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브 - 곧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김소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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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으면 대충 훑어보는 습관이 있다.

이 책 또한 받자마자 작가의 친필 사인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책 뒷표지를 훑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 프롤로그를 읽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 페이지를 넘겼어도 그 다음 페이지로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 놓기를 몇 번.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책 읽기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가. 그토록 책장이 넘겨지지 않았던 책이 조금씩 읽혔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제 1장을 읽기 시작했을때, 프롤로그 부분이 왜 그렇게 넘어가지 않았는지가 우습게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코카브'란 말이 내게 익숙치 않았던것 같다. 그 뜻도 몰랐거니와, 죽은 아들을 뒤로 하고 집 나간 아내를 찾으러 간 남편의 이야기라는 건 알겠는데, 코카브란 단어가 계속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었다.  

 

 

일단, '코카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별'이란 뜻을 지녔다.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사 년이 흐른후 갑자기 아내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저 아내를 집안의 붙박이처럼 생각했었다. 아들이 죽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보내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찾지 않다가 아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더니 장모님이 받았다. 장모님댁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도리어 장모님이 형호에게 물었다. 아내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람은 곁에 있으면 소중한줄을 모른다. 그저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사라졌을때에야 우리는 빈 자리가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컸음을 그제야 느낀다.

 

 

아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가 머물렀던 아들 방에서 아내의 일기장을 찾았고, 아내의 메모를 발견했다. 그리고 아내의 옷장이 비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옷, 겨울옷을 다 챙겨갔던 것이다. 잠시의 외출이 아닌 오랜 시간을 지내러 어딘가로 향했다. 그제서야 형호는 아내에게 너무도 무심했음을 깨닫는다. 아들이 죽고난 후 4년이 지나도록 아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무관심했음을 깨달았다. 아내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관심은 때론 동정심이나 연민마저 잃게 만든다. 또한 잔인함이란 그 방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7페이지)

 

 

아내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아내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을때, 아내의 어릴적의 일을 들으며 하나씩 알아간다. 그리고 아내가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곳은 '코카브'라는 곳이다. 시간의 문이 열린다는 그곳.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어떤 간절한 삶에 도달하고자 한다. 간절히 원하는 어떤 시간속으로 들어가기 모여든 사람이었다. 천문학 학회의 모습같으면서도 UFO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아내의 곁에 있지만 아내 곁으로 가지 못하고, '코카브'에서 강의를 받고, 한 방을 쓰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점점 그들이 말하는 어떤 시간을 형호도 기다리는 것이다.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순간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을 찾아 되돌아갈 수는 있다. (21페이지)

 

 

형호의 아내가 메모한 위 글에서처럼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딱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것은 우리의 염원일 뿐이다. 어떤 일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또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까. 지극히 현실적인 나는 현실에 충실하라고 말하고 싶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보다는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 바로 오늘 이 순간부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잘 하라고 말하고 싶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잊지 말라고, 나도 작가처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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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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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구입한 시집이다. 또한 SNS에서 이성복 시인이 번역한 작품 『좁은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시집부터 만나고 싶었다. 그의 시집 중 『남해 금산』을 먼저 읽고자 했으나 신작을 먼저 읽었다. 이 작품은 이성복 시인이 10년만에 낸 시집이며 '래여애반다라'라는 제목을 썼는데, 이는 신라의 향가 「풍요風謠」(「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인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를 썼으며,  '오다, 서럽더라'라고 풀이된다고 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한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서러움을 위안하는 내용이라고 시집의 발문에서 시인의 제자가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 시집을 펴 읽기 시작했을때는 마음의 울림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뒷 쪽으로 읽어갈수록 시의 제목들이, 시어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다시 앞장으로 와 처음부터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시집의 첫편부터 마음속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시어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시집의 첫편을 먼저 보자면,

 

그 봄, 청도 헐티재 넘어

추어탕 먹으러 갔다가,

차마 아까운 듯이

그가 보여준 지슬못,

그를 닮은 못

 

멀리서 내젓는

손사래처럼,

멀리서 뒤채는

기저귀처럼

찰바닥거리며 옹알이하던 물결,

 

반여, 뒷개, 뒷모도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

 

                                    -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시는 한번 읽어서는 제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다지 와닿지 않는 시도 다시 음미하며 읽으면 그 시의 의미를 조금은 알듯 하다.

짧은 시어 속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와 더 나아가 나는 시 속에서 나의 삶을 반추하고 있었다.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  來如哀反多羅 3

 

아주 일상적인 일을 적어놓은것 같지만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나의 시간이 아닌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는 구절이 참 서럽고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시인이 올해 만 육십 세 라던가. 그래서일까. 시 속에는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시인의 마음, 아직 살아 있음에 간절한 시간들,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들이 보였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서럽다는 걸 시어들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중 략-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중 략-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중 략-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속삭였다.

-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후 략-

 

                                       -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나이 육십이 넘어가면 죽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한 시 들이 많았다. 장인 장모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들, 물고기의 죽음, 새들의 죽음으로 또 다른 생명을 구하는 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글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소설이든, 에세이이든, 시이든.

글에서 느끼는 위안은 아주 크다. 아주 짧은 몇 줄의 글에서도 우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감성을 지녔다. 소설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글인 시.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고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시는 마음을 드러내는 창. 더이상 서럽지 않기 위해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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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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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엄마의 삶을 물으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이 될지 모른다고. 내가 엄마를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많이 안다고 생각했었다. 여동생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때 내가 엄마를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 동생이 말한 엄마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한 남자를 좋아하고, 결혼까지 한 이야기가 마치 소설같았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곤 했었다. 나는 우리 엄마를 그때 처음으로 '한 여자'로 알았다. 우리 엄마도 한때는 여자였다는 걸,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지금도 여자라는 걸. 처음부터 우리 엄마는 엄마인 줄만 알았는데, 아주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한 여자이자 엄마라는 걸 아는 순간이었다.

 

 

내가 우리 엄마의 삶을 소설로 쓴다면 델핀 드 비강처럼 엄마의 삶을 한 권의 소설로 써낼 수 있을까. 죽은지 며칠이 지나 몸이 파랗게 된 엄마를 발견한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엄마의 삶을 소설로 써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 였던 엄마 뤼실의 이야기를. 엄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위해 작가는 엄마의 형제자매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삶을 조사하게 된다. 엄마가 아직 소녀였던 시절에서부터 매혹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고, 예쁜 옷을 입고 광고까지 찍는 아이였다. 언니, 오빠, 여동생들, 남동생들속에서 뤼실은 오롯이 혼자 한쪽에 서 있는 아이였다. 보통의 아이들과는 약간 달랐던 아이.

 

 

엄마는 광활하고 어둡고 절망에 찬 땅이었다. 한마디로 위험한 일이었다.  (14페이지)

 

 

가족의 역사를 구성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르고, 때로는 상치되기도 하는 기억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별들 같았다. (44페이지)

 

 

엄마의 삶을 조사하면 할수록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추악한 진실이 드러났다.

감추고 싶은 비밀,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비밀, 그걸로 인해 엄마 뤼실의 삶이 나락으로 빠졌을수도 있었던 일들이 드러났다. 가족에 대한 일이면, 가족 안에서의 일이라며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 뤼실의 가족처럼.

 

 

뤼실의 아빠 조르주가 뤼실을 만지고 강간했을때도 엄마 리안은 모른 척 했다.

그 아이 뿐만 아니라 뤼실의 가족과 연결된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엄마 리안은 그런 조르주에게 참견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정신이 이상해져 몇날 밤을 새워 타이핑을 해 한 편의 소설을 써 모든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음에도 그 누구하나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다.

 

 

나는 내 가족의 가장 즐거운 모습을, 소란스럽고 분에 넘치는 생명력을, 비극을 이겨내는 그 강한 힘을 읽게 하고 싶었다. (161페이지)

 

 

 

 

어쩌면, 가족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냄으로써, 모든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불편할 수도 있는데 작가가 용기를 냈다고 생각한다. 되도록이면 불편한 사실들은 감추고 싶었을텐데도, 진정한 가족이야기, 엄마의 진솔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독자들에게도 전해진 것 같다. 작가는 엄마의 모든 이야기를 쓰며 엄마를 더 이해했을 것이다. 자신이 미처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을 후회하며, 엄마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던 일들을 가슴저미도록 느꼈을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할까? 라고 수없이 자신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사실 가족은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다.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가족간에 상처가 되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가족이라는 이름때문에 아예 외면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지만 마음속에는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게 정신질환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덧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또한 가족일 것이다.

 

 

지금은 병원에 계신 엄마의 삶을 생각나게 한 책이었다.

명절에 뵙고 왔지만, 바라볼 때마다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해 늘 안타까운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한 책이었다. 내가 작가였다면,,,,,,,,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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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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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춘기 시절은 어땠을까?

지금의 아이들이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었으리라.

 

 

생각해보면, 한스 기벤라트의 주변 인물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공부를 잘하면 잘한만큼 기대치가 커져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말들을 했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만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는 앞에 서서 그애의 능력이 빛이 발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사춘기가 되고, 공부보다는 친구들이 더 좋을 나이가 되고 보니 그건 부모 마음으로 되지 않았다. 공부건, 그애의 삶이건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새삼 느끼고 있다. 공부 또한 그 아이가 하고자  했을때 성적도 나오는 것이지 부모의 욕심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는 한스 기벤라트를 내 아이처럼, 한스의 주변 인물들, 그 아이에게 공부를 시켜주는 목사나 교장 들이 꼭 내 모습처럼 보였다.

 

 

마을에서 가장 재능이 많고 명민한 아이 한스 기벤라트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 그랬다.

한스도 교사들, 교장, 이웃 사람들, 목사, 학교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했다. 또한 자신이 좋아했던 산책도 줄였고, 키우던 토끼도, 좋아하던 낚시도 줄였다. 토끼 키우는 것도, 좋아하던 낚시를 줄이고 그리스어 공부와 히브리어 공부에 매진해 모두가 원하던 '주시험'에 합격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한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들이 그러하듯 그곳에서 한스와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헤르만 하일너와 친해지면서 그가 했던 행동들을 같이 하게 된다. 모범생이었던 한스가 친구와 함께 어울려다니며 공부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자 교사들과 친구들은 그에게 차갑게 대하고 한스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된 한스는 숲속을 산책하며 마음을 달래고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독일 태생인 헤르만 헤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책 속의 주인공 한스와 닮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시대의 사춘기 소년들과 지금의 사춘기 소년들의 모습이 너무도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학교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특별반을 운영하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기를 기원하고, 주위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때의 상실감은 상당히 큰 것 같다. 깊은 상실에 빠져 있을때 자신 스스로 추스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침 숲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기둥처럼 열을 지어 죽 늘어선 가문비나무들이 한없이 넓은 숲의 홀을 푸른빛이 도는 초록색의 둥근 지붕으로 덮고 있었다. 큰 나무 밑에 자라는 관목은 별로 없고 여기저기 블루베리 덤불만 있을 뿐이었다. 대신 모피처럼 부드러운 이끼 담요가 몇 시간이나 걸어도 끝이 나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키 작은 월귤나무와 에리카 꽃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슬은 벌써 말라 있었다. 아침 숲 특유의 후덥지근한 기운이 꼿꼿한 나무들 사이에 감돌았다. 햇볕의 따뜻한 온기, 증발한 이슬, 이끼 냄새와 송진과 전나무 잎과 버섯 냄새가 뒤섞인 그 기운이 몽롱하게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듯 휘감았다. (53페이지)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는데 그의 책은 고민하는 십대들의 심정을 많이 대변하고 있었다. 위의 문장에서처럼 한스가 산책을 나갔을때 보는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가 안내하는 숲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요한 아침의 숲에서 이끼 위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보는 풍경,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눈부신 햇볕을 바라보는 일이 그렇다. 

 

 

 

 

그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영혼은 다른 세계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 세계에서 그의 영혼은 낯설고 불안하게 날개를 파닥이며 아직 편히 쉴 곳을 못 찾고 헤맸다.  (112페이지)

 

 

지금의 십대 아이들도 수많은 고민으로 마음속에 격랑을 안고 있다.

자신이 목표한 일에 매진을 다 하지만, 부모의 과도한 욕심으로 엇나가기도 한다. 한스처럼 수레 바퀴 안에 깔린 아이들, 우리의 십대 시절도 그랬고, 지금의 십대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른이어도 수레바퀴 아래에 갇힌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목표를 세워두고 강력하게 추구해 나가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는게 진정 행복한 일인지 살펴봐야 겠다. 더불어 부모인 우리를 뒤돌아보며 한스의 주변 인물들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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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 프린스 -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
이준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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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란 나라의 왕은 몇 명의 왕을 제외하고는 거의 적장자가 왕이 되었을거라 생각했다.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거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읽던 차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적장자 계승원칙을 따르려 했지만, 500년 조선 왕조 스물일곱 명의 왕 가운데 적자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일곱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장자의 왕위계승은 아버지가 되는 기쁨을 제일 먼저 안겨준 자식에게 애틋하고 각별한 정을 느끼기 마련이며, 그런 장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싶었을것이고,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도 가장 무난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들은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했고, 어떻게든 다음 왕위를 주려는 세자의 부덕한 행실로 인해 폐세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역할이 너무 커버린 세자를 견제하기 위해 왕이 될수 없었다.

 

 

저자는 조선 시대의 왕자들, 특히 비극적인 운명을 살다간 왕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총 5장에 걸쳐 비운의 왕자들을 소개하는데 첫번째 장이 정종 이방과의 아들인 불노와 지운이고, 두번째 장에서는 태종의 아들인 양녕대군이다. 세번째 장은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의 적장자인 월산대군 이정과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 이현이며, 네번째 장은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 다섯번째 장은 인조의 적장자 소현세자가 그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왕자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양녕대군과 소현세자이다.

언젠가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대왕 세종'을 기억한다. 드라마에서는 양녕이 충녕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미친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고 나왔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야사처럼 일부러 왕세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서 양녕이 미친척했기보다는 어렸을때부터 왕재 교육을 받으며 억압된 생활과 감시로 인해 방탕한 생활을 해 태종으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병자호란후 배반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아비의 맹세로 볼모로 청나라고 간 소현 세자의 이야기를 그린 김인숙 작가의 『소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들이되 임금의 적이 될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세자를 그린 책이라 참으로 안타까워 했었다. 또한 긴 세월동안 볼모생활을 하던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때도 이미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했을수도 있었다는 것을 언급한 것도 다시금 마음이 아팠다.

 

 

보통 자식간에는 한없이 사랑으로 대할 관계도 정치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숙적으로도 변할수도 있는 비정한 관계라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그들도 궁궐 밖 평범한 일상들을 꿈꾸었을까? 아니면 진짜 권력을 탐하려고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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