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타고 지나가다 우연히 공연 포스터를 보고, 집에 와서 알아보고는 바로 예매를 해둔 것이 한달 전 쯤 일인가보다. 피아니스트 백 건우 연주회. 서울에서 한다고 해도 이리 저리 날짜를 가늠해보았을텐데, 대전, 그것도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라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남편이 6시 다 되어 집에 오는 바람에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공연장에 가는 기분이란. 좋기도 하고, 이런 일이 이렇게 이벤트거리가 되지 않던 옛날이 생각나 씁쓸하기도 하다. 옷도, 화장품도, 여행도 별로 관심없던 나에게 유일하게 소비의 기회를 만들어주던...
첫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Klavierstucke No.2 minor. 'My soul is touched...' 혼잣말이 흘러나오다. 영혼을 건드리는 것 같은 소리. 저 속의 깊은 무엇까지 끌어올리는 부드러움의 힘. 지금 생각하니, 그 곡을 첫 곡으로 선택했다는 것이 더 전율스럽다. 이어지는 베토벤의 Piano sonata No.30, 그리고 No.29. 베토벤 곡의 힘있는, 손가락을 허공으로부터 피아노 위로 바로 떨어뜨려버리는 듯한 연주에서도 백건우 특유의 부드러움은 표현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휩쓸어 버린 앵콜 곡은 역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3악장. 그 큰 피아노와 그의 손이 합체가 된 듯한 연주. 그 몰입과 동시에 여유가 무서울 정도였다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전형적인 봄 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도 지루한지 모르고,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의 예전 스크랩 화일을 뒤져본다. 백건우 인터뷰 기사. 날짜를 보니 1993년 11월, 조선일보. 내가 밑줄 쳐 놓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연주되었던 슈베르트 CD를 꺼내 아이와 남편에게도 들려준다.
그날 아이의 일기에는 '...엄마는 음악회에 갔다. 그 음악회, 치사하다. 8살까지 들어오지 못한댄다...'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