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엔 TV를 켜지도 않는데 요며칠 아이가 집에 없는 동안 몇 개의 TV 프로를 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엄마가 뿔났다' 라는 주말 연속극인데, 이걸 보고 있자니 다른 건 모두 뒤로 하고 나도 덩달아 뿔이 난다.

시집와서 평생을 내가 아닌 가족을 위한 노력 봉사로 산 엄마가 나이 60을 넘어가면서 내 인생은 이게 전부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남은건 무엇인가. 자식들 모두 결혼해 제 가정을 꾸리고 있고, 모시던 시아버님도 팔십의 나이에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어 뒤늦게 재미를 붙이셨으니, 나도 이제 뒤늦게 나마 나 하고 싶던 일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으리라. 나 이제라도 공부 해서 대학에 가볼까, 조심스레 큰 딸에게 운을 띄어 보는데 엄마 나이에 대학엔 가서 뭐하려고 그러냐고 단박에 무시당하고 만다. 아니 그 대목에서 왜 내 가슴이 쿵 내려앉은 것일까.
결국 식구들 모두 앉은 자리에서 집을 나가 일년만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할수 있게 해달라고, 식구들 뒤치닥거리에서 이제는 벗어나 내 맘대로, 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자식들 하는 말, 어느 엄마는 그렇게 살지 않느냔다.
'그래,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엄마 할 것 없이 그렇게 살아오셨지. 엄마가 되기 전의 꿈이나 목표는 시집오는 순간부터 모두 reset 되는거야.' 혼자 보면서 주절주절...

엄마가 나간다는 말에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럼 아버지랑 할아버지는 어떻하고!"  그들에게는 엄마의 부재가 걱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집안에서 엄마가 맡아해오던 그 역할의 부재가 더 걱정되는 것일까. 며칠 전 읽은 <까칠한 가족>을 읽으면서도 했던 생각이 다시 들었다.

트럭에 가재도구를 몇가지 실어가지고 구한 원룸으로 드디어 이사나가면서 엄마의 그 환한 웃음. 마치 감옥에서 출소하여 자유인이 되는 사람 마냥.
그 웃음이 참 서글프다.

한 가정에서 아빠의 역할이 그러하듯이 엄마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엄마의 보살핌을 엄마만큼 대신해 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엄마의 역할을 참으로 우습게 안다. 물질로 환산이 안 되기 때문일까. 물질만능주의 시대 탓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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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7-2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해요. 사극을 넘어 드라마광이신 아빠 덕분에 지나다니며 틀어진 텔레비전을 보곤 하는데 울화통이 나서 죽겠어요. 행복합니다에서 조강지처 클럽까지. 시청자들을 무슨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엄뿔도 좀 웃긴게 엄마의 출가 선언이 좀 튄다는 것. 이게 현실반영이니까 그러나보다 해야할지 어떤 가치관을 -모성이란 허울- 현실이라며 이런걸 들이미는걸 쪼아대야할지. 좀 막나가는 여자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단 텔레비전 끊고산지 오래된 1인의 바람입니다.

hnine 2008-07-21 13:20   좋아요 0 | URL
시니에님, 솔직히 전 아이때문에 TV를 안켜는것이지 저는 TV보는거 좋아해요 ^^ 드라마도 좋아하구요. 위의 드라마 보면서는 너무나 쉽게 극중 엄마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되어서는 다른 이성적인 판단 내지 분석은 뒷전이었답니다. 드라마와 아줌마 참 잘 어울리지요...라고 쓰려다보니, 전 아줌마 되기 전에도 드라마 보는걸 좋아했네요 ㅋㅋ

춤추는인생. 2008-07-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는 좀더 다른분위기였지만.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아들이 엄마에게 했던말이 생각나네요. 엄마가 엄마꺼야? 되게 울컥했어요 그때. 모든집이 그런것같아요. 엄마가 없으면 다들 무너져버릴것만 같은. 그만큼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고 기둥인데, 결국 그러다보니 엄마의 인생은 없는것 같아요.

hnine 2008-07-21 14:39   좋아요 0 | URL
예, 엄마의 자리는 정말 중요한 자리인데 그 자리가 비기 전에는 잘 모르지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 보면서 그 안에서 보람과 삶의 의미를 찾아온 우리의 어머니 세대의 어머니들에게 결국 남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저렇게 극단적일 수 밖에 없는 소망일까 생각하며 마음이 안 좋았어요.

Arch 2008-07-21 15:57   좋아요 0 | URL
저도 울컥하는데요. 그럼 엄마가 니꺼냐!

비로그인 2008-07-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티비를 안 켤 뿐이지 보는건 좋아해요, 특히 광고를.
엄마가 뿔났다는 시댁이나 친정에 가서 몇 번 봤어요.
그런데 어른들 특히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같은 여자들도 김혜자가 했던 말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말을 하던걸요.
저도 요즘 제 자리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hnine 2008-07-21 14: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겠지요.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현실에서는 흔치 않지요.
저의 친정어머니께서는 사회생활을 40년 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저 엄마처럼 내 맘대로 하고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러시던걸요.

마노아 2008-07-2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안 간 저도 한자의 울분과 해방감이 공감이 가는데, 어째 울 엄마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타박이시더라구요. 감히 꿈 꿔보지 못한 삶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가봐요.

hnine 2008-07-21 19:39   좋아요 0 | URL
그러시겠지요.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시며 지금까지 살아오셨을테니, 한자의 행동이 유별나다 싶으실거예요.

하양물감 2008-07-2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드라마, 우리 한솔이가 더 좋아해요...물론 주제가를 더 좋아하지만..

나는, 한자의 행동에 공감, 그리고, 응원해주고싶었어요....

hnine 2008-07-22 10:37   좋아요 0 | URL
한솔이도 시청자였군요 ^^ 주제가가 발랄하지요.
한자의 행동에 모두 공감하는 우리들은 대체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자식들보다 그래도 남편이 이해해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