로 이 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 팟캐스트를 즐겨 듣긴 하지만 그냥 듣고 참고만 할뿐 소개되는 책을 따라서 구입하는 일도 내겐 별로 없다. 소개는 소개일뿐 내가 읽으면 다른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나는 내가 직접 고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창래 작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자기도 써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때가 온다고. 그러니까,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때부터 다른 사람의 책을 더 많이 읽게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되려는 결심 이전에 일종의 독서 편력기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며 한가지 더 알아낸 것은, 그냥 다른 사람의 전작으로서 읽고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경우, 읽은 소설에 대한 자기식의 반응으로써 소설을 쓰게 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거기서 김영하 식의 다른 스토리가 연상되어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이모저모로 다른 사람의 책을 많이 읽어본다는 것은 필요한 것 같다.
책의 뒤에 보면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어 있다. 대부분 원고가 있기는 했지만 강연이나 인터뷰 자료들을 가지고 이 책이 엮여졌는데, 그럴 경우 그 강연이나 인터뷰 자료들은 소유권이 작가에게 있는 게 맞는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주최측에 있는 경우도 있지 않나 이런 곁다리 생각까지 해가면서.
어느 강연과 인터뷰였는지 책 뒤에 한꺼번에 목록으로 나오는데, 어느 글이 어느 인터뷰 혹은 강연 자료라는 것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원래 출처를 찾아보기에 편할 것 같지 않다. 각 꼭지글에 바로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뷰나 강연이라는 것이 어떤 물음, 주제에 대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답하는 행위인데 김영하는 그때마다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참 잘 하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머리 속에 그것를 가능하게 하는 풍부한 지식 창고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뜻이고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을 나는 아직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나름 한국 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작가 중에서도 웬지 어얼리 어댑터 느낌이 나는 작가들의 글에 선뜻 손이 안가는 내 성향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가 그렇고 박민규가 그렇다. 그래서 이 책속에서 그가 자기 작품들의 배경이나 쓰기까지의 경로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 작품에 촛점을 두고 들었다기 보다 그것을 말하는 김영하라는 사람에 촛점을 둘 수 밖에 없었고,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사람인가? 그가 특별하다면 그가 가진 능력도 능력이지만 나로서는 그의 소신과 주관을 들고 싶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결정이 잣대가 아니라 최소한 자기의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그것에 의의를 두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주위에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다. 특히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남에게 어떻게 보이고 판단되느냐에 가치를 두는 요즘 아니던가?
10년 후에 하고 싶은 일, 20년 후에 하고 싶은 일, 그걸 '지금' 하면서 살기 위해선 그만한 소신과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일단 돈부터 벌어 놓고, 남보기 그럴듯한 직장 부터 잡아 놓고, 집부터 마련하고, 자식부터 낳아 키워 놓고, 등등 하면서, 자기의 실체를 덮어놓고 껍데기로 살지 않으려면, 그만큼 포기하고 놓아야 한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하려고 한다. 남이 하는 것은 다 구색맞춰 하면서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도 하려고 하니 겉도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그 점에서 김영하라는 작가는 특별한 사람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하고 나는 들었다. 나도 내 목소리로 '나'를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