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창비시선 334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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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밑줄을 많이도 그어댔다. 즉, 한번 읽고 잊혀지게 하고 싶지 않은 어휘, 구절들이 많았다는 얘기이다. 새삼스럽지만 시인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은 시인이 아닌 사람들과 다르다. 아니, 그들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내는 별난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추, 무우, 고춧가루, 파, 마늘 등의 재료를 가지고 맛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하나같이 김치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동안 그들은 그 재료를 가지고 듣도 보도 못한, 이 세상에 없던 음식을 하나 만들어낸다. 때로는 군침이 돌게 하지만 때로는 뭐 저런 음식이 다 있나, 저것도 음식인가? 도대체 무슨 맛일까? 의아하게 만드는.
이 장욱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예외없이 그 신기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새로운 요리를 많이도 구경했다.

생각에 잠긴 세포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전자들
계문강목
과속종들 ('일종의 밤' 중에서)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드라마' 중에서)

나는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인생이 깊은 늪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늪' 중에서)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중 ('밤의 연약한 재료들' 중에서 편집)

오늘의 햇빛은 감정을 지우는 데 쓸모가 있다 ('피의 종류' 중에서)

그런데 왜, 통째로 기억하고 싶은 시는 꼽아봐야 두 편 정도란 말인가.
그 한편은 '소규모 인생 계획' 이라는 시로, 수년 전 어느 일간지에 실린 것을 보고 내가 처음 이 장욱 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한 시이다. 그때  다음의 두 줄이 눈에 번쩍 하고 들어왔던 기억이.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처음에 받은 인상이 강해서인가. 지금도 제일 인상적인 구절을 꼽으라면 여전히 맨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베스트로 꼽고 싶은 또 한편의 시는 '토르소'.  시 전체가 한편의 짧은 영화 같기도 하고 추리 소설 같기도 했다면 너무 과장인가? 나는 분명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 (중략)...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토르소' 중에서)


그는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건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년월일, 어느 동네에나 있는 동사무소, 언제나 돌아오는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공공장소, 흰 밥 등등.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소재 속에서 그는 조용히, 눈의 안 띄게 남들이 해보지 않은 실험을 하고 있고 처음 대하는 것인양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실험과 관찰의 결과보고서는 그리 만만치 않아서 금방 공감이 되리라 기대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주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일 것 같다.
모르지. 둘 다 가진 사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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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9-0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참 좋네요

hnine 2011-09-04 19:48   좋아요 0 | URL
이분 소설도 써요. <고백의 제왕>이라고 저도 아직 못 읽어봤네요.

stella.K 2011-09-0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h님 시가 마구 땡기시나 봐요.
저는 에세이가 땡기던데...ㅋㅋ

hnine 2011-09-04 19:51   좋아요 0 | URL
ㅋㅋ '땡기는'대로 음식도 먹어주어야 하듯이 책도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소설은 늘 관심이 가니까 특별히 땡긴다고 할 수 없고 저는 자기계발서, 동화, 시집, 이런 것들은 정말 땡기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9-0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글을 보니,
왜 상상하지 못 한 요리를 인용하셨는지 알거 같아요.
정말 문체가 그렇네요...... 참 좋아요.

저도 그렇게 깡총 깡총 날아가고 싶어요. 오늘처럼 허우적대지 말구요. ^^

hnine 2011-09-04 19:53   좋아요 0 | URL
잠시 서재 닫으신 것 보고 안그래도 깜짝 놀았더랬어요.
저도 서재 지인으로부터 제 페이퍼가 뉴스레터에 실렸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 있는데 그때 제 페이퍼는 별로 심각한 내용의 것이 아니었기에 금방 잊어버렸지요. 저는 알라딘에서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어요.
편한 밤 되시고 내일은 깡총깡총! ^^

같은하늘 2011-09-0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정말 보통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걸 음식에 비유하시는 hnine님의 글이 더 맘에 들어요.

hnine 2011-09-05 07:07   좋아요 0 | URL
싫으나 좋으나 음식 만드는 일을 매일 해야하는 주부이다보니 시인에 대한 비유도 그 범위를 못 벗어났나봐요 ^^

순오기 2011-09-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이랑 같이 남도답사 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미황사에서 해남터미널까지 다시 광주터미널까지 같이 왔어요.
조대교수로만 알았지, 시인이고 소설가라는 걸 다녀와서 알았어요.ㅜㅜ
눈이 작아서 친근감이 들었는데~ ^^

hnine 2011-09-06 05: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페이퍼에서 이분도 동행했다는 것 읽어 알고 있었지요.
시인이고 소설가인 사람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꿈틀대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호기심 증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