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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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자책, 141쪽




밤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그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매일 습관처럼 보내는 시간이다. 마치 이렇게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매일밤 시를 베껴 쓴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17쪽)

'나'는 하루종일 (이혼한 동생의) 6살, 4살 조카들을 돌보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바깥일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일은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를 쓰며 등단을 준비 중이지만, 해가 갈수록 쉽지 않다. 맘껏 시를 쓸 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해가 갈수록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쓰기를 하려면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돈은 커녕 '자기만의 방' 조차 없다. '나'는 남자친구와의 만남도 조카와 집안일을 돌보느라 거절한다.

내가 동동거리며 노력하고 애쓰는 일들의 결과가 너무 미비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허무해지곤 했다. 플라스틱 포장재에 겹겹이 둘러싸인 물건을 사게 되면 플라스틱 빨대를 쓸 때마다 들었던 죄책감이 무의미해졌던 것처럼. (…)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29~30쪽)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34~35쪽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았찌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44쪽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시간과 절대 노동, 절대적인 참을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61쪽)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해도해도 티 안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의 노력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언제나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게했다."(22쪽) 심지어 동생도 자기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데이트 하느라 바쁜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걸까?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가면 간다, 오면 왔다 말할 줄도 모르는 아버지였다. 발걸음 소리며 목소리 한번 크게 내는 법이 없는 사람"(27쪽)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신거였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97쪽)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주저앉게 될 것 같아서, 엄마와 한바탕 싸움을 한 뒤에 빈손으로 집을 나온다. 알바를 하면서 얻은 작은 공간이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나'가 시를 쓰게 됐는지, 그 시로 등단을 하거나 시집을 내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구병모 작가는 "꼭 필요한 만큼 불친절한 결말"(152쪽)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정류장에서 다음에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것이다.

"언젠가 배차 간격이 넓고 승객도 드문데다 목적지도 낯선 버스에 불쑥 올라타게 된다 해도, 우리는 정류장에서 기다렸던 시간을 함께 태워서 떠날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게 된들 우리가 만든 문장은 이미 몸에 배었으니 값없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153쪽

그동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도서관 대출을 활용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선택한 구독형 전자책 플랫폼(첫 달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체험 중)에서 첫번째로 선택해서 읽은 책이다. 경장편이라고 해야할만큼 분량은 가볍지만, '나'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내용은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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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얼 리뷰 플렉스!

뒷북소녀 2020-12-22 15:28   좋아요 0 | URL
음...지금 이해 못하고 있어요.ㅋㅋㅋ

보물선 2021-01-0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전자책은 다르네요?

뒷북소녀 2021-01-06 01:00   좋아요 1 | URL
네. 이게 밀리의 서재 에디션이라고 하더라구요. 뒷부분에 작가가 직접 필사한 것도 스캔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