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 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꼭 길어야 좋은 글은 아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이 몇 줄로 시인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끌어내게 한다. 

푸른 새벽처럼, 서늘하게 아름답구나.
'길'
그 한 글자로 이미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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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1-12-0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가 너무나도 선명히 새겨지는 그림같은 시네요.

hnine 2011-12-01 11:39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요란한 꾸밈말 없이도 읽는 사람의 눈길, 마음길을 잡아 놓아요.
말씀하신 것 처럼 줄 마다 하나의 장면의 눈 앞에 그려지고요.
제가 그럴 자격도 없지만 흠잡을데가 없는 완벽한 글이 아닌가해요.

비로그인 2011-12-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시에요. 자줏빛으로 함뿍 젖은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게 되요.
오늘은 멜랑꼴리 덕분에 시가 내게로 더 가까이 오는 느낌이에요.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는데... hnine님 프로필 사진처럼 ㅎㅎ

hnine 2011-12-01 15:13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진 글이지요?
쓰여진 지 꽤 지난 시인데 지금 읽어도 어느 한 구절 식상한 곳이 없어요.
자줏빛으로 젖는 대신 오늘 여기 날씨는 회백색. 회백색으로 젖을 것 같네요.
'봄' 말씀하시니 생각나는데 이 시인의 '봄'이라는 시도 있어요. 한번 검색해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1-12-0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길은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까 머릿속에 한번 그려보게 되네요.
잘 떠오르진 않지만요.

hnine 2011-12-02 06:39   좋아요 0 | URL
그 길 위에 서있을 때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다 지나고 난 후에 돌아보면 그때 보이는 길. 과거로서, 추억으로서만 존재하는 길. 그게 우리가 사는 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서 있는 길, 앞으로 걸어갈 길도 눈에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더 안 좋을까요?

전호인 2011-12-02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속에 고향의 아련한 추억과 인생을 살아온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있군요.
나의 길은 어떤 길로 표현될지......

hnine 2011-12-02 14:24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만의 문체로 한번 표현해보세요. 저도 제가 지나온 길이 궁금한데 아마도 곧장 걸어온 길은 아닐 것 같고 이리 비뚤 저리 비뚤, 방향 전환이 여러 번 있었던 길이 아닐까 짐작만 합니다.

춤추는인생. 2011-12-0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저 수능볼때 늘 문제집에 나오던 시에요. 아스라한 이미지가 오랫동안 남던. 정말 아름답고 슬픈 시같아요.
전 길하면 늘 가지 않을 수 없던길 도종환의 시가 생각나요. 한밤중에 나인님의 음성으로 귓가에 들려주세요. 전 자주 울곤했지만.덕분에 많이 위로받았어요

hnine 2011-12-03 05:42   좋아요 0 | URL
앗, 아무리 좋은 시라도 시험 문제로 자주 만나던 시라면 정이 덜 갈 것 같은데요? (좋은 시는 시험에 출제하지 맙시다!! ^^)
자꾸 읽으니 생각이 더 많아지네요.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잃어버렸다는 뜻은 무엇일까. 은빛 바다 라고 하면 푸른 바다라고 할 때와 어떻게 다른 느낌이 오나, 눈물 흘렸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도 울었다는 표현을 저리 멋지게 하는구나 (마지막 연) 등등.
소설도 그렇듯이 시에서도 우리는 참 많은 위로를 받아요.
춤추는 인생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지내시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