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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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추는 사랑이다’(테드 창 소설집, 숨, 엘리, 2019)

기술발전의 역사에는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안간힘이 퇴적되어 있다.
'세월의 문'(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통해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가거나,
여기 있는 내가 아닌 너머의 어딘가에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또다른 내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평행우주,'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무한의 상상력을 추동시킨다. 테드 창의 소설은 과거에 돌아가는 인물이 나오지만 과거를 부정하거나 과거의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 결과는 변하지 않지만 불변을 자각함으로써 더욱 심오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들이 나온다.
'자유의지'와 '선택'의 의미에 관해 고민하고,
인간처럼 가상의 실존에 해당하는 '디지언트'들이 인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
섹스를 하고, 슬픔과 고통을 겪고, 삶의 의미에 대해 자각하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구전 문화와 활자 문화의 충돌과 과학과 종교의 혼융(종교의 과학화와 과학의 종교화 같은) 같은 가치 충돌문제를 내재한 작품들까지('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그럼에도, 이 모든 문제의 서사들을 관통하는 척추는 사랑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인간은 그들과 관계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곁과 옆에 있는 것들과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이 없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56-57쪽

「숨」

-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75쪽

「우리가 해야 할 일」

-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94-95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애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블루감마 사의 방침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올바른 것이었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234쪽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235쪽

- 애나는 잭스가 리얼 스페이스와 현실 세계 양쪽에서 몇 년에 걸쳐 성숙해가는 상상을 한다. 법인화해서 권리를 얻고, 취직해서 생계를 꾸리는 상상을 한다. 충분한 자금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필요할 경우 새로운 플랫폼으로 스스로를 이식할 수도 있는 디지언트 서브컬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디지언트와 함께 자라난 새로운 인간들이 잭스를 포용하고, 애나의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을 통해 디지언트들을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타협하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희생을 감내하는 상상을 한다. 247쪽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 하지만 저는 바로 그 레지널드 데이시의 아들이기 떄문에 그의 이론이 틀렸음을 두 번이나 입증하고 말았습니다. 제 전 생애가 아버지의 애정이 아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65쪽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THE TRUTH OF FACT, THE TRUTH OF FEELING)」


-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287쪽

- 모스비에게 중요한 것은 글이었다. 모스비가 설교를 미리 써 놓는 것은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특별한 단어 배열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징기는 깨달았다. 일단 자기가 원하는 배열을 찾아내면, 필요한 내내 그것을 고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6쪽

- 글은 입 밖에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어들 또한 단순한 말 조각이 아니었다. 단어들은 생각의 조각이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면 생각을 벽돌처럼 잡고 다른 배열들 속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단지 말을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단 보고 나면, 그것들을 개선시켜 더 강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297쪽



- 자서전에서 진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문학 평론가인 로이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299쪽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 300쪽


-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329쪽

「거대한 침묵」

페르미 역설에 관해서는 이런 가설이 있다. 지적 종들이 안 보이는 것은 적대적인 침략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존재를 감추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336쪽


「옴팔로스」


- 주여, 저는 지금껏 제 삶을 우주라는 경이로운 매커니즘의 연구에 바쳤고, 그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내가, 당신의 의지와 저를 만든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92쪽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 프리즘은 두 갈래의 우주가 공유하고 있는 메모패드에 가까웠다. 403쪽

- 데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원래 질문을 기억해보세요. 우리가 다른 평행세계들에 관해 알고 있는데,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 아니었나요? 저는 단연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계에 있는 당신의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의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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