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물 먹으러 부엌에 갔다가

내 방으로 올 때

오, 나를 따라오는 게 있네

내 방까지 따라와

내 옆에 나란히 앉는게 있네

만져볼 수 없이

함부로 바라볼 수 없이 내 옆에서

다만 느낌으로

앉아 있네

 

 

"자긴 누구지?"

"......"

멍들었던 데를 만져보듯

되돌려 받는 물음

"자긴 누구지?"

"......"

 

 

다만 시늉으로 살다가

시늉으로만 살아 있다가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에

창이 가려지듯

슬그머니 눈을 감는 것인가

 

 

"자긴 누구지?"

"......"

오늘도 나는

죽음의 시늉으로

그 물음 곁에

누워보는 것이 아닌가

 

 

 

- 장석남 <달의 방 1> -

 

 

 

 

 

 

 

 

 

 

 

 

 

 

 

 

 

 

 

 

나희덕 시인과 장석남 시인의 편지글 <더 레터>를 읽은 후로 요즘 장석남 시인의 시와 사귀고() 있는 중이다.  위의 시는 그의 시집 '젖은눈'에 실려 있다.

 

'시늉으로만 산다는 것' 이라는 말에 움찔.

 

어제는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수첩에 마구 베껴 오기도 했다.

 

The trouble with not having a goal is that you can spend your life running up and down the field and never scoring.

 

(목표가 없는 것의 문제는 당신이 경기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결코 득점하지 못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Bill Copeland, 호주 출신의 국제 크리켓 경기 심판 -

 

나 역시 시늉으로만 살고 있지 않은지 무의식 속에서 자신 없었던 모양이다.

모처럼 주어진 여유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까 고심하다 보면, 무언가 실제로 한 시간보다 고심하느라 보낸 시간이 더 많은 때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한번 사는 이 삶을 후회없이 살까 생각하느라, 실제 무언가 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쓰는게 아니라 그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진할 수 있다.

경기장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수 없으니 계속 이리 뛰고 저리 뛰긴 하는데 무엇을 위해 왜 뛰는지 모르고 남들 뛰는 대로 덩달아 뛰다보면 결국 득점은 하나도 못하고 경기가 끝나는 수가 있다.

 

시늉으로만 사는 것은 쉽다. 언제든 발뺌할 수 있으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사람의 칭찬, 비난 등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그저 시늉만 할 뿐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그런 나의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어두운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즉, 누군가의 앞에서 시늉할 필요가 없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온전한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바다 소리 새까만

몰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 장석남 <돌멩이들> -

 

 

 

살아간다는 것,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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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16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석남 시와 사귀고 싶어지는 페이퍼에요, 나인님.^^
너무 좋잖아요, 이거!!
담아갑니다^^ 빗속을 뚫고 운전하고 돌아왔어요.
작은딸 영어 도서관 리딩 버디 봉사 마치고 잠시 데이트를 했네요.
태풍이 내일 강타한다고 내일은 학교도 휴교네요. 다린이 학교는 어떤지요.
시늉만으로 사는 삶, 저도 컥 걸려서 심장이 덜커덩거립니다.^^

hnine 2012-09-16 23:19   좋아요 0 | URL
리딩 버디라, reading buddy 말씀하시는거라면 작은 따님이 엄마 하는 일을 이어서 하고 있네요? ^^
딸과의 데이트, 얼마나 좋아요!
다린이 학교에선 지금 방금 문자메시지 왔어요, 수업은 정상적으로 한다고요.
내일 큰 피해 없이 잘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우리, 지금부터라도 행여 시늉만 내며 살지 말기로 해요.

세실 2012-09-1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 시인과 장석남 시인이 주고 받은 편지라~~~
당장 읽고 싶어 집니다.
내일 도서관 자료실로 직행! 이럴때 사서라는 직업이 좋아요.
시늉하는 삶보다는 직접 부딪치며 사는 삶을 살겠노라 마음 먹지만 싶지 않네요.
편안하게 들리는 빗소리가 불안한 밤이지만 오늘을 즐겨야 겠습니다.

hnine 2012-09-16 23:21   좋아요 0 | URL
나희덕 시인과 장석남 시인의 <더 레터>는 생각보다 책이 얇아요. 금방 읽는답니다. 두 시인의 시집도 좋고요.
시늉하는 삶과 반대말은 '직접 부딪히며 사는 삶', 그렇네요. 부딪힐때마다 아프긴 하겠지만 그게 제대로 사는거겠지요.

Jeanne_Hebuterne 2012-09-1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늉만 하기에도 벅차서 그만.......

hnine 2012-09-16 23:22   좋아요 0 | URL
에뷔테른님, 그렇다면 그건 시늉이 아닐거예요...

Jeanne_Hebuterne 2012-09-17 12:32   좋아요 0 | URL
목적 없는 목표여서 그럴거란 생각을 했어요.
목적이 분명해야 목표가 또렷하니까요.

hnine 2012-09-17 15:29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끝까지 가보자" 이건데요, 이게 목적인지 목표인지, 아니면 그 무어도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끝까지 다 가보고 말해야지, 이런 뚝심이랄까.
목적이 너무 분명한 사람도 좀 겁이 나지요.

하양물감 2012-09-17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 구절에 감정이입이 잘 안되는 편이에요. 너무 메말랐나봐..(^^)
오늘 부산은 휴교예요. 한솔이도 휴원하는 바람에 지금 출근을 어찌해야하나 고민중입니다..

hnine 2012-09-17 15:30   좋아요 0 | URL
시가 워낙 주관적인 것이고 함축된 표현이라서, 첫눈에 팍 하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계속 갸우뚱하게 되거나, 그런 것 같아요.
부산은 다 휴교라는 소식 뉴스에서 전해들었는데, 정상 수업한다던 제 아이도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왔네요.

하늘바람 2012-09-2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구마구 찔립니다 여태 살아온 모든 시간이

hnine 2012-09-21 19:03   좋아요 0 | URL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