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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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소리 내어 읽습니다. 서사시의 운율이 느껴지도록 소리 내어 읽습니다. 비록 우리말로는 그 운율을 잘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아주 오래전 방식을 따라 소리 내어 읽습니다. 애초에 『일리아스』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 구송(口誦)을 위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의 사용이 아직 생활화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문학작품이든 역사 이야기든 어디까지나 구송(口誦)을 위해 쓰여진 것이지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씌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메로스 당시의 텍스트는 시인 또는 음송자(rhapsodos)들이 시를 낭송할 때 참고하기 위해 요지만 기록해두는 식의 간단한 것에 불과했으며, 전승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구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텍스트가 완전히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일 때는 후기의 음송자들에 의해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실제로 호메로스의 텍스트에서는 그런 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해설」 775~776쪽

   호메로스가 정리해서 쓴 『일리아스』는 인간들의 싸움에 신들이 끼어들어 싸움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서사시로 그려낸 것입니다. 이 싸움을 촉발시킨 것은 헬레네의 미모에 반한 철없는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일명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는 이미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된 헬레네를 몰래 트로이아로 데려와 두 나라 간의 싸움을 일으키게 되지만 파리스가 헬레네에게 반한 것도, 싸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도 모두 신들 때문입니다.

   "가증스러운 파리스여,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게 미친 유혹자여!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지. 이렇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멸시받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 머나먼 나라에서 창수들의 며느리인 미인을 데려와 네 아버지와 도시와 모든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적에게는 기쁨을, 그리고 너 자신에게는 굴욕을 안겼단 말이냐?" _헥토르, 102~103쪽

   아내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연합군을 모아 함선을 타고 트로이아로 진격합니다. 이 전쟁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지고, 이 사이 연합군 사이에서 최고 영웅으로 손꼽히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얻은 여자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 버립니다.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아가멤논 왕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전선에서 물러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단명하도록 낳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 치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명예라도 제게 주셔야지요. 하거늘 지금 그분께서는 작은 명예도 주시지 않아요. 넓은 땅을 다스리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저를 모욕하고, 제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으니 말예요." _아킬레우스, 43쪽

   아킬레우스가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에게 이렇게 읍소하자,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달려가 전쟁에서 빠진 아킬레우스를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까지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에게 짓밟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헤라를 제외한 여신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이 넉넉한 제우스, 당연히 테티스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아버지 제우스여! 내 일찍이 여러 신들 중에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대를 도운 적이 있다면 내 소원을 이뤄주시어 내 아들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그 애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나이다. 그럼에도 지금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 애를 모욕하여 그 애의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대가 그 애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조언자이신 올륌포스의 제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이 그 애를 존중하고 그 애에게 전보다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부디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리소서." _테티스, 50~51쪽

   한편, 트로이아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지만 무공이 뛰어나지 못해 앞장설 수 없었던 파리스 대신 그의 형 헥토르가 아카이오이족을 상대하기 위해 앞장섭니다. 헥토르가 수많은 아카이오이족을 죽이며 무훈을 세울 때도, 아카이오이족들이 제발 도와달라며 간청을 해도 아킬레우스는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헥토르의 손에 아킬레우스가 너무나도 아끼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임을 당하게 되자,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싸움터로 뛰어듭니다. 아킬레우스가 싸움에 뛰어들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립니다. 아킬레우스가 뛰어난 영웅이기도 하지만 그를 아끼는 제우스의 개입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에게 목표는 오직 하나, 헥토르를 죽여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하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것뿐. 그는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끌고 가 함선 옆에 매달고 전사한 그를 모욕합니다.

   "헥토르의 시신과 도시의 파괴자 아킬레우스를 둘러싸고 아흐레 동안 불사신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소. 그들은 훌륭한 정탐꾼인 아르고스의 살해자에게 시신을 빼내라고 재촉하고 있소. 하나 나는 앞으로도 그대의 존경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영광을 아킬레우스에게 내리기로 했소. 그대는 당장 진영으로 가서 그대의 아들에게 내 명령을 전하되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헥토르를 부리처럼 휜 함선들 옆에 붙들어두고 돌려주지 않는 것을 신들이 못마땅해하고 모든 신들 중에서 특히 내가 가장 노여워한다고 말하시오. 그러면 그는 내가 두려워서라도 헥토르를 내주게 될 것이오."_제우스, 685~686쪽

   아킬레우스의 무자비한 파괴와 만행을 보다 못한 신들이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라고 아킬레우스에게 명합니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늙은 아비가 그의 시신을 가져가게 하고, 트로이아인들이 헥토르의 장례를 치룰 수 있게 열하루 동안 싸움을 멈춥니다.

   "그대가 진실로 고귀한 헥토르의 장례를 마치게 해주실 생각이라면, 아킬레우스여! 이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아시다시피 우리는 도성에 갇혀 있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려면 멀리 나가야 하오. 게다가 트로이아인들은 잔뜩 겁을 먹었소. 아흐레 동안 우리는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_프리아모스, 708쪽

   『일리아스』는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714쪽)로 끝나지만, 트로이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지루한 전쟁을 끝내 줄 트로이 목마는 『일리아스』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싸움을 지켜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족이면서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영웅답지 않은 옹졸함입니다. 그는 전리품으로 주어진 여자 한 명 때문에 토라져, 수많은 영웅들과 동족들이 죽어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적장인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능멸하는 모습 또한 지극히 사사로워 보입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지도 모르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웅의 면모라고는 할 수 없겠죠. 이것은 필멸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구걸하지 않고 트로이아인들을 위해 싸운 헥토르가 더 멋져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들 또한 사사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파리스가 헬레나에게 반하게 된 것도 결국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유치한 미모 경쟁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들은 자신이 총애하거나 자신의 피가 섞인 인간들이 있으면 사사건건 개입합니다. 이는 제우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신들이 전쟁에 개입할까 봐 올륌포스 산 위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언제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에서도 여자의 표정은 아무도 살피지 않습니다. 여자는 감정이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양이나 황금처럼 셀 수 있는 물질처럼 취급됩니다. 그나마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와 최고 미인으로 손꼽히는 헬레네 정도만 감정이 있는 존재로 다뤄질 뿐입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이토록 방대한 서사시를 흥미롭게 써낸 호메로스와, 이렇게 오롯이 옮겨 써 준 번역가 천병희 선생의 힘을 느낍니다. 비록 인간은 필멸하지만, 인간들의 노래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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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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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9쪽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2쪽

   책 좀 읽어본 사람들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처음'이면서도 '다시'라는 말을 붙여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든 책이긴 하지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다시 읽습니다. 이전에는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냈습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가 아니지만, 결말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스킵해 주세요.
책의 목차를 살펴보는 것도 삼가해 주세요. 책의 목차만 봐도 결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아버지 표도르는 첫번째 아내와의 결혼에서 큰아들 드미뜨리와 상당한 재산을 얻습니다. 그녀가 죽자 두번째 아내와 재혼해 이반과 알료샤를 얻지만, 그녀 역시 죽어버립니다. 표도르는 부성애가 전혀 없는 인물로 세 아들들을 방치하다시피 하며,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키워져 다른 길을 갑니다. 드미뜨리는 군사 학교를 졸업 후 군인이 되고, 이반은 대학을 졸업한 후 논문을 쓰며 지식인으로 거듭납니다. 셋째 알료샤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시마 장로의 제자가 됩니다.
   죽은 어머니의 유산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던 드미뜨리가 아버지로부터 그 몫을 받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달갑지 않은 회합을 하게 됩니다. 그 회합은 알료샤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에서 조시마 장로를 모시고, 이반이 아버지와 큰형의 중재 역할을 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지만 아버지의 치사한 광대짓으로 그 회합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아버지 표도르와 드미뜨리는 금전적인 문제뿐 아니라 한 여자 때문에 서로 얽혀 있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만 하고 있고 진짜 마음은 5년전에 자신을 버리고 간 폴란드 신사에게 가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난폭하고 욕정이 넘쳤던 드미뜨리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싸우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또, 그루셴까와 아버지가 자신 몰래 만날까봐 두 사람을 감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표도르가 죽습니다. 누군가 집안으로 침입해 흉기를 휘둘렀고, 심지어 돈까지 훔쳐갔다고 합니다. 어린 드미뜨리를 키웠던 하인 그리고리는 도망치는 드미뜨리에게 맞아 머리를 다치기도 합니다. 모든 정황과 증인들이 드미뜨리가 '친부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눈물 덕분인지,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기도드린 덕분인지, 아니면 그 순간 성령이 내게 입을 맞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마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창문에서 물러나 담장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때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창문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장면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담장으로 향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갔습니다…….그런데 내가 담장을 넘으려는 순간 그리고리가 뒤쫓아와서……." 825쪽

   "나는……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창문 아래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826쪽

   "나는 죽이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죽일 수도 있었고,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으며, 내 수호 천사의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비열한 것입니다, 비열하단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죽이지 않았다고요!" 830쪽

   정말 드미뜨리는 친부 살인범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모든 정황과 증인들이 일관되게 한 사람을 지목할 때는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범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평소 드미뜨리의 행동과 말을 고려했을 때, 약간의 트릭만 준비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드미뜨리의 변호사 페쮸꼬비치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적어도 단순한 선입관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파멸시키는 일은 주저했을 겁니다. 물론 우리의 피고가 그런 선입견을 갖도록 만들었더라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286쪽

   "여러분들은 러시아의 재판이 단순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멸된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법률과 형벌이 존재할 뿐이라면, 우리들에게는 영혼과 사상이, 파멸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 우리 피고이 운명은 오직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의 운명도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구해 내실 것입니다." 1298쪽

   변호사가 검사 측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는 20년형을 받아 시베리아로 떠나야 합니다. (←※)

   『죄와 벌』처럼 재판 이후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야기가 더 나올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사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미완성 작품입니다. 애초에 도스또예프스끼는 2부작으로 기획했지만, 첫 번째 이야기를 완성한 지 3개월 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름나름으로 상상해 볼 수 밖에요.

   결말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줄거리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친부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수많은 지적 대화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재판이 끝난 이후 도스또예프스끼는 일류샤의 장례식을 한 에피소드로 보여줍니다. 한때 드미뜨리는 술을 마신 후 일류샤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행패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이를 본 일류샤는 우연히 만난 알료샤의 손가락을 깨물어 버립니다. 일류샤의 이런 사연을 알게 된 알료샤는 그때부터 줄곧 일류샤를 후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일류샤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한 알료샤는 이런 조사를 남깁니다.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1345쪽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드미뜨리를 구원해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국 구원받지 못한거죠. 하지만 알류샤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의 세대는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들은 구원 받을 수 있길 바라며 조사를 남깁니다.

   이렇게 에피소드들은 태형, 학대, 종교, 심리분석, 교육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로 거론되며, 우리는 이 에피소드들을 통해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과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버려져야 할 논제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 많습니다. 시대가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은걸까요?
   그러므로 이 책은 쉽게 읽히거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며, 단 한번만 읽어서도 안되는 '고전'입니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2쪽


   너도 까라마조프에 불과해, 너도 완전히 까라마조프라고. 144쪽

   저는 형님 이야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니에요. 형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형님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은 하나의 똑같은 사다리예요. 저는 가장 낮은 계단에, 형님은 열세 번째 계단의 어느 높은 곳에 있을 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똑같은 부류일 뿐이죠. 맨 아래 계단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어쨌든 반드시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마련이죠. 194쪽

   그런데 요즘 정신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도,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정신병을 앓고 있고, 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1002쪽

   내가 지금 심리 분석을 해본 것은 인간의 심리란 마음대로 자유로이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심리라는 것은 가장 성실한 사람마저도 부지불식간에 소설가로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나는 심리 분석의 악용과 남용을 감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1264쪽

   만일 어떤 사람이 자다가 별안간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잠이 깬 그는 수면을 방해받은 것이 얄밉지만, 다시 금세 잠이 들겠지요, 두 시간쯤 지난 후 다시 신음소리가 나면 잠이 깼다가 또 잠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신음소리를 듣고 깨어났다가 잠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루 저녁에 세 번 잠을 깼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는 누가 밤새도록 신음하는 바람에 한 잠도 못 잤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 시간씩 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잠이 깬 몇 분만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밤새도록 수면을 방해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284쪽

   왜 우리는 이 '불행'을 좀더 가까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1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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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온도 그날의 빛 그날의 분위기 - 스탠딩에그 여행산문집
에그2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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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은 여행에세이. 지난여름, 로마로 여행을 떠나기 전 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여행 팁을 얻었다. 덕분에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곳들을 한적하게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 책 또한 새벽 5시에 걸었던 로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음악하는 아티스트 특유의 감성이 가득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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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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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있다. 자신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꽃처럼 사랑에 사로잡힌 남자, 반면 사랑도 이성적으로 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끌어 낼 줄 아는
남자.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아침드라마에 라틴문학 특유의 환상성이 버무려진 것 같은 소설.
부디 ‘달콤‘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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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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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헬렌 한프는 뉴욕에서 평생 글을 썼지만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154쪽)라고 자평할 정도로 그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는 한 평론지에 실린 '희귀 고서점' 광고를 보고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이 있는데, 만약 5달러가 넘지 않는다면 보내달라고 말이죠. 얼마 후 서점 담당자 프랭크 도엘로부터 그녀가 원하는 책과 함께 편지가 날라옵니다. 그렇게 그들의 편지는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 그들의 편지는, 1969년 1월 8일 도엘이 죽었다는 편지가 날아올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은 단순히 주문서와 청구서뿐만이 아닙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황을 맞이한 뉴욕은 물자가 풍부했지만, 런던은 한달에 달걀 하나를 배급받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헬렌은 뉴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이나 햄 같은 것들을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서점 사람들도 사진이나 직접 짠 테이블보 등을 선물로 보내줍니다. 그들의 우정 어린 편지들은 가슴 설레게 했고, 도엘의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편지는 눈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편지들을 읽고 있는 독자가 이렇게 애틋하게 느낄 정도이니, 당연히 헬렌 한프는 런던 17번가를 뉴욕 17번가보다 더 가깝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뉴욕 이스트 가와 런던 채링크로스 가가 지리적으로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여기 이 자리에서는 런던이 17번가보다 훨씬 가깝답니다. 31쪽

   그녀는 항상 런던 채링크로스 가로 휴가를 떠나길 고대하지만, 서점 사람들이 잠자리를 얼마든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지만,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가 비행기 티켓 값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루다보니 결국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서점을 떠나게 됩니다.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154쪽

   프랭크 도엘이 죽은 후, 헬렌 한프는 그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챙겨 출판사로 향합니다. 이 편지들 덕분에 그녀는 작가로서는 누려보지 못한 인기를 얻게 되지만, 전세계에서 날아오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느라 인세로 받은 돈이 모두 우표 값으로 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큰 신세를 졌답니다. 145쪽

   그녀는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은 기념 동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당신도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18쪽

   여러분이 좀 덜 조심하여 카드를 쓰는 대신 속표지에다 글을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행여나 책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서적상의 본분이 거기서 발휘된 거겠죠? 현재의 소유자에게는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 답니다). 50쪽

   나도 영국행을 감행하여 나의 친애하는 서점을 직접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한테 그럴 배짱만 있다면 말이야. 5,000킬로미터라는 안전한 거리가 있기에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편지들을 써보낸 건데,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십중팔구는 내가 누군지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버릴 것 같아. 71쪽

   가장 애교 넘치는 부분에서 자꾸만 펼쳐지는 것이 마치 전 주인의 유령이 내가 읽어본 적 없는 것을 짚어주는 듯하답니다. 90쪽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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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1-1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책 이야기에 공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