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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2월
평점 :
'고립에 실존의 의미가 더해질 때 우리는 그 상태를 고독이라고 말한다.'
125쪽에 나오는 말이다.
일체 장식 없는 표지에 흐르는 듯한 제목 글씨체만 돋보인다.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말, 느림, 정신적 공복, 비움, 고독 등과 일맥상통.
삼수, 사수 끝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등단을 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출판사를 일터로 수년간 뼈가 굵어지면서 다다른 곳은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계속 살아갈 것인가, 이게 진정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 하는 것이었다고. 잘은 모르지만 출판사 일이라는게 마감이 있는 일이고 때로는 다그치고 몰아쳐야 하는 일이기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 책읽기에 거의 달인이라 할 경지에 이른 저자인데 막상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여유있게 책 읽을 짬을 내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책 없이 못사는 사람에게 책 한권 맘 편히 읽지 못하는 나날이란 오래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번잡한 서울 거리를 끈에 묶여 끌려가던 검은 염소가
문득 뒤돌아서서 공룡 형상의 한 낯선 도시를 바라보듯......
그 슬픔이 칼이 되어 가슴을 버히듯......
- '자화상'- (222쪽)
그래도 식솔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 버틸때까지 버티다가 겨우 한시름 놓게 되자 미련없이 안성 어느 곳에 집을 짓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간다.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선택한 고독인 셈이다.
이 책의 서문만 읽어도 저자의 글솜씨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새 그의 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북적이면 혼자 있고 싶다 하고, 혼자 떨어져 있으면 또 외롭다고 징징대는 우리들 일상이지만 결국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혼자만의 고순도, 고집중의 시간을 거쳐서 아닌가.
나는 침묵, 견고한 책상, 펜과 백지, 나만의 시간, 무서운 집중력 들을 꿈꾼다. 인류에게 유익한 그 무언가 경이로운 것은 거의 모두 정금과도 같은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탄생한다. (23쪽)
이 책에서 밑줄 그은 말 또 하나,
삶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삶의 길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아무리 애써 찾아 헤맨다고 해도 없는 길이 찾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없는 길을 찾아 헤매던 그 부질없는 정열이 이제 그를 찌르는 정열이 된다. (225쪽)
하지만 나는 그렇게 길을 찾는데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리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찾게 되는 것은 답이 아닐테니까.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소모해서 얻을 수 있는 답은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벌이면서 상이다. 저자가 숨돌릴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온 후 발견한 답이고 결단이듯이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몫의 고민과 풀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결코 남이 대신 해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조언은 조언일 뿐이다. 행복은 목적 달성, 성취에서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바로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행복이란 저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자리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자. 그것이 밤새 굳어버리지 않고 움직일 때 우리는 행복의 한 이유를 갖는 것이다. (240쪽)
오늘 새벽 동트기 전에 일어나 책상에 앉았는데 오늘따라 뻐꾹 뻐꾹 하는 새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꿩인지 푸드덕 나는 소리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들렸다. (실제로 우리 아파트 거실 창으로 보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언덕 기슭에 꿩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무작정, 잠시나마 행복했다. 비록 어제 밤 잠들기전까지 난 왜 이모양이야, 사는게 왜 이모양이야, 속을 끓였을지언정 다 잊고 지금 한순간이나마 현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그토록 소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이런 저런 볼일로 서울 걸음을 하고 있다지만 그 외의 모든 시간은 책 읽고 글 쓰는데 보내고 있다는 저자의 일상. 처음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었다면 그가 이토록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마 무료하고 지루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 나면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읽어준다니, 그건 아마 쓰고 다시 읽어보고 하는 일에 옆의 개가 동참해주었다는 뜻이겠지만 그의 시간이 어떻게 메꾸어져 나가는지 짐작하게 한다. 산을 따라 걷고 때로는 달리고, 생각을 비우고, 시간을 비워서 정신적 공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글에서 어딘가 하루키를 연상한다. 아니, 그가 하루키의 그 혼자이면서 자유스럽고 매이기 싫어하는 경향에 자기 동일시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지난 번 신간평가단 하면서 읽고 싶은 신간으로 점찍어 놓았던 책이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직접 구입해서 꼭 읽어보리라 했었다.
새벽별 같고, 혼자 끓여마시는 차 한잔 같은 글들이 한권에 꽉 차있다.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