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일을 하는 아무개씨 

 

밤 11시 이제야 겨우 혼자 책상 앞에
앉았다 멸치 육수도 우려놨고 아침밥도
올려놨고 김치도 잘게 썰어 볶아놓았다
아이 방에 가습기 대신 물도 한 양재기
넣어두었고 오늘은 남편 대신
청소기도 밀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외할머니가
6.25 전쟁통에 엄마와 큰 이모 데리고
엉금엉금 기어 한강철교를 건너 부산 가서
피난살이할 때 전쟁이 끝나고 어서
외할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미군부대에서 빨았다던 빨래 쪼가리
보다 못한 일이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엄마가
고만고만한 네 아이를 단칸방에 데리고
하루 세끼 꼬박 챙겨주고 곤로에
따뜻하게 찌개 끓여준 거에 비하면
타버린 곤로 심지만도 못한 일이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사업 실패로
아들이 음독자살한 뒤 도시로 나간
며느리도 소식 끊겨 어린 손주 보살피며
농사일까지 하느라 허리가 끊어져도
모르는 농촌 노인들 딱한 사정에 비하면
정말 개미 허리보다도 못한 일이고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외롭게 울부짖었던
것처럼 혼자만의 방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선
혼자만의 방이 꼭 필요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부부 침대까지 버리는 엄청난 결단을
내리고 혼자만의 방을 확보했었는데
그 작은 방이 결국 삼 개월 만에
세 식구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창고로
환골탈태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아무개씨는 괜히 심통이 나서
전에 아무개씨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종사했던 남편에게 도무지 혼자만의
시간이 채 두 시간도 되지 않는다는 둥
왜 밤늦게까지 TV보고 물 마시러
들락거려 신경 거슬리게 하느냐는 둥
내가 하는 일이 네가 세 식구 먹여
살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만만하게 보냐는 둥 그럴 시간에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일이나 하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분풀이를 하다가 


남편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제 풀에 지쳐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개씨  

 

 

- 성 미정 -

 

 

 

 

 

 

 

 

 

처음 몇 줄을 읽다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우리 집 상황이 생각나서. ^^
내일 아침 준비까지 다 해놓고 뭔가 내 할일 좀 하려하면
열한 살이나 된 녀석이 꼭 자기 자는데 옆에 있어달란다
그러다가 내 할일 아무 것도 못하고 같이 잠들어버리는 경험을 많이 했기에
너 혼자 자라고 해도 자꾸 조른다
그러면 나는 막 화를 내거나
마음을 착하게 먹기로 한 어떤 날은
형제 없이 혼자 크는 아이, 몇 년 후면 그렇게 해준대도 마다할 걸
뭐가 그리 힘들다고...하며
옆에서 토닥토닥 같이 있어준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내 자신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일 뿐이다

시인이 늘상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읽자마자 잊혀져버린다해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지금까지 그녀의 시집은 다 찾아서 읽어온 나는 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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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0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재밌네요 ㅎㅎ
hnine님 서재에서 매번 좋은 시 읽고 가네요 :)

저도 이 시집 읽어봐야겠어요. 요새는 시집에 마음이 쏠리고 있어요.

hnine 2011-09-01 13:43   좋아요 0 | URL
아주 읽기 편한 시집이어요. 제가 또 나름 성미정 시인 팬 아니겠습니까? ^^

순오기 2011-09-02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시도, hnine님 글도 공감이 돼요!^^
스르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뻑이 너무 심한 것도 좀~~~~~~~ ^^

hnine 2011-09-02 15:43   좋아요 0 | URL
자뻑이라...요즘은 어느 정도가 자뻑인지, 어느 정도가 적당한 자기 PR인지도 구분이 안가더라고요.
성미정 시인의 시, 기회되면 한번 읽어보세요. 이렇게 솔직하고 털털하면서 또 예리한 시인도 없지 않나 싶어요. 공감 팍팍 되고요 ^^

꿈꾸는섬 2011-09-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는 글이에요.
시인의 글도 나인님의 글도요.^^

hnine 2011-09-03 07:10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도 이 시인의 시들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냥 제 짐작에...^^

같은하늘 2011-09-0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200% 공감이예요.^^
전 매일같이 집안일을하며 알아주기 않는 식구들에게 화내거든요.
보관함에 넣어야겠어요.

hnine 2011-09-05 07:06   좋아요 0 | URL
그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 듯 하지요? ^^
식구들이 알아주지 않을 땐 며칠 안하는 방법을 써볼까, 이 생각을 매일 한답니다.

숲노래 2011-09-0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집에 있는 살림꾼)가 하는 일은 참 대단하답니다.
며칠이 아니라 하루만 집에서 일을 안 하셔도
식구들은 벌벌 떨 텐데요 ㅋㅋㅋ

hnine 2011-09-06 05:07   좋아요 0 | URL
벌벌 떨까요? ^^
조만간 실행에 옮겨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