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사회 카이로스총서 1
김만수 지음 / 갈무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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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만수("살아있는 신화 리영희"의 저자)라는 사회학자의 저작이다. 그는 원래는 국문학 전공이었으나, 피끓는 투지와, 맑스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학부부터 다시시작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책 "실업사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맑스의 후기 저작, 특히 <자본>의 3권에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있는 것이 '이윤율 저하의 법칙'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초기의 산업이 불변자본(공장, 토지 등의 생산수단)과 가변자본(임금, 연구비, ....)등의 비중에서 가변자본의 상대적으로 그 위치가 더 컸다면, 점차 산업이 발전하고 고도화 될 수록 불변자본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이러한 논의는 맑스의 공식(재생산 표식)을 통해서 이윤율 저하의 논의와 여러가지 논의들을 만들어 내어왔다.))

저자는 이에 주안점을 두고 한국의 실업의 필연성(가변자본의 비중이 낮아만 지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법칙을 통해서)을 추론해 내고 이를 회계학적으로 증명해 낸다.

사실 이 책에 촛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은 회계학적으로 불변자본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파급력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업에 대한 편견은 무엇인가?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야만 할 것만 같은 착각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이, 마치 카드 빚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은 사실상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업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한다.

산업이 고도화 될 수록, 설비투자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임금과 고용은 서로 계단식으로 나선형 하강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실업에는 개개인의 탓도 없다고 할수 없지만, 실업률에 있어서는 정치경제적구조(특히 기업의 이윤율과 산업구성비)가 결정적이라고 볼수 밖에 없다.

도서관에서 매일 죽치고 노인정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예비역들과, 벤치에 앉아서 암울한 얼굴로 그러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취업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누구를 욕할 것인가? 능력의 부재인가?

또한 경기가 좋아진다고 그것이 고용을 보장하는가? 절대 아니다가 답이다. 경기가 상승한다고 인력에 대한 투자가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업이 선택하는 답은 새로운 이윤율 높은 사업에 도전이나, 자본의 축적을 강화할 따름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중(M&N 따위의 잘나가는 사업에 대한 인수 합병)을 추구할 따름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단을 저자는 송곳처럼 찌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분석과 달리 그의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대답은 너무나도 낭만적이다.

노동계급의 사회세력화와, 노동시간 단축(주 20시간까지..),, 최저임금제...

언제나 진보세력이 떠들어 왔던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루어 지지 않기에 더욱더 요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들을 이룰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첫머리를 기존의 실업률 통계가 '親 자본주의적'임을 증명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의 발상과 마지막의 인터넷 'www.incruite.com'의 네티즌들의 절절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분노와 회한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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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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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이 되기전에,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 두번정도 읽었고, 그 때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어이 없게도 이번에 읽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나를 한번 충격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전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사회적 아젠다'를 담은 소설이라고 혼자 정의하고, 여기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후기 산업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구조적인 정의를 했었던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_-+

마치 그 소설에 존재하는 윤호가 만났던 옆집 아이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 '10대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그 현장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차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각자의 눈을통해 계속 옴니버스 방식으로(연작소설의 기법을 사용한다.) 이야기는 전개되나 이야기가 연결됨은 다 읽고나서 생각하면 오히려 매끈하며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태일 평전'과 같이 현장의 모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임노동'관계에 대한 묘사요. 그들이 단순히 '선/악' 구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서 길러진 이들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삶이 노동 현장에서 어떻게 기계에 훈육되는 가를,, 챨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즈에서 '시간'과 '공간'에 의해 분절되는 것을 보여주듯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반부의 꼽추와 앉은뱅이의 이야기(맨 마지막에서도 나오지만..)부터 시작하여 은강 기업 사주의 손자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의 부분을 보면, 조세희는 우리에게 분노를 느끼게 한다.

대대로 천민신분으로 살아온 난장이의 아내, 그리고 평생 천대받는 일들을 하면서 '우주공간'을 꿈꾸고 '사랑으로 사는 세상'을 꿈꾸는 난장이, 그리고 그의 자식들의 이야기..

세상의 속물을 싫어하지만, 그와 닮아가면서 약해지고 있는 신애와 그의 남편. 똑똑하고 영민한 그녀의 자식들.

그와 난장이의 연결.

윤호와 지섭... 지섭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싶지만,, 계속 일탈하는 지식인의 상을 보여주는 윤호.. 그에게 우주를 이야기하는 지섭..

또 난장이를 찾아오는 지섭에게 느낀 것이 있어 노동운동가로 변하는 영호..

결국 영호는 은강 기업의 사장 동생에게 칼부림을 하고야 만다.

이 시점까지 분노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한사람의 감정이 아닌, 구조적이고, 자본주의사회의 보편적인 모순인 것을 은강 기업의 사주 손자는 적실하게 보여준다.

영수,지섭과 대척점에 서있는 은강의 손자는 어떠한 이념을 원해서 갖고 있거나, 어떠한 판단을 단순하게 자신 고유의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길러진' '훈육된' 인간일 따름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단순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인간적' 분노 보다 더 '황당한' 지점에 있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이다.

은강 손자의 이야기가 그 실마리가 혹시 되지는 않을까?

결국 읽고서 내가 느낀 중요한 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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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근대성 문화과학 이론신서 6
이진경 지음 / 문화과학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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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진경 선생이 '여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것은 87년에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사사방)을 쓸 때에 공안당국의 실명 추적을 막기 위해서 썼던 가명이고.. 그의 실명은 박태호이다.

예전의 이진경이 '스탈린 주의자' 혹은 '강도 높은 맑스-레닌주의자'였다면,, 현재의 이진경은 그러한 틀에서 '탈주'한 신좌파라 볼 수 있다. (윤건차의 1990년대 한국 사상의 흐름을 보면, 이진경은 신좌파로 분류된다)

이진경이 90년대 부터 잘나가는 '철학 선생'으로 통했을 때, 그에 대해서 변절자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실 그는 계속 '근대성'과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고민을 가지고 맑스를 쳐다보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가 데카르트부터 최신의 들뢰즈-가따리까지 천착하게 된 배경에는 맑스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근대성'의 경계에 빠져서 허우적 대는 한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따라서 맑스가 가지고 있었던 '암시'로서의 '주체생산양식' 그리고 곧바로 그 것이 근대에서 어떻게 형성되는 지에 대한 탐구이며, 오히려 더욱더 급진적으로 혁명적 사유를 진행한다.

우선 자본주의의 '내부 안의 외부' ==>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에 대한 반대하는 '정치경제학'을 상정해 왔지만, 실제로 맑스가 진행해왔던 것은 '정치경제학'의 공리계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것을 이진경은 보여준다.. 그 것은 노동가치론(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 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였고, 이는 사용가치가 질적인 것이고, 노동이 질적인 가치임에 반해서, 노동력은 양적인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의 '외부'를 발견하는 것이며, 잉여가치라는 맑스의 중요한 명제가 사실은, '부불노동'의 '양'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해서 '과잉노동력 공급'(과잉인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여주며, 하지만 그러한 메커니즘 자체로 자본주의가 완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본원적 축적의 문제를 설정한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입장에 대해서 '본원적 축적'은 그 자체로 '수탈과 파괴'로 출발한 것이며, 실제 본원적인 축적이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계보학적인(뿌리를 올라가서 정통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부터 올라가서 그 근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가를 밝히는 방식) 분석을 한다.

이진경에게 자본주의는 공리계이다. 이질적인 요소의 명제가 하나씩 보태지다보면 깨질 수 밖에 없는.. 그 것을 괴델의 수를 통해 보여줄 때 최첨단 이론을 접목하는 그의 식견은 뛰어남을 뛰어넘어 섬뜩할 정도의 진행을 보여준다.

이제 그가 천착하는 문제는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 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시간-기계', '공간-기계', '기계-기계'와 인구학으로 명명되는 데,,그 중 앞의 세가지는 해부 정치학의 범주이고, 마지막의 것은 생태 정치학의 영역이 된다. 이는 미시정치학과 맑스주의의 접목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로자의 사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발성'과 '자생성'의 모습..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에서 '코뮨적 요소'와 '테일러 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테일러 주의적인 근대적 요소들, 하지만 토요일의 노동에 관한 것은 코뮨주의의 노동에 대해서 재 사유하게 만든다.

진정한 혁명적 사유는 더욱더 근본적이 어야 한다. 기존의 '자본주의-근대'의 배치관계를 뛰어넘는 것들로!! '생산양식'만의 변혁이 아닌 '주체 생산양식'의 변혁을 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이다.

맑스주의에 대해서 고답적이지 않았던 그의 서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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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 2008-01-31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진경님이 주장하듯, 저도 원래 마르크스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기초 사상이된 벤담의 공리주의 영향에 의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점에서는 이진경님이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시되네요..^^;; 그 외에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지 몰라도.. 뭔가가 어렵고 그렇네요.(아직 자본을 읽을 엄두를 못내서 그런가;;) 어쨌든 최근에 마르크스에 빠진 지나가던 1인이었습니다^^;;

양승훈 2008-01-31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했다기 보다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생각이 들구요. 그런 관점은,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겠죠? ^^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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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흘러간 노래에 속하게 되었지만, ‘넥스트’의 ‘도시인’이라는 노래에 나왔던 도시인은 매일 매일 주어진 ‘구획화’된 일상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해야 한다. 한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직업, 계급, ...)에 걸 맞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근대인들의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다.

티벳의 황무지인 라다크의 행복한 사람들은 그러한 근대인들에게 ‘대안’적 사유의 장을 제공한다.

먼저 ‘새로운 사회’의 공동체 구성의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 사회’라는 문구를 들었을 때, 나는 맑스가 보여주었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라다크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심지어는 다양성, 창의성조차도 상품이 되어서 팔려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노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으며 자신 나름의 ‘속도’와 ‘방향’에 맞추어, 구성원간에 일률적인 평등의 원리가 아닌 ‘차이의 인정’과 그에 따른 ‘조화’의 원리 살고 있는 그들은 우리에게 꿈을 꿀 여지를 제공한다.

또한 라다크의 사람들은 ‘땅’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유목, 경작 등으로 삶을 유지하는 방법과, 자연의 회복력을 통한 치료의 방법 등이 그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해보았지만, 서구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점차 우리에게 익숙해져버린 ‘소비사회’에 매몰된 나머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진보는 ‘지속 불가능한 개발’, ‘굶어죽을 자유만의 보장’을 위해 왔다. 이제 ‘오래된 미래’와 접속하여 다시 자본주의의 황폐한 ‘파괴적-기계문명’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우리의 다리로 딛고 일어서는 연습’을 해본다면, 그것이 진정한 ‘웰빙’(질적인 삶의 추구)이 아니겠는가?

(2004년 5월, 건대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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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속살 - 동시대인 총서 9
임지현 지음 / 삼인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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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속살"-임지현.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한번쯤 뒤집어서 볼만한 책.. "임지현이 조선일보 기고했잖아."라고 치부하고 눈길 안주기엔 너무나 아까울 만큼 'cynical'하게 쏘아버리면서도 정교한 책이다. 책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해버린 90년대의 시점부터, 우리는 '절망'했고. 혹은 '환희'했다. 하지만, 왜 망했는가에 대한 고찰은 부족했다. 결국 '국가주의'의 반복에 의한 '근대'의 억누름, 즉 억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집권 엘리트들만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만은 없다. 자발적으로 동원된 '민중'들의 힘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화적 진지전'의 구축에 실패했던 '혁명'세력이 '집권'세력이 되어서 기존의 '억압기제'들을 정교화 하여 오히려 '민중'들을 억압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파시즘들,, 겉은로는 진보를 말하고 있지만, 진보를 '씹어먹고'있는 우리들의 모습들..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회주의을 '근대화'의 논리로 만들어 버린 제3세계의 민족주의자들,,

그들은,, 자본의 공격에서 오는 폐혜들을 오히려 '자본적' 방식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다만 '민족'적인 프라이드를 갖고 싶었기에,, '서구식 자본주의'의 탈 대신 '자주적 사회주의'를 택했던 것이었다. 마오이즘, 김일성주의, 호치민이즘... 등등..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로자'에서 찾고,, '디오니소스의 노동'을 말했던 '네그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는 '규격화된 노동'의 시대가 아닌 '즐기는 노동'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 '탈'근대의 시기는 아닐런지.. 그리고 이제 대단위 군중의 역사에서 한사람 한사람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일상의 역사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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