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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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소리 내어 읽습니다. 서사시의 운율이 느껴지도록 소리 내어 읽습니다. 비록 우리말로는 그 운율을 잘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아주 오래전 방식을 따라 소리 내어 읽습니다. 애초에 『일리아스』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 구송(口誦)을 위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의 사용이 아직 생활화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문학작품이든 역사 이야기든 어디까지나 구송(口誦)을 위해 쓰여진 것이지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씌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메로스 당시의 텍스트는 시인 또는 음송자(rhapsodos)들이 시를 낭송할 때 참고하기 위해 요지만 기록해두는 식의 간단한 것에 불과했으며, 전승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구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텍스트가 완전히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일 때는 후기의 음송자들에 의해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실제로 호메로스의 텍스트에서는 그런 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해설」 775~776쪽

   호메로스가 정리해서 쓴 『일리아스』는 인간들의 싸움에 신들이 끼어들어 싸움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서사시로 그려낸 것입니다. 이 싸움을 촉발시킨 것은 헬레네의 미모에 반한 철없는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일명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는 이미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된 헬레네를 몰래 트로이아로 데려와 두 나라 간의 싸움을 일으키게 되지만 파리스가 헬레네에게 반한 것도, 싸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도 모두 신들 때문입니다.

   "가증스러운 파리스여,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게 미친 유혹자여!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지. 이렇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멸시받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 머나먼 나라에서 창수들의 며느리인 미인을 데려와 네 아버지와 도시와 모든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적에게는 기쁨을, 그리고 너 자신에게는 굴욕을 안겼단 말이냐?" _헥토르, 102~103쪽

   아내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연합군을 모아 함선을 타고 트로이아로 진격합니다. 이 전쟁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지고, 이 사이 연합군 사이에서 최고 영웅으로 손꼽히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얻은 여자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 버립니다.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아가멤논 왕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전선에서 물러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단명하도록 낳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 치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명예라도 제게 주셔야지요. 하거늘 지금 그분께서는 작은 명예도 주시지 않아요. 넓은 땅을 다스리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저를 모욕하고, 제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으니 말예요." _아킬레우스, 43쪽

   아킬레우스가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에게 이렇게 읍소하자,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달려가 전쟁에서 빠진 아킬레우스를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까지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에게 짓밟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헤라를 제외한 여신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이 넉넉한 제우스, 당연히 테티스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아버지 제우스여! 내 일찍이 여러 신들 중에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대를 도운 적이 있다면 내 소원을 이뤄주시어 내 아들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그 애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나이다. 그럼에도 지금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 애를 모욕하여 그 애의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대가 그 애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조언자이신 올륌포스의 제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이 그 애를 존중하고 그 애에게 전보다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부디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리소서." _테티스, 50~51쪽

   한편, 트로이아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지만 무공이 뛰어나지 못해 앞장설 수 없었던 파리스 대신 그의 형 헥토르가 아카이오이족을 상대하기 위해 앞장섭니다. 헥토르가 수많은 아카이오이족을 죽이며 무훈을 세울 때도, 아카이오이족들이 제발 도와달라며 간청을 해도 아킬레우스는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헥토르의 손에 아킬레우스가 너무나도 아끼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임을 당하게 되자,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싸움터로 뛰어듭니다. 아킬레우스가 싸움에 뛰어들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립니다. 아킬레우스가 뛰어난 영웅이기도 하지만 그를 아끼는 제우스의 개입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에게 목표는 오직 하나, 헥토르를 죽여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하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것뿐. 그는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끌고 가 함선 옆에 매달고 전사한 그를 모욕합니다.

   "헥토르의 시신과 도시의 파괴자 아킬레우스를 둘러싸고 아흐레 동안 불사신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소. 그들은 훌륭한 정탐꾼인 아르고스의 살해자에게 시신을 빼내라고 재촉하고 있소. 하나 나는 앞으로도 그대의 존경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영광을 아킬레우스에게 내리기로 했소. 그대는 당장 진영으로 가서 그대의 아들에게 내 명령을 전하되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헥토르를 부리처럼 휜 함선들 옆에 붙들어두고 돌려주지 않는 것을 신들이 못마땅해하고 모든 신들 중에서 특히 내가 가장 노여워한다고 말하시오. 그러면 그는 내가 두려워서라도 헥토르를 내주게 될 것이오."_제우스, 685~686쪽

   아킬레우스의 무자비한 파괴와 만행을 보다 못한 신들이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라고 아킬레우스에게 명합니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늙은 아비가 그의 시신을 가져가게 하고, 트로이아인들이 헥토르의 장례를 치룰 수 있게 열하루 동안 싸움을 멈춥니다.

   "그대가 진실로 고귀한 헥토르의 장례를 마치게 해주실 생각이라면, 아킬레우스여! 이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아시다시피 우리는 도성에 갇혀 있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려면 멀리 나가야 하오. 게다가 트로이아인들은 잔뜩 겁을 먹었소. 아흐레 동안 우리는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_프리아모스, 708쪽

   『일리아스』는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714쪽)로 끝나지만, 트로이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지루한 전쟁을 끝내 줄 트로이 목마는 『일리아스』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싸움을 지켜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족이면서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영웅답지 않은 옹졸함입니다. 그는 전리품으로 주어진 여자 한 명 때문에 토라져, 수많은 영웅들과 동족들이 죽어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적장인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능멸하는 모습 또한 지극히 사사로워 보입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지도 모르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웅의 면모라고는 할 수 없겠죠. 이것은 필멸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구걸하지 않고 트로이아인들을 위해 싸운 헥토르가 더 멋져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들 또한 사사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파리스가 헬레나에게 반하게 된 것도 결국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유치한 미모 경쟁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들은 자신이 총애하거나 자신의 피가 섞인 인간들이 있으면 사사건건 개입합니다. 이는 제우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신들이 전쟁에 개입할까 봐 올륌포스 산 위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언제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에서도 여자의 표정은 아무도 살피지 않습니다. 여자는 감정이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양이나 황금처럼 셀 수 있는 물질처럼 취급됩니다. 그나마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와 최고 미인으로 손꼽히는 헬레네 정도만 감정이 있는 존재로 다뤄질 뿐입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이토록 방대한 서사시를 흥미롭게 써낸 호메로스와, 이렇게 오롯이 옮겨 써 준 번역가 천병희 선생의 힘을 느낍니다. 비록 인간은 필멸하지만, 인간들의 노래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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