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구입한 시집이다. 또한 SNS에서 이성복 시인이 번역한 작품 『좁은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시집부터 만나고 싶었다. 그의 시집 중 『남해 금산』을 먼저 읽고자 했으나 신작을 먼저 읽었다. 이 작품은 이성복 시인이 10년만에 낸 시집이며 '래여애반다라'라는 제목을 썼는데, 이는 신라의 향가 「풍요風謠」(「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인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를 썼으며, '오다, 서럽더라'라고 풀이된다고 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한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서러움을 위안하는 내용이라고 시집의 발문에서 시인의 제자가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 시집을 펴 읽기 시작했을때는 마음의 울림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뒷 쪽으로 읽어갈수록 시의 제목들이, 시어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다시 앞장으로 와 처음부터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시집의 첫편부터 마음속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시어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시집의 첫편을 먼저 보자면,
그 봄, 청도 헐티재 넘어
추어탕 먹으러 갔다가,
차마 아까운 듯이
그가 보여준 지슬못,
그를 닮은 못
멀리서 내젓는
손사래처럼,
멀리서 뒤채는
기저귀처럼
찰바닥거리며 옹알이하던 물결,
반여, 뒷개, 뒷모도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
-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시는 한번 읽어서는 제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다지 와닿지 않는 시도 다시 음미하며 읽으면 그 시의 의미를 조금은 알듯 하다.
짧은 시어 속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와 더 나아가 나는 시 속에서 나의 삶을 반추하고 있었다.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 來如哀反多羅 3
아주 일상적인 일을 적어놓은것 같지만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나의 시간이 아닌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는 구절이 참 서럽고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시인이 올해 만 육십 세 라던가. 그래서일까. 시 속에는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시인의 마음, 아직 살아 있음에 간절한 시간들,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들이 보였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서럽다는 걸 시어들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중 략-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중 략-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중 략-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속삭였다.
-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후 략-
-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나이 육십이 넘어가면 죽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한 시 들이 많았다. 장인 장모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들, 물고기의 죽음, 새들의 죽음으로 또 다른 생명을 구하는 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글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소설이든, 에세이이든, 시이든.
글에서 느끼는 위안은 아주 크다. 아주 짧은 몇 줄의 글에서도 우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감성을 지녔다. 소설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글인 시.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고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시는 마음을 드러내는 창. 더이상 서럽지 않기 위해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