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교회 - 권력에 중독된 한국 기독교 내부 탐사
김지방 지음 / 교양인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점점 극으로 치닫는 한국 교회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도의 수가 줄고 있는 경향을 보아하니, 이제 몇년 지나지 않아서, 한국의 교회가 다 몰락하고, 그 많은 목사들이 실업자가 되겠다라고. 그건 하비콕스의 <세속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49)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몰락해 가는 한국 교회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이상한 애증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는데, 한국 교회는 '양극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고, 소수 재벌교회들(세계 종교건물 중 규모와 교인의 수에서 단연 100위권 안에 들어가는 매머드 교회들)을 제외하고 다들 쉽게 몰락할 것 같다. 또한 개신교 자체의 생존 양상이 사회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숨쉬면서 그들에게 참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지 않는 것이 곧바로 불이익이 되는 세상을 만들꺼라는 공포를 안겨주는 것으로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의 문제가 종교적 신념이라는 다소나마 시장에서 '다양성'의 근거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미시적 권력의 문제로서 생활세계에 존재하게 될 것이며, 거시적 권력의 문제로서 '개신교 권력'의 문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미시적 권력 차원의 예를 들면, 다른 어떤 종교도 그렇지는 않은데, 교회를 다니는 상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굳혀지고 있다(특히 남자와 그 부모가 교회를 다닐 경우는 개종을 하던가, 헤어지던가 해야하는 일도 많은 듯 하다.).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자유'라는 것 자체가 어떤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어서 결혼에 있어서 떳떳한 불충분함으로 인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시적 차원의 예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이 책은 그것을 추적한 다큐멘터리이다.


정치교회,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에 관하여

저자가 파헤치고 있는 것들은 교회의 '권력화'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거시적 차원에서의 정치'에 중독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파헤쳐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서 왜 그것을 걸고 넘어가는 가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처음 꺼내는 이야기가 그래서 헌법 20조의 내용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물론 그렇다하여, 지금 그 문자 그대로의 헌법 20조의 내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을 되새겨 보면서 한국 교회를 보자는 거다.

2007년에 대해서 저자는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어필한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있는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의 이야기나, 그 외의 보수적 교회들 대부분은 사실 크게 이야기하거나, 작게 소근거리거나간에 특정후보를 밀었다. '장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봐야하는 문제가, 모든 한국 교회가 보수적이냐는 문제와, 보수적 교회들이 일관되게 한 후보를 밀었냐는 문제인데. 전자의 경우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계열의 진보적 교회들은 확연히 분리되는 감이 있으며(그 중 원로 목사들은 좀 다른 색깔을 가지기도 한다.), 보수적 교회들의 집단인 한기총의 경우에도 두 후보로 갈리는 경향도 보이기도 한다. 당시 야당의 2명의 후보 중 한 후보에 대해서는 재벌교회들이 지지했다고 보이지만, 다른 한 후보의 경우 한기총 권력에서 소외된 다른 교회들이 지지하는 경향도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저자는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조찬기도회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한국의 기독교 대부분은 사실상 87년 이전까지 '정교분리'라는 명분을 크게 세우면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고 그들은 말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억압적 체제에서 '안위'를 택하면서 교회는 성장했다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극우적이고 반공적인 테제를 가지고 내려온 평남쪽의 서북 개신교가 강하게 뿌리 내렸다는 점이 그러한 정치적 분위기를 오히려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정교분리'의 보수적 교계와 달리 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실천적인 목사들과 감리교 쪽의 목사들은 사회적 실천과 정치적 불의에 대해서 명백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말하면서 도전했고, 탄압을 받긴 했지만, "교회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일조했다.

하지만 87년 이후의 개신교는 점차 정치, 권력, 사회적 아젠다 들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그건 한편으로 교회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전의 기성질서에 대한 회고적 방향으로서의 교회의 '정치적 지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 교회들은 한편으로는 큰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보수 교회들의 연합체를 통해서, 또한 NGO를 통해서 한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97년 이후 07년까지 '북한' 문제와 일반적 '정치적 민주화'라 칭하는 것에 대해서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정권이 집권하자,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면서 07년에 이르러 분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리들이 마냥 단단한 것들은 아니다. 사실 그런 목소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의 것일 뿐, 교회의 평신도들이 그런 생각을 일관되게 갖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고 훨씬 약한 수준에서 그들의 발언에 동의한다. 그리고 '한기총' 같은 대형 개신교 집단 역시도 강한 수준에서의 연합이 아니라, 겨우 겨우 적자를 면해가면서 대형교회의 '쾌척'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를 무시할 수가 없는게,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도 이야기했던 '프레임'을 선점하는 효과를 가지는 데에 있다. 목사들이 반드시 강력하게 '누구 찍어라'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기총이 친미 집회를 한다해서 그들이 개신교인들을 투표장으로 끌고와서 투표를 하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과, 교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거룩한 소리'에 섞어서 한 마디를 더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섞여지는 '한마디'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투표장에서 투표소 앞에 선 신도들의 마음에 쌓인 나머지 파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난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들을 한국에서 다시 재발견한다는 느낌이다. CBS와 극동방송에서 설교를 받아서 편집할 때, 목사들의 '정치적 강성발언'을 잘라놓고, 결국에 대형교회들의 지원이 아쉬워서, 그것들에 대해서 사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실을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커지기 시작한 '복음주의'와 '보수주의' 운동의 파장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지친 삶의 회복과 치유를 원하고자 교회로 교회로 향했던 이들에게 쏟아지는 은혜의 목소리에 섞여진 이러한 복선을 깔아놓은 '정치적 선동'이 한국의 정치적 지향의 위치를 더 보수화 시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러한 교계의 '보수화'를 정치적 세력들이 받아들이고 '천국적 가치'를 사회에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만한 정략적 차원의 도구로만 활용한다는 데에 있다.

   
 

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억지로 신앙인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이도 있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확장한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아쉬운 점은, 자신들이 국가 운영을 맡겠다고 자처한 정치인이면서도 정작 종교 문제는 정략적인 차원 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고려할 뿐 국가 운영에서 종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p.272).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개신교의 정치참여 그 자체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개신교가 과연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지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선민사상에 빠져서 배타적 신앙만을 가지고 '대속적 신앙'에 참여할 지를 놓고 협박을 하고 을러대는 그들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물신주의에 빠진 민중에게 해독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마취제를 제공하고 있는 교회, 어느 순간 '축복'이 되어버린 '치부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가?

많은 교회에 대한 비평들이 한결같이 이야기 하지만, 그건 너무나 기독교가 '만만하게' 인식되는 탓이 클 것이다. 정말 '예수를 닮아' 십자가를 지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는 없고, '믿쑴니까?'에 '아멘'만 외치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것 같은 느낌만 제공하는 교회와 그에 안위하는 평신도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한국 개신교가 아닐까?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교회가 오히려 탈속화되어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대화해야할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배신자들의 기독교를 벗어나야 한국의 개신교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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