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강의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이트 전집 15권 전면 개정판 출시 기념 '함께 읽기'

열린책들에서 1997년에 출판한 《프로이트 전집(전 15권)》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프로이트의 책들은 늘 버킷리스트에 있었지만, 혼자 읽다가 완독하지 못하거나 여럿이 함께 읽으려다가 불발되어 버리곤 했었다. 이번에 개정판 출시를 기념으로 <책중독자> 멤버들과 '함께 읽기'를 시작했다.

시리즈는 1권부터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우리는 첫 책으로 『정신분석 강의』를 선택했다.

『정신분석 강의』는 흔히 '프로이트 입문서'로 꼽히는 책으로, 그가 주창한 '정신분석 이론'의 핵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1915~1916년과 1916~1917년의 두 번에 걸친 겨울 학기에 의사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5쪽)으로 모두 28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와 꿈을 분석하며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고, 신경증과 관련해서는 리비도와 성적 충동, 불안 등의 개념을 소개한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의 모든 경향이나 여러분의 모든 사고방식은

불가피하게 여러분을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대자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러한 본능적인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겨 내야만 하는지

여러분에게 주지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 강의』, 16쪽

당시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신경증이 있는 환자들을 의학적으로 다루는 하나의 치료법(15쪽)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정신분석의 어려움들'에 대해 토로한다. 일반적인 치료는 의사의 치료행위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만, 정신분석은 피분석자와 의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하는 것만을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18쪽)라고 의혹을 제기하곤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로 제기된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는 것도 없고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을 도대체 어떻게 배울 수 있으며 그 주장의 진실성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21~22쪽) 이에 그는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에 반감을 가지게 된 두 가지 원칙을 언급한다.

1. 우리의 정신적 활동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2. 성적 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 질환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

이러한 편결들은 정서적인 힘들(예를들면, 교육 같은 것들)에 의해서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과 싸우는 것은 아주 힘겨울 수밖에 없다며, 우리(특히, 정신분석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입견 없이 들어줄 것을 당부한다. 만약 이런 당부가 없었다면 나 역시 귀를 뾰족하게 세우고 덤빌 준비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범하는 실수도 마음 속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종종 범하는 실수들, 이를테면 어떤 말을 하려는데 다른 말이 튀어나오거나(잘못 말하기) 문서에 씌어 있는 것을 다르게 읽을 때(잘못 읽기), 물건 둔 곳을 잊어버려서 찾지 못할 때(잘못 놓기), 약속을 자주 잊어버리고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행위들도 그저 단순한 실수들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 범하는 의도된 실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사소한 실수들도 정신분석의 관찰 재료가 될 수 있으니, 아주 작은 징조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말고 관심있게 지켜보라고 한다.

실수 행위는 심리적인 행위이며, 두 개의 다른 의도들 사이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작용되는 어떤 경향이 있다.(101쪽) 만약 문서 작업을 할 때 지속적으로 오탈자를 만든다면 그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며, 약속 시간에 계속 늦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충격적이다. 나는 그저 습관처럼 범하는 실수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떤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니.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실수를 나 자신도 저지르고 있으며, 그 실수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아닐까.

성취되지 못한 낮의 잔재가 꿈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연구의 일환으로 꿈을 연구했다. 그는 꿈 그 자체가 신경증적 징후(113쪽)라고 말한다. 꿈은 실수 행위처럼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현상이지만, 실수처럼 관찰할 수 없고 꿈을 꾼 사람의 진술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꿈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잊혀지기도 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할 때, 꿈꾼 이가 말하는 대로 그 꿈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사람이 꾼 꿈과 다를지라도, 다르게 말한 꿈 자체도 꿈꾼 이의 무언가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꿈은 수면 도중의 정신생활(120쪽)로 수면 상태에서 영혼에 작용되는 자극에 대해서 영혼이 반응하는 현상(123쪽)이다. 꿈은 자극을 단순히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넌지시 암시해 주며, 어떤 관련성 속에 배치시키고 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기도 한다.(133쪽)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 우리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한다.

1. 꿈은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심리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

2.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실제로는 알고 있는 정신적인 것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지난 밤의 꿈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고, 연상 기법을 통해 감추어진 꿈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꿈은 본래의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고,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꿈의 상징적 의미를 읽는 것이 중요한데, 어차피 우리는 신화나 종교, 예술, 언어 등을 통해 상징을 자주 접해 왔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들을 차용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꿈들이 성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273쪽) 이런 꿈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유아기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고 있다. 또, 꿈은 밤마다 우리를 유아적 단계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우리가 망각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체험들이 꿈속에서는 도달 가능하다고 한다. 성적인 상징들로 가득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자기 검열), 그것은 단지 유아기 때 가지고 있던 것이 표출된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 꿈이 아무리 허황되고 부끄럽더라도 자신의 꿈으로 인정하라는 프로이트, 만약 프로이트의 의자 앞에 앉게 된다면 가감없이 떠오르는 그대로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편,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취하지 못했던 낮의 잔재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꿈-작업을 통해서 그 (무의시적인)소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해야하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쾌락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불안을 느끼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꿈과 관련된 것들은 그의 또다른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리비도가 좌절되면 신경증이 생긴다!

신경증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번에도 그는 당부의 말을 남긴다.

"신경증이 나타나는 영역은 여러분에게 낯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의사가 아닌 한, 그리고 제가 이 영역에 대해서 알려 드리지 않는 한, 이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잇다고 하더라도, 판단의 대상이 되는 소재 자체가 낯선 것일 때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마치 내가 독단적으로 강의하거나 혹은 여러분이 내 말을 절대적으로 믿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348쪽

"여러분은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정신분석학 강의가 일종의 사변적 체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 강의는 오히려 환자를 직접 관찰한 내용을 표현한 것 아니면 관찰한 내용에서 추론해 낸 결과로서, 모두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349쪽

"나는 소위 학문적 논쟁이라는 것이 대체로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논쟁은 대개의 경우 항상 인격적 차원으로까지 치달리기도 합니다." 350쪽

프로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시하는) 어린이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리비도'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리비도는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본능이 드러내는 힘(444쪽)을 드러낸다. 즉 배고픔이 영양을 섭취하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처럼, 리비도는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힘(444쪽)으로,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에너지이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리비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하는 경우(좌절), 좌절된 만족감을 대체하기 위해 심리적 갈등의 결과가 '신경증'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모든 리비도 충동의 좌절이 신경증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신경증 환자가 되지 않는다면, 성도착자나 페티시즘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억압들과 함께 증상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병인으로 작용하는 갈등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614쪽

우리의 노력이 지향하는 목표는 다양한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이나 억압들의 제거, 그리고 상실된 기억의 복원 등과 같은 요인들은 모두 동일한 경과를 지향합니다. 614쪽

이 치료 요법은 질병의 현상들을 공략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질병의 원인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분석은 일종의 인과적 요법입니까? (…) 우리의 심리적인 요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과관계의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현상들의 근원들은 아니지만, 증상들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입니다. (…) 결국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 무의식은 기억 속에서 억압에 의해 그것이 발생했던 곳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억압이 제거될 경우, 무의식이 의식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억압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 먼저 억압을 찾아내고, 이 억업을 유지하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615~616쪽)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란 어떤 질병을 직접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 질병의 (심리적인) 병인이 될 수 있는 것을 제거해서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경증 강의 부분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실수 행위나 꿈에 비하면 다소 낯선 신경증이라는 질환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흔히 '화병'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나라에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신경증의 증상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경증'이라는 진단명 자체가 사라져서 더 낯설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프로이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

프로이트는 매 강의마다 제기될 수 있는 의문들과 반론들을 예상해서 꼼꼼하게 답변해준다. 역자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그 내용을 깨우치도록 배려한 '반권위주의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자기방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부정 당한 경험이 많아서 선택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프로이트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정신분석은 어떻게 행해지고, 정신분석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던 정신분석학을 어떤 편견도 없이 받아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정신분석학과 좀 더 가까워져서 정신분석학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원한다.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 거부감들이 있고, 의문들도 있다. 각각의 강의에는 그 이론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각주로 표시해주고 있다. 그가 연구한 정신분석학은 '경험적 과학'이다. '경험적 과학'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론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데, 프로이트는 평생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고 재정립했다. 그가 『정신분석 강의』를 쓴 이후에도 수정된 부분들이 더러 있고, 그 수정된 부분들은 《프로이트 전집》에 포함된 다른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한 출판사에서 출간한 《프로이트 전집》이 필요하다. 만약 낱권으로 출판된 단행본을 읽었다면, 전체를 일관되게 파악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정신분석 강의》를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일상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의 개념들을 적용시켜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 의문과 거부감이 남아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해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프로이트를 읽는다. '고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서 읽게 되는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1-10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데 표지가 주는 압박이 장난이 아니네요!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이러는것 같아요!

뒷북소녀 2021-01-11 00:04   좋아요 1 | URL
아, 책 읽다가 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저 눈빛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겠더라구요ㅠㅠ
 
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강미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이 19세기를 산다는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오랫동안 읽는 바람에 2020년에 마지막으로 완독한 책이 되어버렸다. 초등학생 때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책, 그 기억으로 선택한 책이다. 내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좋아했냐면, 소설 속 네 자매들처럼 친구들과 연극도 하고, 조처럼 그 연극 대본을 직접 쓰며 조 흉내도 냈었다. 실제는 조의 성격을 닮았었지만 나는 매그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현모양처를 꿈꿨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매그는 허영덩어리였고, 현모양처라니. 세상에!)

왠지 크리스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찾았다. 무의식적으로 어릴 때 읽었던 책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씨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조가 양탄자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불만을 터뜨렸다.

"가난한 건 정말 싫어!"

메그가 낡아빠진 옷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애들은 예쁜 물건을 많이 갖고 있는데 누구는 하나도 없다는 건 불공평해."

막내 에이미가 마음이 상했는지 코를 훌쩍이며 거들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 동생들이 있잖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베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ebook, 12쪽


마치 부인(네 자매의 어머니)이 모두에게 힘든 겨울이니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없이 지내자고 하자 네 자매는 이렇게 한 마디씩 던진다. 이 첫 장면은 짧지만 네 자매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종군 목사로 전쟁터로 떠나자, 집에는 어머니와 네 자매만 남게 된다. 어머니는 매일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메그와 조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가정교사 일을 하거나 대고모에게 책을 읽어주며 돈을 번다. 부끄러움이 많은 베스는 집안일을 돕고, 에이미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난 이후로는 여유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들보다 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을 먹으려는 자매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제 막 아기를 낳은 불쌍한 여자가 살고 있지 뭐니. 지금 그 집에 갔다 오는 길인데 난로가 없어서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침대 하나에 모여 웅크리고 있더구나. 게다가 먹을 것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다 못한 그 집 큰애가 와서 사정 얘기를 하더구나. 얘들아, 우리 아침 식사를 그 집 아이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게 어떻겠니?" ebook, 40쪽


다들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배가 고팠지만, 작은 아씨들(이것은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은 어머니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자기들 몫은 남한테 줘버리고 빵과 우유만으로도 만족하는 이들 자매보다 더 기분 좋은 사람은 도시 전체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으리라. (ebook, 43쪽)


한편, 작은 아씨들의 이웃에는 부유한 할아버지와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들은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의 선행을 전해들은 로렌스 씨가 그들에게 근사한 저녁식사를 선물로 보내준다. 이것을 계기도 두 집안은 마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작은 아씨들은 외로운 로런스 씨와 로리를 위해 가족이 되어 주었고, 로런스 씨도 마치 일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준다. 결국 메그는 로리의 가정교사와 결혼하고, 막내 에이미는 로리와 결혼한다. 로런스 씨가 특히 예뻐했던 베스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안타깝지만, 모두들 베스의 자리를 잊지 않는다.


"난 나이가 차서 미스 마치라고 불리는 것도 싫고, 기다란 드레스를 입는 것도 싫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얌전한 척하는 것도 싫어. 노는 거든 일하는 거든 남자들 생활 방식을 좋아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게 참을 수 없어. 게다가 지금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원망스러워. 마음은 온통 아빠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싶은 생각뿐인데 집구석에 틀어박혀 할머니처럼 뜨개질이나 해야 하다니." ebook, 17쪽


참! 자매들 중 작가를 꿈꾸며 가장 활발했던 조는 집을 떠나 잠시 머물던 곳에서 만난 독일인 바에르 씨와 결혼한다. 친구 로리의 청혼까지 거절한 조였는데, 결혼이라니. 아무리 조의 성격을 독립적으로 그렸다고 해도 당시에는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웠나보다.(아니면 자신과 성향이 닮은 바에르 씨를 너무나도 사랑했거나)


올해 개봉한 영화 덕분에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작은 아씨들』이 있었는데, 어릴 때 읽었던 책의 표지도 이런 표지였던 것 같아서 선택했다. 찾아보니 이 표지가 1868년 초판본 표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조'가 들고 있었던 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 다시 만난 『작은 아씨들』은 지금 읽기에는 너무 두꺼웠다. 시간 대비 가심비가 떨어지는 책이다. 어릴 때는 이런 이야기가 재미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내용의 책을 1000페이지나 읽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힘들다. 그래서 완독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어릴 때 내가 읽었던 책은 이 정도로 두껍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1부만 읽은 모양이다. 이 책은 1부, 2부 합본으로 2부에 그들의 결혼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이 책에는 영화 스틸컷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스틸컷들이 내 독서를 방해했다. 한 명씩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스틸컷도 함께 등장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인물들과 너무 달라서 그때마다 읽는 흐름이 깨져버렸다.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는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등장하는데, 캐스팅 된 배우들은 그보다는 나이가 더 들어보여서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특히, 매그가 저런 얼굴형에 이런 헤어스타일이었다고? 승무원처럼 단정하게 망 안에 머리를 집어 넣고 있는게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책이 있는 반면, 감동이 반감되는 책도 있다는 걸, 최근 자주 깨닫게 돼서 아쉽다. 그저 어릴 때 좋아했던 『작은 아씨들』로 간직하고 싶다.


"나도 아빠가 우리에게 붙여준 '작은 아씨'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ebook, 29쪽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 놀이를 못 하는 일은 절대 없단다. 에이미. 왠지 아니? 형태는 다르겠지만 살아가면서 우린 늘 천로 역정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짐은 여기에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단다. 그리고 선의와 행복에 대한 갈망은 수많은 역경과 실수를 헤치고 진정한 하늘의 도시인 평화로 향하도록 인도하는 길잡이란다. 자, 어린 순례자 여러분, 이제 놀이가 아니라 진짜 생활 속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ebook, 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나 목표는 100권...이지만 턱없이 부족했던 2020년의 독서결산



코로나와 함께 한 2020년.

코로나 때문에 외출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책을 더 많이 읽게 될 줄 알았다.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로 시작한 2020년이었지만

2019년과 비교해도 반도 못 읽었다.

역시 독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과 의지의 문제지.

상반기에는 뉴스 보느라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책을 펼치고 있어도 자꾸 폰으로 실시간뉴스를 검색하게 됐다.

최근에 뉴스 보는 시간을 많이 줄여서

그나마 2020년에 읽은 책들의 반을 최근 2달 동안 소화했다.

그리고 매달 2권씩 읽어야 하는 독서모임 <책중독자>의 힘이 컸던 것 같다.

2월과 5월, 8월에는 읽긴 했지만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다.

모임만 했었더라도 24권은 더 읽었을텐데. 독서모임의 소중함이란.

(2021년이면 독서모임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2020년에도 역시 몇 년 동안 꾸준히 정리하고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




1. 9번의 일 / 김혜진

2. 불멸 / 밀란 쿤데라 ★★★★★

3.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재독]

4.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 이탈로 칼비노

5. 책그림책 / 밀란 쿤데라 外

6. 정체성 / 밀란 쿤데라

7. 톰 소여의 모험 / 마크 트웨이

8. 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9. 페스트 / 알베르 카뮈 ★★★★★

10.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로날트 D 게르슈테

11.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 파올로 조르다노

12. 마의 산 上 / 토마스 만

13. 사랑 밖의 모든 말들 / 김금희

14. 떠도는 땅 / 김숨

15.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16.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17.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 박현주

18. 공부란 무엇인가 / 김영민

19. 스토너 / 존 윌리엄스 ★★★★★

20.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21. 연년세세 / 황정은 ★★★★★

22. 책, 이게 뭐라고 / 장강명

23. 고양이를 버리다 / 무라카미 하루키

24.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 올가 토카르추크

25. 그림자의 강 / 리베카 솔닛

26. 복자에게 / 김금희

27. 로마제국 쇠망사 1 / 에드워드 기번

28.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 호프 자런

29. 올리브 키터리지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30. 꾿빠이, 이상 / 김연수 ★★★★★

31.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재독]

32. 우리가 날씨다 / 조너선 사프란 포어

33. 디에센셜 : 조지 오웰 / 조지 오웰 [재독]

34.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 조너선 사프란 포어

35.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 김이설

36. 이선 프롬 / 이디스 워튼 [재독]

37. 마더 크리스마스 / 히가시노 게이고

38. 12월의 어느 날 / 조지 실버

39. 화이트 호스 / 강화길

4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41. 작은 아씨들 / 루이자 메이 올컷

★★★★★ : 추천책

물론 별점 5개짜리 책들은 더 많지만, 누가 읽더라도 좋다고 느낄만한 책을 선별한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1-01-04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널럴하다고 해서
꼭 책을 읽는 건 아니라는 말쌈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책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읽는
것이지요. 사실 그런 점에 아싸라한
맛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난 잠도 덜 자면서 책을 읽겠다!~
뭐 그런 결의랄까...

암튼 신축년에도 열심히 읽어 BoA요.

뒷북소녀 2021-01-04 16:17   좋아요 1 | URL
아, 신축년, 신축년... 들을수록... 뭔가 새롭게 세우기 좋은 해인 것 같아요.
올해는 정말, 없는 시간을 더 쪼개서 열심히 읽고 기록으로 남기려구요.
작년엔 제가 너무 코로나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요...

신축년에도 변하지 않고, 건강하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막시무스 2021-01-04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 이쁘게 정리가 잘 되었네요! 이 페이퍼 보기만해도 뿌듯하시겠어요!ㅎ

뒷북소녀 2021-01-04 16: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리뷰는 그때마다 못 써서요...
이렇게 필사라도 남기려고 해요.
막시무스님, 새해에도 건강한 이웃으로 잘 지내보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1-01-0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소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뒷북소녀 2021-01-04 16:20   좋아요 1 | URL
아, 이렇게 새해 인사를 나누니, 진짜 새해가 된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님께서도 건강하시구요...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 2021-01-04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페이퍼 뒷북 소녀님에 독서이력들이
2020년 한해 독서 퍼즐 아카이북 페이퍼처럼 멋지네요. ^ㅎ^



뒷북소녀 2021-01-05 13:2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게으른 제가 유일하게 꼬박꼬박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랍니다.
이 맛으로다가요.ㅋ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동률 -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 2019 오래된 노래 [180g 2LP]
김동률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재발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가 사게 되는군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0-12-31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뒷북소녀 2021-01-04 09: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2021년에도 건강한 책 읽기 함께 해보아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자책, 141쪽




밤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매일 습관처럼 보내는 시간이다. 마치 이렇게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매일밤 시를 베껴 쓴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17쪽)

'나'는 하루종일 (이혼한 동생의) 6살, 4살 조카들을 돌보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바깥일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일은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를 쓰며 등단을 준비 중이지만, 해가 갈수록 쉽지 않다. 맘껏 시를 쓸 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해가 갈수록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쓰기를 하려면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돈은 커녕 '자기만의 방' 조차 없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만남도 조카와 집안일을 돌보느라 거절한다.

내가 동동거리며 노력하고 애쓰는 일들의 결과가 너무 미비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허무해지곤 했다. 플라스틱 포장재에 겹겹이 둘러싸인 물건을 사게 되면 플라스틱 빨대를 쓸 때마다 들었던 죄책감이 무의미해졌던 것처럼. (…)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29~30쪽)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34~35쪽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았찌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44쪽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시간과 절대 노동, 절대적인 참을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61쪽)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해도해도 티 안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의 노력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게했다."(22쪽) 심지어 동생도 자기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데이트 하느라 바쁜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걸까?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가면 간다, 오면 왔다 말할 줄도 모르는 아버지였다. 발걸음 소리며 목소리 한번 크게 내는 법이 없는 사람"(27쪽)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신거였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97쪽)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주저앉게 될 것 같아서, 엄마와 한바탕 싸움을 한 뒤에 빈손으로 집을 나온다. 알바를 하면서 얻은 작은 공간이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나'가 시를 쓰게 됐는지, 그 시로 등단을 하거나 시집을 내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구병모 작가는 "꼭 필요한 만큼 불친절한 결말"(152쪽)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정류장에서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것이다.

"언젠가 배차 간격이 넓고 승객도 드문데다 목적지도 낯선 버스에 불쑥 올라타게 된다 해도, 우리는 정류장에서 기다렸던 시간을 함께 태워서 떠날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게 된들 우리가 만든 문장은 이미 몸에 배었으니 값없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153쪽

그동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도서관 대출을 활용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선택한 구독형 전자책 플랫폼(첫 달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체험 중)에서 첫번째로 선택해서 읽은 책이다. 경장편이라고 해야할만큼 분량은 가볍지만, '나'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내용은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0-12-2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얼 리뷰 플렉스!

뒷북소녀 2020-12-22 15:28   좋아요 0 | URL
음...지금 이해 못하고 있어요.ㅋㅋㅋ

보물선 2021-01-0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전자책은 다르네요?

뒷북소녀 2021-01-06 01:00   좋아요 1 | URL
네. 이게 밀리의 서재 에디션이라고 하더라구요. 뒷부분에 작가가 직접 필사한 것도 스캔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